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복의 현장청론] 대한민국의 고질적 병폐(病廢)- 뉴-교육운동으로 척결(剔抉)하자!

칼럼 / 전경복 편집위원 / 2023-10-10 11: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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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복 편집위원

[일요주간 = 전경복 편집위원] 현재 거의 사라진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는 말이 지난날 경향(京鄕) 각지에서 빈번히 회자했다. 특히 시골 청소년들은 서울에서 ‘청운(靑雲)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의 강한 욕구와 이상(理想)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부글부글 끌었다.

필자가 고향 집의 대문을 나서는 순간 부모님의 무척 걱정스러운 말씀이 들려왔다. “ 서울에 가면 첫째 사람조심, 둘째 차 조심, 길 조심, 셋째 연탄가스 조심을 꼭 해야 한다.” 그 반복된 후렴은 첫째도 사람조심, 둘째도 사람조심, 셋째도 사람조심이었다. 그때의 인간군상(人間群像)과 사회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여전히 만고의 진리처럼 생각 한다.

컴퓨터의 세상이다. 특히 미래의 자원, 자본, 자산인 학생들이 부지불식간에 컴퓨터에 시간과 공간을 과도하게 잡아먹히고 있다. 인간이 생득(生得)한 성품인 예의범절이 기계에 급속도로 실종되어 깊이 안타깝다. 고마운 점은 반도체산업을 통하여 세계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는 반석에 오르게 되었지만 동시에 스마트 폰의 악성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또 다른 고질적 병폐로 교묘하게 안주하고 있음에 심히 고뇌한다.

‘세계화’ 시대 , ‘지구촌’ 시대, ‘글로벌’시대, ‘글로컬’ 시대에 한국인만이 지니는 순박하고 질박한 고유 정서가 심히 사라져간다. 애석하다. 즉,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운전자끼리의 상호배려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견원지간이다. 개구리가 올챙이의 시절을 아예 망각한다. 곧 정저와(井底蛙)의 자세와 태도만을 과감하게 보일 뿐이다. 마주쳐도 전혀 비켜줄 마음이 없다. 알아서 피한다. 좌측보행이 우측보행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제 생각대로다. 공공장소를 안방처럼 넘나든다. 대중교통에서 최악의 꼴불견 언행이 연출된다. 예를 들자면 무수하다.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극치다.

학교는 삼류 서부극이 난무하는 난장판, 아수라판이다. “기초질서를 준수하자”라는 상식 이하의 표현이 생겨 난지도 꽤 되었다. 전국의 행정, 교육기관 등에서 이 표현이 현재도 부지불식간에 불평처럼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중급질서’,는 무엇이고 ‘고급질서’는 어떤 것인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식별하지 않는 극히 자기중심주의적으로 치닫고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어휘 ‘공인(公人)’을 남발하여 오용, 남용, 악용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스스로 교정할 만큼 적극적이고 선진적으로 승화(昇華)했는가?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또한 중차대한 심각한 고질적 병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준 높은 교육을 악용하여 도리어 인간관계의 신뢰가 파괴되고 상호발전 관계가 쇠약해졌다. 문명의 이기(利己) 때문에 오히려 고도의 산업발달과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는 상호관계가 급속도로 유리(遊離)되었다. 바야흐로 인간 자신이 상호관계에서 보편타당하며 발전적인 상관적 존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 병폐의 악순환을 조장하는 존재로 타락해 버린 느낌이다.

자신에게, 타인에게나 배려미(친절미)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방종(放縱)을 구가하는 자유인이 늘어만 간다. 급기야 오늘날 문화적인 한국인이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지 못하고 폐쇄적 괴물단지 인간형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리하여 즉 “젊어서는 돈이요, 늙어서는 건강이다.”라는 웃지 못할 말을 외쳐댄다. 이것뿐이겠는가? “일일이 열거하려고 하니 막장(幕場)의 한복판에 분연히 서 있다.”라는 생각임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괴감이 들어 혹시 진폐증(塵肺症) 환자가 아닌가를 스스로 의심할 정도이다.

인간과 사회관계에 자주 유행하는 말이 있다. “저 사람은 조심해야 해! 큰머리를 쓰지 않고 잔머리를 잘 돌리고 뒷머리를 잘 치는 사람이거든.” 이런 교묘한 몰 인성(沒人性)의 소유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있으니 진실로 통탄하며 개탄스럽지 아니한가. 한마디로 제대로 뜯어고쳐야 한다. 혼자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현명한 생각을 집중해 하나 된 행동으로 표출해야 한다. 바로 뉴-교육운동이다. 그러나 시민운동과 확연히 구별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교육운동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잘못된 교육운동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교육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예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과연 그들은 존경과 찬사를 받을 만큼 떳떳했는가? 그들을 심판하는 심판자들은 또 어떠했는가? 교육운동의 본래의 가치와 핵심을 지키고 진화시켰는가를 엄정히 반성해야 한다.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비통한 심정이라고 해도 진실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뉴-교육운동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 그 예가 될 만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소설을 소개한다. 민병삼 작가의 “천민(賤民)이란 제목이다. 모 일간지에 연재한 작품임을 밝혀둔다. 그들은 천하게 태어나 천하게 살다가 천하게 죽었다. 1923년 4월 24일, 경남 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백정들의 사회단체인 형평사(衡平社)가 탄생 되었다. 이로써 백정들의 저항운동이 수면 위로 부상했고, 비로소 사회가 관심을 나타낸다. 그동안 백정들이 당했던 멸시와 박해와 이로 인한 비애와 분노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간 이하로, 짐승과 같은 천대를 받고 살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꿈은 오로지 인간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했다. 필자가 이 소설을 숙독한 바의 소견은 그들의 저항운동이 진정한 뉴-교육운동의 모범이 아닌가 하는 처절한 생각이다.

뉴-교육운동의 핵심과 지침은 무엇인가? 작금의 고질적 병폐 즉 중차대한 이념 갈등 사회와 불신 조장, 지도층의 부패와 국민의 권한 제한, 지식과 부의 지나친 편중과 비굴한 국민 양산,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세대 간 갈등, 시대를 거스르는 영어교육과 평가 정책, 봉쇄된 한문 교육, 과도한 사교육 등에 대한 해결책을 외국의 사례가 아니라 우리의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핵심은 민주 정의와 법치질서 실현, 인권과 경제권보장, 여가선용 문화 통섭이다. 실행방법으로 교육과 산업의 일치 교육, 정의정치와 정책에 의한 균형복지, 공의의 심판과 정당한 사회건설이다. 그 결과 자유, 균등, 평안의 지혜와 덕을 기초로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지침은 다음과 같다. 과도한 열정과 분개심을 억제한다. 위선, 무단, 전제, 부정, 압박, 불평등, 사기, 위협, 불법, 무도, 폭력, 폭행, 혁명의 수단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목전의 이해관계, 우연한 충동, 원한에 의한 감정, 야만적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 억압정치, 교육의 제한, 경제압박, 종교폄하를 해서는 안 되는 고도의 행정력을 발휘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 법률은 무엇을 위해 대비하고 존재하는가? 우리 모두 사심 없이 배려하는 자발적인 뉴-교육운동을 새롭게 벌여야 한다. 지금이 최적(最適)의 시간이라고 판단 한다.

 

[필자 주요약력]
(사)한국국제언어진흥협회 이사장
(민)대한민국 일등봉사대 사무총장
대한민국 대통령경호실 혁신자문위원
중앙대학교 외국어교육원 강의교수
(사)국가공인 검정관리기관 한국외국어평가원 영어전문위원실장
THE KOREA TIMES 국제교류원 영어평가연구실장
2018동계올림픽 평창유치기원 전국학생 영어 말하기대회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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