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원망소리가 하늘을 찌르다”

사회 / 박응순 소설가 / 2014-04-30 1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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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동학농민운동 120주년(2) ‘경천동지 횃불소리’ 조선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삼정문란’ 철종에 최고조
판관오리, 가혹하게 세금 징수 무리하게 재물 빼앗아
‘절규하는 민초들’ 삼남지방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
▲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로 120돌이 되었다.
[일요주간=박응순 소설가] 이웃 나라 일본이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 즉 日?美 화친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영국과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 조선 조정에 전해져 왔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들이 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영토를 드나들며 괴롭혔는데 미국이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는 소문이었다.

청나라도 일본도 열강에 속수무책

그 결과 일본은 200여 년간 굳게 닫힌 문을 열고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의무를 한쪽에서만 지는 ‘편무적’이고 일방적인 조약을 체결한 데 대해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는 말이 곧 뒤따라 왔는데, 사람을 보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았더니 요즘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일본이 ‘을’이 돼버렸다 거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국인 청(淸)마저 서구 열강에 손을 들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대박(大舶, 대형 선박)을 앞세워 출몰하는 열강이 도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대국의 빗장을 열게 하였는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청(淸) 역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더니 홍콩을 영국에 넘겼다지를 않나, 1860년에는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주룽(九龍)반도까지 넘겼다지를 않나, 조선으로서는 한없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구 열강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영국 군함과 프랑스 군함이 동해에서 측량을 해간 데 이어, 이번에는 쿠릴해류를 따라 남하한 러시아 함대가 남쪽 항구 영일만에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서구 열강에 된통 드잡이질(서로 머리채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는 짓)을 당한 청과 일본까지 조선을 압박하고 나섰다. 조정 밖에서 수군대는 소문으로는 원산 등 항?포구에서는 이양선이 싣고 온 물건들을 거래하는 시전이 수시로 열린다는 말도 있었다.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하거늘

부패한 관리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조정에서 지방관아까지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걸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뜯어낸 고리로 부당이득을 취하고, 틈만 나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음주가무를 일삼았을 터이니, 이리 채이고 저리 밟히면서 골로 가는 것은 결국 백성들뿐이었다.

백성들은 울분을 달랠 길이 따로 없었다. 가난은 조상 대대로 대물림 되어 온 것이었다. 개천에서 용 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그렇다고 부모를 원망할 것인가. 다 팔자소관, 잘못 태어난 자신에게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자식 낳은 것을 한탄하던 농부가 다시는 자식을 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양기를 싹둑 잘랐겠는가?

일찍이 가난을 한탄하며 죄 없는 자신의 양기를 잘라버린 한 필부의 소식을 접한 조선의 석학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애절양(哀絶陽)

갈대밭의 젊은 아낙 울음소리도 길구려
관문(官門) 향해 울부짖고 하늘보고도 통곡하네.
출정나간 남편이 다시 못옴은 그럴법도 하지만
옛날이래 사내가 양(陽) 자른단 말 들어보지 못했네.
시아버지 삼년상이 벌써 지났고 간난아이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三代)의 이름 군적에 실렸구료.
가서 호소한들 관문의 문지기가 호랑이와 같고
이정(里正)이 으르렁대며 진즉 소를 끌어 가버려,
칼 갈아 방에 드니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스스로 한탄하길 애낳은 죄로 이런 액운 당한다오.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던 형벌도 잘한 일 아니고
옛중국에서 거세풍습도 역시 비통한 일이었소이다.
자식 낳고 살아가는 이치, 하늘이 주시는 일인지라
천도(天道)는 아들 만들고 땅의 곤도(坤道)가 딸을 낳아
말이나 돼지 거세도 가엾다 말하거늘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길임에랴 하늘의 뜻이오.
부호가(富豪家)엔 일년내내 풍악 울려 즐기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이 없네 구려.
너나 나나 한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 거냐
객창(客窓)에 우두커니 앉아 거듭 시구(?鳩)편을 외우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작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것은 1803년의 계해년(癸亥年) 가을, 전남 강진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어떤 아녀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정(里正, 조선시대 지방행정조직의 최말단 단위인 이(里)의 책임자)이 3일 만에 군적에 올렸다. 아직 어린 아이기에 군포를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정은 군포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가버렸다.

남편은 칼을 갈아 자기 양경(남자 생식기)을 잘라 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들고는, 관청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였으나 문지기는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 버렸다고 한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부득이 이 몸 일으켜 세우나니

조정에서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개방 압력에 대해 밤새도록 의논을 하였다. 그러나 의견은 수렴되지 못했고, 보수와 개혁 사이에서 중론은 지리멸렬되었다. 외세의 압박에 대처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더욱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사회불안과 질병(콜레라)으로부터 오는 위기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군중 속으로 모여들었다. 동학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봉건제도의 탈피와 불안감 해소가 궁극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표현하는 인내천의 원리가 딱 맞아떨어졌을 터이므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동학은 백성들에게 쉽게 스며들었으며, 삼남지방(三南地方, 전남북, 충남북, 경삼남북도)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전봉준은 1890년 무렵 동학에 입교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쯤이었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최시형에 의해 고부지방 접주(接主)로 임명된 전봉준. 그리고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접주는 동학(東學)에서 교구 또는 포교소(布敎所), 즉 접(接)의 책임자. 포주(包主)·장주(帳主)라고도 한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가 포교를 시작한 지 3,4년 만에 급격히 교세가 확장되자, 포교소로서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거기에 책임자인 접주를 두었다. 그 지방 교도들의 관할과 새로운 교인에 대한 강도(講道) 및 포교활동 등을 담당하였다.

조병갑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 수세’(萬石洑 水稅, 조병갑은 만석보가 설치된 곳의 물을 받는 논에 처음 해에는 수세를 물리기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약속을 어기다.)를 징수하여 착복하였으며, 죄목을 만들어 무고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1893년, 전봉준은 농민들과 함께 혹세무민한 고부군수에게 부당한 세금 등 시정을 진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포하여 가두거나 매질을 할 뿐이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과 일천여 명의 농민들은 재차 관아를 습격할 계획을 세운다. 군집한 농민들 앞에 선 그의 의지는 결연했다.

거사를 앞두고 전봉준은 홰에 불을 당기며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조용히 읊조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아니하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헛된 것 없고 나름대로 다 소용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조선의 백성입니다. 머리는 상투를 틀어 올리고, 흰 무명바지에 저고리를 입은 백의민족의 후손입니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기를 사천년, 나는 조상 대대로 꽃과 열매처럼 이 강토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베풂이고 나랏님의 은전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백성들의 원망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해마다 거듭되는 수해와 한해, 창궐하는 질병,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탐학은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며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아 갑니다.

비위에 거슬리면 태형이나 장형을 수시로 써서 인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하여 조선 팔도 그 어디에서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부황 든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나랏님이시여! 장차 이를 어찌 하오리까. 부득이 이 몸 일으켜 세우나니, 굽어 살피소서.
원하옵건대,
국가를 수호하는데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게 하여 주시옵고,
지방 관아의 시찰을 단단히 하여 관리들의 직권남용을 제한하여 주시옵고,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어린 백성들에게도 기회를 주시옵고,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이 땅에서 백성들의 한숨소리가 사라지고,
노랫소리가 널리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박응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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