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 시인의 작가 초대석 ] 비우지 않으면 베풀 수 없다 허·시·교(虛施交), 이명권 박사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화두

Interview / 이은화 작가 / 2026-06-01 11: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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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행: 이은화
대담자: 이명권

 

▲ 이명권 박사

 

 

이명권 박사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후 감리교 신학대학원과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 석사를 마쳤다. 중국 길림사범대에서 중국문학 석사학위,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비교 종교학전공)를 받은 뒤, 중국 길림대학에서 중국철학 박사(노자 전공), 중국 길림사범대 교수, 동대학 동아시아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귀국 후 서울신학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코리안아쉬람 대표, K-종교인문연구소 소장, K-평화통일연대 상임대표, 열린서원 대표, 계간 《산넘고물건너》 발행인, 코리안아쉬람 TV유투버로서 동양철학과 비교종교를 강의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파니샤드』(한길사)와 『노자왈 예수가라사대』(열린서원) 등 30여 저서와 번역 및 공저가 있다.


Q. 학자이자 《열린서원》 발행인이신 이명권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강원도 화천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데 어떤 시간을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 반갑습니다. 먼저 《일요주간》 ‘작가 초대석’에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강원도 화천이라는 천혜의 자연 녹지 공간에서 한참 푸르러 가는 신록의 계절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파로호와 북한강을 끼고 돌아가는 화천의 사계(四季)는 그 어느 곳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려하고도 황홀한 곳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경관 좋은 산중에서 집필 생활과 함께 <나봄명상예술원>이라는 곳에서 자연치유의 농장을 일구고 있습니다.


Q. 연세대 신학, 동국대 인도철학, 감리교신학대학원, 서강대 종교학 박사, 중국 길림사범대 중국문학 석사, 길림대 중국철학 박사 등의 학위는 한 인간이 진리를 향해 넓혀가는 지도처럼 보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동안 지적 위기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들려주세요.

▶ 네, 좋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신학으로 학부 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고등학교 다닐 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흥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주변의 권유로 신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교단의 배경을 가진 신학대학원에 가야 했는데, 저는 감리교 신학대학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서 몇 분의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중에 한 분은 변선환 교수였습니다. 이분은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 연구하여 학위를 하시고 오신 분으로서, <인도 기독론>이라는 강의 시간에 우리 대학원생들에게, “자네들이 기독교를 제대로 알려면 반드시 불교를 공부해야 하네.”라고 하셨지요. 그리하여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학과 불교를 동시에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비교종교학의 입장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학문 연구의 과정에서 지적 위기를 느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앙의 관점에서 학문을 연구했는데, 신앙은 단지 신앙일 뿐이구나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경험하면서입니다. 신앙과 학문이 병행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길은 비평적 학문의 방법론 앞에서 두 가지 길로 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컨대, 신화적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교리를 기초로 한다면 비평적 학문의 길에서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신화보다는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는 우려와 동시에 전통적 교리 중심의 연구가 얼마나 협소한 이해 방식인가 하는 것입니다.


 

▲ 함석헌 기념사업회 초청 특별 강연<함석헌의 동양사상>을 주제로 강의하는 모습

 


Q. 이어 신학에서 인도철학으로, 다시 종교학으로, 그리고 중국철학까지 경계를 넓혀오셨습니다.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 신학에서 인도철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한 계기는 불교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일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도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라는 말을 했던 것처럼, 감신대 대학원 시절 변선환 교수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알아야 한다”라고 했던 가르침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학부 시절 연세대에서 인도철학을 가르쳤던 동국대 원의범 교수의 안내로 인도철학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불교학을 깊이 공부하려면 인도철학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신학과 불교를 공부한 입장에서 2007년에 『예수, 석가를 만나다』라는 책을 저술하여 동아일보에 소개된 바가 있습니다. 이때 제가 강의를 나가던 K 대학 총장이 신문 보도를 보고 예수와 석가와의 대화를 못마땅하게 여겨 더 이상 그 대학에서 강의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대학 재단의 총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은 <복음서>와 <반야심경>과의 대화였습니다. 보수적인 한국의 기독교 대학 재단에서는 더 이상 강의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데, 마침 중국의 길림사범대학교에서 한국인 교수 1명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가 그곳에 교환교수의 자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2007년 가을 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고, 한편으로 중국 문학석사를 마친 후에 길림대학에서 노자를 전공으로 중국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경계 넘기가 계속되었던 이유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으나 항상 그 중심에는 학문적 호기심이 컸던 것 같고 때에 맞는 스승을 잘 만났던 행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예수 노자를 만나다』(2006)를 시작으로 석가, 공자, 무함마드까지 한자리에 불러 앉히셨습니다. 이 시리즈의 출발에는 어떤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을까요?

▶ 네, 저는 신학으로 학문을 출발했지만,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지는 성인(聖人)으로서의 위상에 못지않은 또 다른 성인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해 온 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노자의 사상을 좋아하던 입장에서 그 대화의 첫 번째 책이 <예수, 노자를 만나다>(2006)입니다. 이는 <복음서>와 <도덕경>의 만남으로서 <도덕경> 81장 전체 본문 내용을 먼저 해석하고 각 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예수 정신과의 만남을 시도 했습니다. 예컨대, <도덕경>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개념을 예수 정신의 길과 비교해 보는 형식입니다. 

 

그 이후 <예수, 석가를 만나다>(2007)라는 책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정신을 <반야심경>과 비교한 것이며, 이 책이 동아일보에 소개되면서 저는 강단에서 쫓겨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 이후 중국 길림사범대학교에 초청받아 교환교수로 간 이듬해에 <공자와 예수에게 길을 묻다>(2008)라는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이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논어>와 대화를 나눈 형식입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경향신문에서 크게 화제의 책으로 소개되었지요. 한겨레 신문에서는 저의 책 내용을 인용하면서, 당시 국민에게 신뢰를 잃고 지지율이 추락하던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신뢰’를 중시하는 공자 사상을 다시 교훈으로 삼게 한 바 있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노자와 석가, 그리고 공자의 사상과 대면함으로써 유불도와 그리스도교와의 대화가 이어졌는데, 그 외에는 예수와 무함마드와의 대화도 시도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제목입니다. 2001년 미국 무역센터에 대한 알카에다의 항공기 테러 사건이 있고 난 후 미국과 이슬람권의 긴장과 대결은 극대화되고 미국 아프가니스탄, 미국 이라크 전쟁이라는 냉전 시기 이후 최대의 문명 간 충돌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원래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꾸란에 나타난 기본 정신과 <복음서>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평화 사상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이슬람의 평화주의자들인 수피즘과 무슬림이 예수를 훌륭한 선생으로 묘사한 <무슬림 복음서>를 국내에 처음으로 이 책을 통해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대화의 책들을 저술한 근본적인 동기는 종교 간의 평화와 인류의 공존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 중국 길림사범대 교수(동아시아연구소 소장) 시절 강의하는 모습



Q.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비교종교적 접근을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비교의 윤리'란 무엇인지, 각 전통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대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함께 열어갈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 저는 비교종교학이 각 전통을 섞어 하나의 종교로 만들려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다른 전통이 어떻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 응답해 왔는지를 경청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혼합’이 아니라 ‘이해’이며, ‘동일화’가 아니라 ‘대화’입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 비교종교적 접근을 혼합주의(syncretism)로 우려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적 체계가 아니라 삶과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 전통의 중심이 흐려질 수 있다는 염려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비교는 각 전통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유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노자와 비교할 때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고, 노자의 무위(無爲)가 지닌 독특한 세계관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석가와 예수를 함께 읽을 때도 자비와 사랑의 공명뿐 아니라, 고통과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통찰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비교는 차이를 지우는 작업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비교의 윤리’는 먼저 타자의 전통을 자기 언어로 함부로 번역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비교는 상대를 내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내적 논리와 영적 경험 앞에서 겸손히 귀 기울이는 태도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교의 첫 번째 윤리는 ‘존중’이며, 두 번째 윤리는 ‘정확성’이고, 세 번째 윤리는 ‘겸손’입니다.


또한 비교는 우열을 가리는 재판이 아니라, 인간 이해를 넓히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되었기에, 동일한 질문에도 서로 다른 언어로 답합니다. 그 차이를 제거하려는 순간 대화는 폭력이 됩니다. 그러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물음—고통, 사랑, 죽음, 초월, 구원, 평화를 함께 사유할 때, 종교 간의 만남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와 노자, 석가, 공자, 무함마드를 함께 읽으면서 “누가 옳은가”만을 묻기보다 “인간은 왜 시대와 문명을 넘어 궁극적 의미를 갈망해 왔는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교종교학의 목적은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인정한 채, 그 다름 속에서도 인간 정신의 깊이를 함께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자기 정체성을 잃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 타자의 전통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경청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배타성만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고, 무차별적 혼합만으로도 깊이에 이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확신(open convic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신념은 갖되, 타자의 진실 가능성 앞에 귀를 닫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결국 비교의 윤리란, 서로를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로서 존엄하게 마주 서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Q. 한길사에서 펴낸 『우파니샤드』와 『베다』라는 깊이 읽기는 일반 독자를 위한 인문 고전 해설서입니다. 인도의 언어를 오늘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 건네는 일, 그 번역과 해석의 원칙은 무엇인지요?

▶ 인도의 고전, 특히 『우파니샤드』와 『베다』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은 단순히 오래된 문헌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인간의 사유와 숨결을 오늘의 독자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을 “뜻의 전달” 이전에 “생명의 전달”이라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원문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되 오늘의 한국어로 살아 있게 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기 이전에 경험의 언어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브라만, 아트만, 리타 같은 개념은 단순한 용어 풀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우주의 관계를 묻는 체험의 언어입니다. 셋째, 번역자는 숨되 지나치게 앞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고전을 번역하다 보면 번역자의 해석이 원문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자와 원전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충분히 설명하되,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고 침묵할 여백을 남겨 두려 했습니다. 특히 『우파니샤드』는 설명보다 침묵 속에서 더 깊어지는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 코리안아쉬람 TV가 주최한 『왜 다시 자유인가』 이태곤 작가 북토크쇼. 좌로부터 이명권, 구연상 교수, 우희종교수, 이태곤저자, 김영덕 씨알순례길 단장, 정지훈 감독.

 


Q. 세계 종교 경전에 공통으로 내재한 철학적 논리로 ‘허(虛)·시(施)·교(交)’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세 글자는 종교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와 정치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이 세 개념 가운데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어느 것이라고 보시나요?

▶ 오늘의 한국 사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저는 무엇보다도 ‘허(虛)’라고 생각합니다. 허(虛)는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과 욕망과 이념의 과잉을 내려놓고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세대와 계층 사이에서도 지나치게 가득 차 있습니다. 말은 넘치는데 경청은 부족하고, 정보는 넘치는데 성찰은 부족합니다. 바로 이런 시대일수록 ‘허’의 철학이 필요합니다. 동양 사상에서 노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 하여, 빈방에 빛이 들어온다고 말했습니다. 불교 역시 공(空)을 무(無)가 아니라 관계와 자비가 열리는 자리로 이해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자기 비움(kenosis)은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위대한 종교들은 모두 비움, 그 이후에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허(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허가 내면의 토대라면, 다음 단계는 시(施)입니다. 베푼다는 것은 단지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존중과 관심을 나누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경쟁은 넘치지만, 서로를 살리는 따뜻한 증여의 문화는 약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交)가 필요합니다. 교는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서로의 삶과 문명이 만나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세대·이념·지역·종교 간의 단절이 깊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일수록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는 ‘교’ 즉 사귐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결국 허·시·교는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비우지 않으면 베풀 수 없고, 베풀지 않으면 참된 만남이 일어나지 않으며, 만남이 없으면 공동체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허(虛)’이며, 그 허로부터 시(施)와 교(交)의 문명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동안 학문을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선생님의 걸어오신 길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어떤 문장이 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들으며 인터뷰를 마칩니다. 선생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 평생 동양과 서양의 사유를 넘나들며, 비교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진리의 언어 속에서 결국 인간과 삶의 본질은 ‘사랑과 나눔’이라는 하나의 빛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오랜 탐구의 여정이 제게 가르쳐 준 소중한 진실이었습니다. 어쩌면 학문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가장 먼 길인지도 모릅니다. 수천 년 전의 경전을 읽고, 수백 권의 철학서를 넘기며 도달한 곳이 결국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단 한 줄의 자리였을 때, 저는 비로소 학문의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앎이 깊어질수록 말은 줄어들고, 남는 것은 다만 타인을 향한 따뜻한 눈빛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이명권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 참 넓고 깊었습니다. 신학에서 출발하여 인도철학, 비교종교학, 중국철학으로 학문의 지평을 넓혀오신 긴 여정을 들었습니다. 예수와 노자를, 석가와 공자를, 무함마드를 한자리에 불러 앉히며 서로 다른 진리의 언어들 앞에 겸손히 귀 기울여 오신 일은 앎을 향한 사랑의 힘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이 들려주신 '허·시·교(虛·施·交)'는 오래된 경전의 언어이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권유이기도 합니다. 먼저 비우고, 베풀고, 그렇게 진정한 만남을 이루어 가는 것. 수천 년 전 경전을 두루 펼쳐 도달한 곳이 결국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한 줄이었다는 고백은 독자의 마음에도 오래 머물 것입니다. 앎이 깊어질수록 말은 줄어들고 남는 것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눈빛이라는 말씀이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혜가 아닐까요. 기꺼이 자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은화 시인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일요주간 문화예술 전문 주필위원.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cactus68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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