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의 후계수업 원칙 목계(木鷄)
삼성그룹의 성공과 대한민국에서의 막대한 비중과 역할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만 삼성그룹이 한국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과 삼성이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 만큼 더 많은 사회적 역할을 바라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것들도 역시 이건희 시대 삼성의 성공과 삼성의 역할을 인정하는 기저에서 나오는 시각들이다.
그러나 이건희 시대 삼성의 성공은 이병철 선대회장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두고 벌인 마지막 승부의 대성공이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의 후계자로 장남 이맹희씨를 제치고 3남 이건희를 낙점했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이 그룹 부회장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던 시절 줄기차게 주장했던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성공의 기틀을 닦아 놓았다.
사실 반도체 사업의 특성과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 상황 상 아무리 이건희 회장의 안목이 뛰어나다고 해도 첫 10년은 큰 적자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아버지 몰래 아남반도체를 인수한 뒤에도 적자만 보고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건희 시대 삼성그룹의 반도체 분야 성공도 이병철 회장이 적자 리스크를 모두 떠인아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삼성그룹은 고작 2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확고하게 세워놓은 원칙이 있다. 바로 후계자는 조용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을 뿐 후계자가 미래 권력으로서 현재 권력인 회장에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3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포하고 부회장으로 앉힌 뒤 목계(木鷄)의 이야기를 강조했다. 목계는 나무로 깎아 만든 닭이다. 암탉은 아침만 되면 ‘꼬끼오’하고 울지만 목계는 울지 않는다.
즉 경영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보기만 하라는 것이다. 또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부회장이 후계자로서 삼성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며 고민할 때 경청(傾聽)이라는 붓글씨 한 점을 선물했다. 이는 미래 권력으로서 앞으로 나서지 말고 뒤에서 듣기만 하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후계자 시절 이건희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모든 경영 전반에 대해 접근할 권리를 부여받았고 모든 일에 사후 보고를 받았지만 정작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권은 단 하나도 주어지지 못했다. 그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것도 이병철 회장의 의지와 상관없는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후계자 이건희 부회장은 유리벽 속에 갇혀버린 허수아비 부회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의 이같은 조치에 대해 경영 전문가들은 “3남 이건희를 삼성그룹의 오너로 단련시키면서 자신이 정한 삼성그룹의 황제학을 전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해석한다.
이같은 후계자 수업 방식은 현재 삼성그룹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001년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이 삼성그룹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3대 회장으로 인정받아왔고, 지난 2008년 이후 삼성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하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뒤로는 명백하게 삼성그룹의 2인자였다.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것도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후계자 구도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였다.
실제로 삼성그룹 내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매김 되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주로 언론에 드러나는 이재용 부회장의 모습은 지난 신경영 20주년 행사 당시 입장하는 모습이나 동생인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대비되어 언급되는 정도가 전부다. 오히려 지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삼성 사태와 관련 철없는 재벌2세로 언론과 세간에 오르내린 건수가 더 많았다.
반면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소그룹 내에서 아몰레드(AMOLD:유기발광다이오드) 기술을 그룹 핵심기술로 고집스럽게 밀어서 히트시켰고, 현재는 스마트폰 시장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는 애플과의 소송을 진두지휘하는 등 나름대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같은 이재용 부회장은 할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주가 세워 놓은 후계자 수업의 원칙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지켜지지 못한 후계 선정원칙 경쟁
그러나 포스트 이건희 체제 준비 과정에서 지켜지지 못한 원칙도 있다. 바로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경쟁 원칙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를 메기와 미꾸라지라는 이야기에 비유했었다.
미꾸라지를 오랜 시간 운반해 올 경우 많은 수의 미꾸라지가 죽어 버리지만 그 가운데 미꾸라지를 잡아먹는 천적인 메기를 풀어 놓으며 몇 마리의 미꾸라지는 잡아먹히지만 대부분의 미꾸라지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싱싱하고 건강한 상태가 유지 된다.
이는 어항 속에서 미꾸라지들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긴장하고 도망을 다니다 보니 운동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 원칙을 장남 이맹희씨와 3남 이건희 회장에게 적용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의 이맹희씨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강제로 물러났을 때 삼성그룹의 총괄 사장 자리에 앉으며 삼성의 총수 역할을 했던 사실상 미래 권력이었다. 그리고 2남 이창희씨도 이맹희 사장을 보좌하며 함께 삼성그룹의 미래를 이끌어 갈 동량이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내 아무런 지분도 없는 오너의 막둥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1988년 자신의 평생 동지이자 삼성그룹 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씨와 결혼시키고 삼성빌딩 비서실 견습사원으로 입사시켰다. 이를 통해 이건희 회장은 장인이 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라는 막강한 후견인을 얻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건희 회장은 중앙일보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후 장인어른인 홍진기 회장의 비호아래 형 이맹희씨에게 도전할 수 있는 그룹 후계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 여기까지는 이재용-이부진 경쟁구도와 비슷한 과정이다.
실제로 삼성그룹 3대 체제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쟁자로 낙점된 사람은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다. 이부진 사장을 삼성그룹 후계자로 낙점시킨 것도 이건희 회장의 독단적인 의지였다.
당시 이부진 사장이 신라호텔 부장으로 입사한 것도 이건희 회장의 뜻이었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은 이부진 부장이 입사했을 때 신라호텔 스위트룸에 무려 2달을 거주하면서 이부진 부장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이부진 부장을 사람들은 이부진 부‘회’장으로 부르기도 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은 이부진 사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과 의사표현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
2010년 1월에 이건희 회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2010 행사에서 이부진 상무의 손을 꼭 잡고 돌아다니며 당시 기자들을 향해 ‘딸들 광고 좀 하겠습니다’라고 대놓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 이건희 회장의 3남매 중 가장 먼저 사장 자리에 오른 사람도 이부진 사장이다.
그렇다고 이건희 회장이 이부진 사장을 사실상 삼성그룹 후계자로 낙점한 것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2007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재용이가 기업경영에 흥미를 갖고 있고 제가 보기에도 자질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었다. 이 회장은 또 “재용이가 당장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아직 이르나, 젊은 사람으로서 인터넷 사업이나 디지털 경영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그런 새로운 사업 분야에서 가급적 많은 경험을 쌓아보도록 권유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대세론에 대해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사후 삼성그룹의 대권을 담당할 후계자가 되려면 오너인 이건희 회장이 정한 룰에 따라 치열한 경쟁을 벌여서 최종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낙점을 받아야 한다. 또 후계자로 낙점 받은 후에도 이건희 회장에게 후계자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거나 경영권 모두를 완벽하게 승계하기 전까지는 누가 후계자가 되든지 간에 언제든 승계구도에서 제외될 수 있어야 한다. 이 것이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전 회장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제가 자식이라서 회장이 된 게 50퍼센트는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아버님 기준에 안 맞고 자격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회장이 됐을 겁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등 3남매에게도 적용되는 사안이었어야 했다. 즉 이재용 부회장이 재능이 떨어지지 않고 큰 아들이라는 점에서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가 있겠지만 만약 잘못할 경우 승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장녀 이부진 사장을 신라호텔 부장으로 입사시킨 후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도 이재용 부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긴장하라는 경고인 셈이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이재용 대세론은 처음부터 이미 확정적이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재용 대세론은 후계자 구도 및 후계자 교육과 관련 이건희 회장의 운신 폭을 좁히는 결과까지 가져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재용 대세론의 배후에는 이건희 회장의 배우자인 홍라희 여사가 있었다. 2006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임원은 “홍 여사는 삼성그룹이 안팎으로 각종 현안 문제에 봉착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용씨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그룹의 경우 각종 문제점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재용씨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는 게 홍라희 여사 주변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재용 대세론이 이건희 회장의 적극적 의지의 반영이 아니었다는 점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냈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에서 잘 나타난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삼성 비리와 관련해 이학수는 상대적으로 무리를 덜 하려는 입장이었다.
반면 김인주는 무리를 무릅쓰는 쪽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삼성그룹 내에서 위상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충성심을 감안하면 만약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승계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발행 등을 직접 지시했거나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만 했어도 두 사람 간 이같은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용 승계와 이재용 대세론의 최종 의지가 이건희 회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 간 약간의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재용 사장에게 필요한 부분은 야성
이건희 회장 사후 삼성그룹의 적통을 이어받을 사람은 이재용 부회장으로 확정지어지는 분위기다.
사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의 퇴진 기자회견 이후 러시아로 쫓겨나듯 떠나갈 때부터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이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당시 이재용 사장은 러시아 지사장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등 삼성전자의 해외지사장을 유랑하듯 떠돌았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사장이 부여 받은 미션은 해외 시장과 글로벌 경제 동향을 몸으로 체득하고 이건희의 장남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글로벌 정치·경제 리더들과 친분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이재용 사장은 지난해 9월과 10월 이건희 회장의 홍콩 리카싱과 베트남 부총리 면담을 주선하는 등 삼성그룹의 아시아 사업방향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 공으로 이재용 사장은 결국 그 해 정기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후계자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다.
그런데 이재용 부회장에게는 이건희 회장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이건희 회장은 후계자로서 허수아비 부회장 역할을 하던 시절 나름대로 삼성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 왔다. 회장 취임 직후 강조한 질 경영도 이같은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병철 전 회장이 마지막 사업으로 추진한 반도체 사업도 사실상 이건희 당시 부회장에 의해 시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설탕, 유통 등 경공업 위주, 그리고 양의 경영을 추구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스스로 양의 시대와 경공업의 시대를 뒤로 하고 삼성그룹의 IT 시대와 질의 경영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결단은 이병철 회장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후계자 시절 스스로 결정해서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삼성그룹은 포스트 이건희 시대, 즉 이건희 회장의 사후 삼성그룹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이건희 회장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다. 포스트 이병철 시대의 주인공인 이건희 회장이 스스로의 길을 설정했다면 포스트 이건희 시대도 주인공인 이재용 부사장이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품격 경영, 신수종 산업 등 삼성그룹 3대에 대해서도 모두 이건희 회장에 의해 선언되어지고 있다. 후계자 경쟁과 관련 이재용 부회장에게 내려진 동아줄이 과연 삼성그룹의 3세대에 약이 될지 여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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