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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지하교회 실상의 정교한 파악이 북한선교의 단초를 제공한다. | ||
● 북한 창건 지도부는 ‘기독교’ 출신
또한 외조부 강돈육 장로는 김일성에게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베드로의 번역어)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법관이었던 故 강양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는 동연맹의 위원장을 맡았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7: 6-9)
구약성경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예시하여 볼 때, 진정 북한의 기독교는 영원히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소생의 기운이 불현듯 치솟을 것인가? 해답은 철옹성 북한 정권에 어떤 에너지가 가해질시 변동은 불가피하며, 그 제1전선이 바로 숨죽이며 마른 뼈 신세 같았던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따사로운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칠 것이라는 점이다.
남한과 한국의 해외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기독교 모임의 진정성 여부에 대해서 강한 의혹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국제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북한 내부에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고 조작을 해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구권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극한적인 이념적 정치적 압력과 심지어는 공개적인 탄압 하에서 신앙과 교회의 존속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해외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가한 모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88년 11월 6일, 평양시 만경대 구역 봉수동(행정구역 명칭은 건국동) 보통강 하류의 시내가 앞에 흐르고, 멀리 산악을 바라보는 작은 언덕 위에 한국전 이후 최초의 교회인 봉수교회가 입당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년 11월 20일, 북녘 땅에서 역사적인 첫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재미 박요한 목사(평양의 낮과 밤의 저자)는 봉수교회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교회는 2층 건물의 규모에 400명 정도를 수용하며, 목회자는 이성봉 목사를 위시 5명의 목사가 있다. 그리고 이곳 박춘근 전도사에 의하면 이 교회 신도의 대다수는 평양시 가정교회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신축된 교회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 한다." 박요한 목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곳 성도들은 동원된 사람들이건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40년 동안 지하 교인으로 있다가 새 세상을 만나 광명한 지상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어쨌든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의 기독교 정책에는 미미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북한의 외형상 종교 유화책은 분단 40년 만에 남북 기독교인들의 최초 만남 허용(1988년 11월 23일∼25일, 스위스 글리온), 북녘교회의 재건 움직임(평양 봉수교회), 성경과 찬송가의 출판(찬송가와 신약 1983년, 구약 1984년), 북한 당국과 해외동포 기독교 지도자간의 모임(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핀란드의 헬싱키)등의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실재를 증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기독교 인사들에게 중국의 가정교회를 모방한 일반 가정 집회의 공개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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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서 기독교인의 신분이 확인될 경우에는 이루말할 수 없는 신체적 고문과 인격말살이 자행된다. | ||
그리고 중국을 방문한 우리나라 언론인이 우리 교포 신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문혁 당시 홍위병들이 성경책을 마구 태워 버릴 때, 어느 교인이 꼼꼼하게 만년필로 베껴 쓴 664페이지 분량의 33만 5천자가 되는 신약성서를 접했다 한다.
이외에도 북한을 방문한 중국 교포 청년이 눈먼 장님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기쁨은 찬송가 부르는 것이라 했다 한다. 이에 얼마나 알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약 300곡 정도의 찬송가를 암송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며, 1991년에 남북 여성 세미나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북한 대표단의 최옥씨는 찬송가 십여 곡을 불러 화제가 되었다.
● 다양한 채널로 확인 ‘지하교회 급신장’
우리는 북한 교회에 대한 실상을 현 특수 환경을 감안할 때, 여러 통로를 통해 간간이 확인되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 개략적으로 밖에 짐작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공산권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사역자들, 북한을 방문하는 해외동포 기독교 인사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등을 비롯한 국제 기독교 단체들의 중개와 협조를 통한 교류나 접촉의 모색에서이다. 시간을 소급하거나 현재의 시간표를 엮어 그 실상들을 냉철하게 엄중하게 즉시하여 보기로 한다.
대략 3O년전 중국의 기독 기관지 천풍(天風, 1985. 5)은 북한 교회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북한 신도의 다수는 약 12∼18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는 전국적으로 500여 곳이 있다. 또한 신도의 고령화와 분산으로 인해 신도 상호간의 접촉은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외에도 현재 평양에는 3년제 신학교 1개소와 전국적으로 목사는 20여명, 전도사와 장로, 집사를 포함하는 교역자는 500여명 정도이다. 부연하면 한국전쟁 전에 안수 받은 목사 10여명이 아직 생존해 있고, 유일한 신학원인 평양 신학원에서는 모두 5기에 걸쳐 3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다.
중국의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북한 신도들과 비밀히 접촉해온 여러 채널을 분석 종합한 바, 대략적 실상만도 생각보다 훨씬 지하교회 숫자가 많을뿐더러 다양한 계층에다 지역 분포도 역시 광범위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다양한 실상들을 입체 총괄하여 본다. 자발적 출처 이외에는 밝히지 않으며, 신분은 익명으로 소개한다.
◆ 지난 3월 4일 세이브엔케이(Save North Korea) 기도회 탈북민 증언만 청취해도 북한 지하교회의 현 실상과 그 탄압의 강도를 생생히 감지할 수 있다.
나는 1960년 4월 20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외삼촌들은 당 중앙에서 일했고, 외할머니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 경력이 있었다. 출신 성분이 좋아 학생 시절엔 사상담당 부위원장과 학술담당 리더 등을 하다가 졸업 후에는 당 기관에서 문서를 담당했다. 이후에도 나는 조선노동당 청년위원장인 남편과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고 풍족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나는 97년부터 신앙을 접했다는 이유로 2000년 1월에 체포됐다. 죄명은 ‘반동사상 유포죄’였고 조선노동당 역사에 없는 특대 간첩죄로 최고형을 받았다.
중국 모 교회에 있는 A모 집사가 내 사촌올케였는데 그 교회 물품으로 우리를 지원했다. 근데 이 분이 저녁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봤다. 처음엔 ‘우리 집안에도 이런 반동이 있었는가?’라며 놀랐다.
그 올케가 우리 집에 와서는 아픈 내 딸을 안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하고 나면 애가 깨어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서 복음성가 부르는 걸 따라 부르다 보니까 앓던 아이가 나았다. 1997년 가을에 겪은 일이다. 이렇게 우리 형제를 중심으로 지하교회가 조직됐다.
우리 친지들은 국가 주요 명절 때마다 모여 기도를 했다. 땅속에서 나온 성경책을 비밀리에 돌려보면서 어떠냐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어 지하교회가 몇 개 더 생겨났다.
그 후로 나는 중국을 두 차례 방문했다. 그때 △△교회에서 후원금을 받아 북한으로 돌아가서는 성경책과 함께 북한 지하교회들을 지원했다. 이 사실이 북한 보위부에 고발돼 비밀수사가 시작됐다. 결국 나는 2000년 1월에 체포됐는데 6개월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피부의 흔적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너무 끔찍해서 간수들도 치를 떨 정도였다. 그들은 내게 인신매매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는데, 종교간첩으로 몰아세우면 겁을 먹은 지하교회 교인들이 모두 탈북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지도 않은 인신매매죄를 인정하고 재판정으로 갔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체포 후 6개월만인 2000년 6월이었다.
1차 재판이 끝나고 정식 국가보위부가 실체를 드러내고 ‘사건명령확증서’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다시 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 당한 끔찍한 고문과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안면신경마비까지 생겼다. 그런 상태에서 감방에 들어갔다가 이 사실이 외부에 노출될까봐 국가보위부는 수감자들을 단속했다. 나를 독방에 그 상태로 방치한 것이다.
이후 2000년 7월 3일에 안면신경마비로 운신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철저 통제 하에 2차 재판이 진행됐다. 당시 내 체중이 28kg까지 줄고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이 없어 엉덩이 골격이 확연히 나타나고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는 “가장 악랄하고 잔악한 종교간첩을 말려죽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를 “조선노동당 역사에 없는 특대형 종교간첩”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재판정엔 종교간첩활동의 증거자료로 성경책들이 제공됐다.
가족과 친척들을 살리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왜 반동이며 종교간첩이란 말인가? 북한의 형제국가인 중국조차 허가하는 기독교 교회에 갔는데 종교간첩이라 하면 평양에 대형교회 만들고 관광에 사용하는 북한 당국이야말로 종교간첩단이 아닌가?
2002년 봄에 남편과 어린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병상에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남편이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집과 살림살이를 팔아 안전위원들과 간수들에게 뇌물을 줬다. 결국 나는 2년여 만에 병보석으로 나왔다. 6개월간 몸을 추스른 후에 결국 두만강을 넘었고, 다시는 아들과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때 아들은 일단 중국 친척집에 맡겼다.
2005년 대한민국에 입국하고 2008년 4월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여하러 미국 워싱턴DC에 갔다. 당시 수잔 솔티 여사가 마중을 나와 나를 미국 상원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 ‘크로싱’의 시사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연을 들은 미국 정치인들이 나를 붙잡고 우는 바람에 시사회장이 울음바다가 된 일도 있다. 많은 지하교인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평화통일을 갈망하고 있다. 핵무기보다 더 위력적인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남한 국민들에게 있다.
◆ 중국에 거주하는 자매 한분이 북에 계신 시어머니를 뵈러 갔다. 마침 주일 아침이 되었는데, 기독교 신분임을 밝히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시댁 식구들도 오늘이 주일인데 하며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이에 직감적으로 크리스천임을 감지한 이들은 신앙고백으로 서로를 확인했다.
잠시 후 그들은 두 세 시간의 먼 거리를 걸어 산속의 어느 움막에 도착했다. 움막의 망을 보던 아이가 모르스 부호처럼 신호를 보내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17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세상에 그런 거지가 없었다. 함께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이 소식을 외부에 전해 줄 것을 부탁 받고 전 교인의 이름과 나이를 적어 가지고 왔다. 그 종이를 제가 가지고 있다.
◆ 평양의 젊은 고급 관리가 폐암에 걸려 죽기 전에 중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보러 그곳에 갔는데,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아세아 극동방송을 듣게 되었다. 마침 미국에서 오신 굿엘 목사님의 치유 설교를 듣고 왠지 회복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갔는데,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람이 완전히 치유되어 1년 후에 친척을 다시 방문했다. 이에 그곳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앞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권유했다.
다시 돌아와 고민하다 어머니께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이에 어머니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원래 어머니는 집사, 할머니는 권사이었는데, 자기 아들의 장래를 망칠까봐 두렵고 고발당할까 겁도 나서 아들에게 끝까지 숨긴 것이다.
어머니는 진작 복음 전하지 못한 것이 수치스럽구나 하면서 뉘우치고는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지금 와서는 5명에서 10명씩 모이는 예배를 열 군데로 나누어 68명이 모이고 있다 한다.
◆ 1987년에 중국에서 어느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이 할머니는 문혁 당시 북조선이 살기 좋다는 말에 현혹되어 북으로 이주했다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공개적 신앙생활은 허용되지 않았기에 기도는 다락방에서 27년간 했고, 찬송은 누가 들을까 해서 산과 들에서 술취한 사람처럼 흥얼흥얼했다 한다.
이 할머니는 중국을 방문해 돌아 갈 때면 매번 어느 정도의 성경을 가지고 들어간다 했다. 위험하지 않느냐는 우려의 말에 "보석인 걸요. 죽기밖에 더하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외에도 아시아에서 26년간 중국과 북한 선교를 위해 헌신한 브라더 데이비드(brother david)는 다음의 체험 실례를 전한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삼촌뻘 되는 사람이 신문 발행인이며, 아버지는 모 대학 학장인 다소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의 호텔 방을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발코니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방안에는 도청장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가서자 그는 나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이곳 기성세대의 말을 믿지 말라. 그러니 아무도 진정 나의 친구가 없다." 이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을 귀한 친구 한 분을 소개해 주겠소"라고 말하면서 그분이 마태복음에 등장하니 잘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다음날 또 찾아와 "이 복음서를 밤새 읽었노라"고 했다.
● 지하교회 역사적 ‘대탄압 사건들’
다음은 북한 당국의 기독교 대탄압책에도 면면히 신앙의 정절을 고수하고 있는 북녘 교인들의 극심한 대탄압 사건들로 여러 루트를 통해 입수된 실상들이다.
◆ 휴전후 북한에서 가장 큰 종교사건은 세칭 이만화 목사 사건이다. 평북 용천군 소제 협동농장 작업반원으로 일하던 이 목사는 공산당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체 하면서 당 간부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 지하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교회는 소조 단위로 꾸준히 확장되어 10여개 협동 농장에 500여개의 소조와 무려 2천여 명에 이르는 신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직이 노출된 것은 1957년 8월의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선거 때이다. 이 목사는 신도들에게 투표에는 참석하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게 해서 실제적으로 투표를 거부하게 했다.
결국 개표시 2천여표의 차이가 나자 사회 안전부는 집중수사를 벌였고, 마침 주일예배를 보던 두 신도의 가정집이 발각되었다. 체포가 거듭 확대되자 이만화 목사는 자진 출두하여 자신이 책임자임을 밝혔고, 이로 인해 10여명이 공개 처형을 당하였다.
◆ 다음으로는 1974년 10월에 탄로가 난 사건이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교회의 지하실을 김태용 목사가 비밀리에 개조해 교회를 꾸민 후, 20년이 넘도록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김일성은 그 지역을 주택지 재개발 지구로 선정해서 공사에 착수했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한 대표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1974년 우리측 대표단을 함흥지방으로 안내할 의향에서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위장을 철저히 하지 못해 지하교회가 발각되었다. 그 당시 교회 신도들은 18세에서 78세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 도수는 모두 36명에 이르렀는데, 함흥 시민들을 모아놓고는 도로공사용 롤러로 깔아 죽였다.
◆ 1959년 초의 일이다. 박천군에 있는 여교사가 아이들에게 과외학습을 하면서 찬송가곡에 수령에 대한 가사를 붙여 가르쳤다. 또한 위대한 능력을 지닌 분(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듯 은연중 어린이들에게 신앙심을 심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는 공교롭게도 중앙당의 집중지도 사업이 한창이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비밀경찰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결국, 그녀 어머니의 실토로 인해 전모가 드러나 그 여교사는 처형을 당하였다.
그밖에도 1956∼1958년, 당시 신의주 사범전문학교 내에 백마회라는 학생들의 공인 자치단체가 있었는데, 성적이 우수하고 신임이 두터운 모범 학생들이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학교장의 승인을 얻어 조직한 서클이다. 이 또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그 배후에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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