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고난을 넘어서는 '희망의 촛불'

사회 / 소정현 / 2017-01-23 1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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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유년 새해 아침에 새로운 다짐

[일요주간= 림삼 칼럼리스트] ●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사랑의 메신저

정유년의 새해가 밝았다. 삶에 지치고, 피곤에 떠밀린 사람들이 막연하게 바라고 기다리던 새해다. 아침 일출에서 시작하여 저녁 땅거미로 마감되는 하루 살이들이 새해라 해서 특출나게 달라질 게 무에 있겠냐만, 그래도 새해는 뭔가 조금은 틀릴 것이라는 자그마한 희망조차 없다면, 우리네 소박한 삶이 너무도 처량타 여겨질 게다.

그렇다면 한 움큼 빚어 올리는 질박한 꿈의 모양새마저 보기 싫을 정도로 삶이 맛 없을 터이다. 솟구치는 햇살을 가슴으로 안으며 벅차게 맞이해야 할 우리들의 새해가, 올 해는 유난히도 많은 방황과 혼란을 수양버들처럼 늘어뜨린 채, 조금도 갈무리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촛불로 버겁게 버티면서, 위태롭게 그 서막을 올렸다. 도대체가 끝을 예감할 수 없는 혼돈의 나날들이 마치 철벽인 양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지금 이다지도 암울하고 그냥 참담하기만 한가보다.

진즉 우리에게 촛불은 다정하고 다감한 심상을 표현하는 축불의 상징이었다. 예전부터 촛불은 낭만과 감성의 대표적인 매개체였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사랑의 메신저이기도 했다. 예컨대 촛불 켜는 밤 하면, 귀하고 소중한 사랑이 보람으로 맺어지는 축제의 서막이라 여기기도 했고, 촛불 끄는 밤 하면, 황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을 추구하는 화합의 결실이라 믿었다. 그렇게 촛불과 우리의 일상은 끊을 수 없는 친근함의 연으로 역사와 전통을 함께 빚어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촛불이 우리네 설움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억눌린 마음을 표출하는 항변의 물질로 화한 듯 하여 자못 가슴이 저리다. 촛불 본연의 의미는 이미 애저녁에 바래고 퇴색되어, 집단의 끝에서 불 밝히는 무기로 변해버린 형상에, 바라보노라면 문득 시리고 아프다. 횃불처럼 밝지도 못하거늘, 반딧불마냥 은은하지도 않거늘, 마치 갈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고픈 염원 있어, 우리의 촛불은 오늘도 꺼지지 않고 밤새 타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안다. 우리가 함께 손잡아 어깨를 걸고, 발을 맞추어 나가는 행진의 끝에서는, 연약한 촛불이지만 위대한 힘으로 모여져 세상을 놀라게 할 기적이 태동되고 있음을. 그렇게 다시 장만하는 우리의 역사는, 필경 또 하나의 축복받는 미래를 선물하게 될 것임을. 그러하기에 우리가 촛불로 밝혀야 할 세상은 내내 촛불로 만들어갈 것이다.

촛불의 힘으로, 숨겼던 촛불의 영원한 저력으로. 그래서 우리가 켜 들은 오늘 밤의 이 촛불은 무한하게 밝다. 누구도 강제로는 꺼버릴 수 없는 밝음이다.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이 촛불은 이제도 이토록 끈질기게 타고 있다.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러내리며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즈막에는 촛불의 이름이나 제목이, 실제로 거리에서, 가정에서, 현실의 광장에서 보여지는 것 못지 않게, 각종 글이나 또다른 창작물의 소재로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기라성같은 예인들이 촛불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대열이 연일 이어지는 마당일진대, 어찌 보면 여기서 재삼 떠벌려 촛불을 말한다는 사실은 신선하지 못해 식상할지 모른다. 이제까지 내가 구태여 촛불을 주제로 시를 짓지 않은 이유다.

그냥 촛불은 나의 호흡이며 본능이라고 여기면서, 삶의 여백이라 자리매김하면서, 내면의 숨결로 그윽하게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다가 언뜻 운명처럼 다가온, 촛불의 혼이 타오르는 역사에 소견이나마 동참하는 것이, 이 시대에 구차한 삶을 보태고 있는 필부의 작은 책무 아닐까 여겨져서, 뒤늦게나마 기회 틈타 슬며시 촛불을 벗해본다.


●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

촛불의 밝음은 그만큼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밝게 빛나는 빛처럼 비록 힘겹지만, 희망은 이제 가까이 와있다. 그만큼 우리의 기다림은, 그처럼 더 희망으로 간절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자리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지금의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기다릴 필요가 아예 없는 사람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말은, 지금 자신에게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런 갈증이 있다 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분명히 무엇인가가 채워져야 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기다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린다고 하는 말에는 부족함에 대한 갈증과 함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있다고 하는 전제가 존재한다.

또 하나는, 기다림의 조건은 희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갈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그는 절대 기다릴 수가 없다. 그 상황에서 기다리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절망과 체념뿐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사람은, 체념할 수밖에 없고 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함에도, 희망을 품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기다림은 내일로 이어지는 확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보여지지 않는 어떤 희망이, 비록 지금 더 짙게 나타난 고통과 난관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있지만, 구름의 위에서, 안개의 뒤에서, 언젠가 그 모습을 보일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그 기다림이 있어서 우리를 숨 쉬게 한다. 조금 쯤 힘든 일들이 우리를 잠시 멈칫거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극심한 어둠이 누리에 깔려 우리의 걸음을 머뭇거리게도 하겠지만, 우리의 내일은 밝은 빛으로, 맑은 하늘로 열리어질 거라는 확신의 길이다.

나의 학창시절 친구들 중에는 타지방에서 홀로 떠나와서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과 친하게 자주 어울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이 거주하는 방에 스스럼 없이 놀러가곤 했다. 어느 날 친구의 방에 가보니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들 말로 향토장학금이라고 부르는,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편지였다.

그런데 편지를 쓰면서 친구가 웃으면서 말한다. “다름이 아니오라... 부터가 진짜 내용이야.” 그 앞에 등장하는, 날씨가 어떻고, 건강은 어떤지, 하는 인사들이 물론 빈 말로 하는 겉치레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다름이 아니오라... 이렇게 시작되는 이후의 본론을 부드럽게 연결하기 위한, 그런 전주곡같은 안부이기도 한 것이다.


●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기름지려면

간혹 우리는 본론을 거론하기 이전의 안부 인사에 현혹되거나, 섣부른 판단으로 대세를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속내를 열고 교류해야 하는 세상은 단순한 만남과 관계로 단정지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선행되어야 하는 곳이다.

서로 돕고 양보하며 진심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러한 마음들이 특별히 어떤 시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새해가 시작되는 시작점에 서서라면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삶을 한 층 더 풍요롭고 기름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깨달음은 있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소외되고 버려진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보고, 관심과 온정을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마음들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베풀고 나누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베푸는 행복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관련되어 있는 지방의 작은 봉사단체가 하나 있다.

나눔과 베품을 성의껏 이행하자는 생각으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땀을 흘리고 있는 조직체다. 안팎으로 이런 저런 일들을 바쁘게 하다보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전화도 많이 온다.

그런데 문제는 여건상 그 모든 도움 요청을 다 들어줄 형편은 못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좋은 마음으로 도움을 전했는데, 뒤에 가서 알고 보니까 사기행위였던 사례도 많다. 봉사자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실은 남을 돕는 일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구제에도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판단과 선택도 있어야 한다. 우선순위에 대한 건설적인 토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실망감이 누군가를 돕고 베푸는 삶에 장애를 주어서는, 또는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중간에 이런 식으로 새나가는 것들은, 누군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꼭 필요한 경비일 수 있다. 그 경비를 잃기 싫어서 도움의 손을 거두는 순간, 그 도움이 꼭 필요한 대상도 동시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있다. 사무실이 강원도인지라, 군부대가 인근에 여럿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씩 면회를 왔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 멀리 남쪽지방에서 아들 면회를 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난감하다, 그러니 좀 재워주고, 집에 갈 차비를 도와달라, 이런 식이다. 잘 수 있도록 해주고, 또 한 끼 식사 정도 해결해 줄 수는 있다.

그런데 차비를 돈으로 주는 대신에 터미널에 가서 차표를 직접 끊어주겠다고 하면, 대부분은 그러지 말고 돈으로 직접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거짓말인 셈이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까, 도움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의심하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적당히 핑계를 대서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한 통 왔다. 보낸 사람 란에 주소는 써있지 않고 이름만 적혀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까, 그 안에서 우리 단체 명의의 편지봉투에 담긴 돈 2만원이 나왔다. 사연도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다.

자기 남편이 몇 년 전에 우리 사무실에 와서, 꼭 갚아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차비 5천원을 받아갔는데 이제야 갚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도움을 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사무실의 봉투에 담겨있는 것을 보면 틀림은 없을 것이다. 편지 내용만 가지고는 그 부부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회합시간에 봉사자들에게 이 봉투를 보이며 말했다. “속는 게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 일로 분명한 교훈을 얻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무 어리석어도 물론 안 된다.

그러나 속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도울 수 있는 경우를 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비단 속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정말 도와야 할 대상을 돕는 게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 인간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속는 경우가 많다는 걸 핑계로 삼아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핑계대면서, 돕기 싫은 자기 마음을 합리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함정에 빠져서 살아가게 되면, 누군가를 도우면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모르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꽉 막힌, 답답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적어도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장을 담그다보면 구더기는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장 담그는 일이 아닌가? 그와 마찬가지로 씨 뿌리는 농부는 자기가 뿌리는 씨 가운데, 더러는 길 가에 떨어져서 새가 먹어버릴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더러는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서 결실하지 못하게 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것이다.

만약 더러 길 가에 떨어지고, 바위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질 씨를 마음에 두고, 그것 때문에 주저하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돈이 새나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일은, 그런 일을 행한 사람들 자신에게 수치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방법과 통로를 즉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일이, 사랑을 베푼 사람의 수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단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는 사기꾼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한 궁핍한 사람이 아무 때라도 자선을 요청하더라도, 만일 당신이 베풀지 않는다면 지체 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이는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아셔 마이어’라고 하는 사람이 이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 “이 속담에서, 사기꾼들의 부정직은 주는 자들의 인색함과 일종의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된다.”


● 우리에게는 내일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다.

한 가지 더 알아보자. “아무 것도 없는데 도둑 가져갈 것은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자기 눈으로 자기 삶을 보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 삶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눈에는 그가 가진 여유가 보인다는 말이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가? 남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게 곧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눈이 열리면 뭐라도 줄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꾸 금전이나 물품에만 한계를 두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있을 수 있고, 건강한 몸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내일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다.

우리의 가장 크고 소중한 자산은 불멸의 희망이다. 우리는 바로 그걸 나누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촛불 밝혀 소중하게 가꾼 우리의 희망을, 기다림과 사랑의 이름으로 밝아온 새해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보듬고 안아주어야 한다. 베풀고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 삶의 고귀한 가치이며 의미인 촛불의 참 밝음을, 온 누리의 소중한 이웃들에게 골고루 전해야 한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고 따뜻하게 이웃을 대하므로, 그 이웃이 우리에게 지금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못 만난다며 투덜대기 이전에 스스로가 어떤 생각으로 이웃을 대하는 지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결코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웃을 만남에 있어 진심이고 싶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 중이라면 그걸로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느리고 힘든 길이라는 것도 잘 안다. 우리가 걷는 길이 많이 더뎌서 가끔은 힘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천천히 달리는 우리의 삶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서로를 응원할 수 있으면 된다.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진실로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서로 서로 만나지는 모든 이웃들에게 소망의 새 날들이 밝고 맑게 활짝 깃들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다시금 고귀한 촛불의 의미를 되살려내고, 기쁘고 행복할 때 촛불을 들어 환히 웃을 수 있는, 축하의 노래와 더불어 촛불을 켤 수 있는, 축복된 내일이 열리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한다.

기왕지사 시작된 정유년 새해에, 우리에게 거침없이 다가서 저기 훌쩍 솟아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진실로 기도한다. 우리가 영원한 촛불로 몸 살라 세상 밝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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