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가야산 여정

문화 / 최철원 논설위원 / 2025-04-18 10: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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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삶이 진창 같을 때 문득 가고픈 곳이 있다. 마음속 찌꺼기를 씻고 너그러움을 가득 얻고 오는 고향 집 같은 곳 말이다.

춥고 긴 겨울을 끝내고 꽃과 함께 다가온 새봄의 따사로움이 마음을 적셔주는 4월이다. 날씨가 '나' 만큼이나 줏대가 없어 우박도 쏟아지고 눈도 내렸지만 다시 맞는 새봄, 나뭇가지 끝에 꽃이 피었다. 삶의 황혼에 맞는 새봄은 내 생에 몇 번의 봄이 더 남아 있을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냥 찬란한 봄 향연 찰나의 미혹되는 미물로 살아간다.

올봄도 지난봄처럼 꽃구경이나 하며 그 속에 빠지니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빴다. 혼자서 늙어가는 어제와 똑같은 봄 날, 고리타분한 일상을 항간(巷間)에 남겨두고, 잠시나마 쳇바퀴 도는 생활을 벗어나 순수한 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건 따분한 인간 생활의 순화를 위해 얼마나 요긴한 일인가?

동료 직원의 권유로 함께 떠난 비 내리는 가야산엔 주봉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그 산경이 대가의 그림처럼 그려냈다. 주변 골짝마다 연두로 물들이는 창조주의 위대함에 경탄을 느낄 즘, 산은 개성을 추상(抽象)당한 산령들이 묵직한 윤곽만으로 시야 앞에 전체를 웅크렸다. 고요하고 태고 같은 이 풍경 속에 잠시도 멎음없이 변화를 조종하는 기막힌 조화는 대체 누가 부리는 요술인가? 절경에 심취하여 넋을 잃었고, 무심히 쳐다 본 나뭇가지 끝 연두에 맺힌 빗방울은 봄의 너그러움이다.

흔히 수(秀)와 장(壯)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지만 이 둘을 고루 갖춘 곳이 명산으로, 가야산은 장중함과 빼어남으로 나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산봉우리는 하늘에 닿아 구름이 머물고 온 산이 연두의 파스텔로 수런거린다. 천년 고찰을 품은 가야산은 명산답게 그 신생의 빛들이 골짜기와 능선에 피어오르고 그 빛들이 가득 모이는 곳에 법보 종찰 해인총림이 좌정해 있다. 화엄경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해인사'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넓고 넓어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법(다르마)계를 담 있는 '대가람'으로 엄숙함과 고이즈넉함이 깃들어 있다.

산문의 어귀에서 사천왕과 그 부하들은 더러운 중생의 숨통을 밟고 있다. 눈을 부릅뜬 장수들은 철퇴와 삼지창을 휘두르고 아귀들을 째려보며 '이 더러운 중생들아 너희가 감히 세속의 욕망과 더불어 이 산문을 통과하려느냐.' 산문의 어귀는 중생의 피와 욕망이 으깨어진 즙으로 질퍽거린다. 나는 무거운 마음 가득 안은 채 산문을 지나 큰 법당 뜰 앞에 서니, 온몸으로 비를 흠뻑 맞고 선 석탑이 세상 무게를 혼자 이고 제 무게로 천년을 버티고 서 있다.

큰 법당인 대적광전에는 총림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화엄 불교의 가장 이상형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협시하여 온화한 미소로 좌정하여 계셨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빛으로 제도하는 부처님의 자애로운 형상에 새삼 옷깃을 여미고 3배의 예를 드렸다. 사바세계 만물에게 빛을 비춘다는 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신 해인사는 화엄 불교의 산실로 불교 3대 종찰인 불ㆍ법ㆍ승 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품은 법보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 순응, 이장 두 스님이 창건한 후 화재로 7차례 중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문화유산인 대장경을 품은 장경각은 시간의 흔적으로 고색창연함이 묻어 있다. 대장경판의 보호조치로 관람객이 가까이 접근은 못하게 통제한 아쉬움보다 이곳에 천년의 시간을 넘은 장경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했다. 틈새로 본 대장경판에서 목판으로 대량 인쇄를 하여 중생들에게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것보다, 조상들의 당시 절박한 항몽(抗夢)정신을 생각했다. 불교가 고려시대의 통치 이념의 중심이었기에 몽골족의 침입을 부처의 가피와 불법(佛法)으로 물리친다는 무구한 사상이 장경판을 제작하는 대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다.

팔만대장경 목판이 천년의 시간을 소중히 간직해 오늘에 이르러, 인류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무척이나 긍지를 가지며, 고운 최치원이 학과 함께 놀았다는 학소대로 발길을 옮겠다. 옅은 물안개 속에 잠긴 학소대의 비경은 속세 속의 선경으로 사람의 자취는 흔적이 없다. 전설로만 남은 자리에는 고운의 모형과 학을 조형물로 형상화 시켜 놓여 있다. 차라리 그 자리는 표지석으로 관람객을 맞는 게 가치가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신라말 지식인 고운 최치원이 당대의 헛된 시비를 등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시대를 예비한 고뇌가 묻어 있는 제시석(題詩石) 석벽은 고운의 친필로 글을 쓰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다는 전설이 깃든 글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시를 등선시라 했다.

"첩첩이 쌓인 바위계곡을 굽이치며 온 산을 뒤흔드는 물소리 때문에/ 지척에도 사람들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다/ 나는 항시 어지러운 시비가 두려워/ 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놓고 있노라“

천년을 훌쩍 넘긴 오늘, 신라시대에 좌절당한 현인의 고독과 고뇌가 베어 있는 거침없는 필세(筆勢)를 보며 시공을 초월한 고운의 행동이 지금도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하였다. 맑은 물 흐르는 홍류동 계곡을 아스팔트로 갈라있지만 이곳에는 제시석과 독서당, 농산정 그리고 갓과 신발만을 남기고 사라진 곳에 서 있는 둔세비(遯世碑)는 천년의 시간을 넘긴 오늘, 고운의 혼이 깃든 선비정신의 뜻을 후대에게 전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고찰을 눈에 담고 해탈문 높은 너울을 넘어 두루 돌아보았다. 무릉의 숲과 계곡을 가르며 흐르는 맑은 물,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 해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저무는 저녁 하늘을 뒤로, 귀가하는 차 안에서 느낀 '가야산 해인사 여정'은 고향 집을 다녀온 것 같은 편안함 가득한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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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원 논설위원

최철원 논설위원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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