‘차형준목사! 선교와 愛國的 독립운동’ “헌신적 생애”

탐방 / 노현주 기자 / 2020-07-29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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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차병원 창업자 故차경섭씨의 ‘부친 故차형준 목사’
3.1운동 당시 강계읍교회 종소리…차형준 목사 만세시위 주도
차병원 설립자 차광렬 박사‘생식의학 연구’로 국내·외에서 명성
‘독립운동, 선교활동, 국가유공자’ 무료의료 지원 강한 사명감

[일요주간 = 노현주 기자] 차병원의 창업자 故차경섭씨의 아버지로 알려진 故차형준 목사는 1879년 평북 용천 출생으로 평양신학교를 4회로 졸업하고, 의주교회 강도사를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만주 안동현 등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차형준 목사는 평양신학교 입학 전부터 강계(평안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지역에서 사경회 교사로 활동하며 자성읍 지역에 개척 전도를 하고 누가복음을 가르치는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편집자주)

▲ 평양신학교 4회 졸업생 故차형준 목사.
◇ 故 차형준 목사의 목회활동
강계는 익히 북한의 ‘강계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계정신이란 북한의 자강도(평안북도의 강계군, 자성군, 후창군, 위원군 등의 지명이름)가 북한이 큰 어려움을 겪던 시절 이를 극복하는데 모범을 보였다고 하여 도청소재지인 강계의 이름을 따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말은 한 때 북한의 경제선동의 대표적 구호로 쓰이기도 했다.


강점기 당시 강계 지역의 3.1운동은 강계읍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됐다고 한다. 이 강계읍교회는 차형준 목사가 평양신학교 입학 전부터 주로 활동했던 무대다. 3.1운동 당시 강계의 만세시위는 4월 8일에 일어났는데, 계례지병원 지하실에서 찍은 독립선언서 2,000부와 함께 강계읍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에 일본 당국은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고, 강계읍교회의 종을 여섯 달 동안 치지 못하게 하는 등 강압에 나섰다. 당시 강계읍교회의 가장 중요 인물은 바로 차형준 목사의 6촌 차학연 장로였다. 6촌 형인 차학연 장로와 함께 활발한 전도 활동을 진행하던 차형준 목사는 평양신학교 졸업 후 191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덕흥, 정주, 청정 등 네 교회의 목사로 임명된다. 이후 중국에서도 전도목사로 활동을 하다가 다시 평양신학교로 돌아가 1917년부터 별 신학, 1925년 신학연구 등 좀 더 심층적인 공부를 진행, 1931년 또 한 번의 평양신학교 졸업증서를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차형준 목사는 평북로회(평북노회)의 총대로 총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평북노회는 1907년 평양 장대제교회 예배당에서 조직된 독노회로, 국내와 만주, 중국 산동성 지역 등에 선교사 업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차형준 목사는 7, 8, 11, 15회 등 평양, 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 열린 총회에 총대로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1910년대에는 일본이 허위 날조한 105인 사건과 3.1운동 등으로 많은 교역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이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양전백(1915년 평북노회장,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유여태, 김병우, 이승훈, 이명룡 등을 비롯 많은 교인들과 함께 차형준 목사도 잡혀갔다. 

 

▲ 차 형준 목사-뒷줄 중앙 흰옷 입은 분, 정읍교회, 연대 미상


◇ 故차형준 목사의 독립운동 비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형준 목사는 평양신학교 4회(1911년 졸업) 출신으로 4회 졸업생 15명중에서는 김덕선과 차형준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졸업과 함께 평안북도 정주군에 1899년 설립된 정주읍교회의 첫 목회자(처음은 강도사)로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목회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1917년에 기독 장로회 교단은 차형준 목사를 북간도 안동 현으로 파견하는데, 만주 안동현은 압록강 인근의 조선인 촌락이 많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곳은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열단이 일본 고위 관리 암살과 테러에 쓸 고성능 폭탄을 상해에서 제작하여 톈진으로 선박 수송하고, 다시 육로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고, 다시 의주를 거쳐 경성으로 밀반입했던 계획에서 거쳐야 할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독립군과 일본 경찰, 헌병대 첩자가 우글거리며 공존했던 지역으로, 누가 첩자고 누가 밀정인지, 누가 어느 계열의 독립군이고 의열단원인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던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실전적 소설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서’에서 의열단 단원인 김시현, 홍종우와 일본 경찰 간부이자 의열단 비밀단원인 종로서 황옥 경부가 안동 현을 거쳐 경성까지 폭탄 밀반입에는 극적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거사 전, 보관된 폭탄이 밀정의 밀고로 총독 암살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고, 김구 선생과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단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 한다.


바로 그 안동 현의 조선인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독립 조직과 연락책으로 활약한 이가 바로 차형준 목사였다. 이후 정읍에 이주해서까지 차학연, 차형준을 포함한 차씨 일가는 꾸준히 각종 독립조직에 금전적인 후원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후 차형준 목사는 중국 단동 봉황성 관천에 선교사로 파견되기도 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는 정읍교회(현 정읍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기도 한다. 이후, 평북 철산군 참면 용산리에 1922년 창립된 용산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30년대에는 충남, 철산 등 각지에서 목사 활동을 하다가 1943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35년, 전주 신흥고보–호남 학생연합 예배 기념촬영.

◇ 故차경섭 박사와 차병원의 탄생
차경섭 박사는 전주 신흥고보를 다니다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신흥학교가 폐교되자, 고창고보와 전주고보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당시 5학년 졸업반이었던 차경섭은 세브란스 의전으로 진학하게 된다. 신흥고보 시절 특히 수학에 매우 특출한 재능이 있어 본인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수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당시의 목회자의 생활은 경제적인 여유와 안정된 생활이 없었기에, 아버지 차형준 목사는 막내 아들인 차경섭에게 의사가 되길 강력히 권유하여 세브란스 의전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차경섭 박사는 졸업 후 한때 고향인 의주에서 개업도 했으나, 해방 후 큰 꿈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로 6년간 형설의 공을 쌓고 귀국하여, 1960년 중구 초동의 옛 스카라 극장 앞에 차 산부인과를 개원하면서 차 병원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를 모태로 차광렬 박사(차형준 목사의 손자, 現글로벌차바이오연구소장)는 1984년 강남 역삼동에 강남차병원을 개원하게 되는데, 이후 차광렬 소장은 ‘승승장구의 신화’로 현재의 차병원 그룹을 일궈낸다.


한편 194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차형준 목사의 3남 차경섭은 아버지의 선교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는 대신 활발한 의료 활동으로 구원에 나섰던 것으로 유명한데, 차병원그룹은 이 같은 선교정신과 독립정신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등 국가에 이바지한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의료 지원에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씨의 직손들을 대상으로 수술 등의 의료 행위를 지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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