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⑰]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문화 / 이은화 작가 / 2025-04-03 12:17:36
  • 카카오톡 보내기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시인 박철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박철

늦은 밤이다
이 땅의 모든 어린 것들이 지쳐 있는 밤
너만 편히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중략

오늘도 뉴스에는
여성들의 80%가 결혼조건의 최우선으로
경제능력을 꼽는다지만
막상 부자로 사는 이들은 열의 둘이란다
그러니 가난을 물리치는 대신 행복을 찾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의연함을 키우다가도 옆집 갓난아이
슬픈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빈 주머니를 쑤셔본다 너를 기다리며
딸아 가여운 아이야
많은 이들이 옳다면 옳은 것이겠지
지지 말고 살아라
이민 가며 친구가 남긴 한 마디
악하게 살아야 오래 산다는 말도 되살아오는 밤
어서 돌아와 잠시라도 깊은 잠 마셔봐라 숨소리 예쁘게-
반쪽의 달이 외면하며 구름 뒤에 숨고
밤이 어둔 것조차 내 죄인 양 송구스런 밤
너의 행복을 쌓으며 몇 자 쓴다 아이야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잠이 든 아이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어머니는 어릴 적 희연 웃음을 보며 외할머니의 웃음을 닮았다고 신기해하셨다. 그러나 희연의 눈에는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여겼다. 그녀는 할머니를 여읜 뒤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면 청매화 사이를 걷곤 했다. 다리가 아프면 매화 그늘에 앉아 애기똥풀과 봄꽃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꽃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눈. 그녀는 유년의 향수 속 뱀과 마주 보던 기억을 펼쳐보고는 했다.

그동안 희연은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욕심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글에 대한 그녀의 이상은 늘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꽃뱀과 같았다. 한바탕 신명 나게 울 수 있는 축제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던 바람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마음 하나 세심하게 만져주지 못한 자신이 누군가를 위무하는 신명의 울음 터가 되길 희망하던 일이 부끄러웠다.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자 드디어 맘껏 울만한 품을 찾았다는 듯 아이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자는 숨소리마저 시를 읊듯 아름다운 운율을 가진 아이. 그녀는 아이를 뉜 이 자리가 함축된 시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든 아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순한 이마에 선 고운 아미와 선홍빛 입술, 이처럼 복합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한 폭의 그림을 본 적 없었다. 세상의 어머니들도 자신처럼 경이로운 시를 가졌을 것이라는 마음과 함께 부모들은 품속의 고운 시로 인해 감사가 넘칠 것 같았다.


이어 자기 모습과 ‘닮음’ 꼴의 시를 품고 사는 모든 어머니는 시인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웃음 터를 위해 오늘도 부은 발을 쉬지 않을,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들은 모두 시인이자 성자였다.

그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튀어 오르는 은빛 시어들이 가락을 풀어놓는 밤. 잠 속의 언어들이 서로 운을 주고받는지 아이 호흡이 평온했다. 아이로 인해 행복이 충만해지는 시간, 딸아이 머리맡이 요람과 같았다. 모두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내리사랑들,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닮은 아이의 숨소리가 한 방에 모두 모여 있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