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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위기의 시대다. 대통령의 탄핵으로 행정권의 장기 공백과 국회 제도적 민주주의의 다수결은 입법권 남용으로 의회 민주주의도 위기를 맞았다. 사법부도 늦장 재판과 정치성 재판의 편파성 판결로 불신으로 위기를 맞은 건 마찬가지다. 누군가 말했다. 위기 상황일수록 진중하게 행동하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게 바른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중립이 아니다. 불신이 횡행하는 불확실한 시대는 누구나 자기의 삶을, 사회를 행복하게 꾸려 갈 수 있는 내적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바른 '정치교육'이 이를 가능케 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정치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현실 정치에 대한 안목이나 개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정치 이론에 갇혀 있다. 투표와 같은 일종의 선택 과정의 중요성, 주변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대립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교육, 내 주변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 시스템의 개선 방법 등을 위한 시민 의식을 고양 시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문제는 그렇게 따라 주지 않는 사회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국민 의식을 한층 성숙시키려면 필요한 게 정치인의 역할이다. 불행히도 우리 정치는 공리주의 공적 역할보다 '사적 이해'에 따른 선동에 집중돼 있고, 여ㆍ야 정파적 유불리에 따른 술수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은 서로 다른 이념에 갇혀 맹목적 동기로 쉽게 선동 정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편협한 맹목적 분노가 정치와 만나면 광기를 일으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역사를 보면 편협함이 이념을 만나면 광기가 일어나는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선조 때 기축옥사를 들 수 있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정여립 모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동인 1000여 명을 처형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후 서인이 장기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유능한 인재 절반이 괴멸되었고 곧 이은 임진왜란을 맞아 나라가 결딴났다. 지금 우리 정치 상황도 무늬만 바뀌었을 뿐 조선시대와 닮았다. 입법권을 쥔 민주당이 행정권마저 잡는다면 정국이 어떻게 될지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문재인 정권 당시 민주당은 개혁을 주장하며 '적폐 청산'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정적 제거용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정치보복에 이용하였다. 문재인 정권보다 급진적인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라는 절대 반지를 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는 하고자 하는 일에는 상식을 깨며 거침이 없다. 지난번 총선 공천을 보면 반명 세력이 모두 비명횡사했다. 당내 이견과 비판 세력이 모두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아부와 아첨이 자리매김했다. 특히 22대 국회 운영을 보면 공적 대의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방탄을 위해 국회를 사적으로 이용했다.
사적 정치는 상대를 악마화시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책임 또한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특징이다. 악한 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우군들이 동원하는 언어폭력과 과격함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선으로 치장한다. 정치적 우군에게는 이런 방식이 항구적 위협의 대상인 상대를 물리치기 위한 패거리들의 우정 어린 열망으로 이상화된다. 증오의 대상인 상대를 파괴하는 전선에서 자신들의 불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당화되는 것이 자명한 결과처럼 포장된다. 지금 다수당에서 쪽수를 앞세운 사적 정치의 형태는 관행과 상식을 모두 깨며 주요 정치 현안에는 여당과 대화와 타협은 전무했다. 정권을 잡기도 전부터 여당을 내란 세력으로 몰며 공포의 옥사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민주당이 정권을 쟁취한다면 정치의 사법화와 청산의 정치가 만개할 것이다. 가치와 목표, 상호 존중과 공존은 사라지고 오직 법대로의 비방과 구호가 난무하는 홍위병 시대가 도래할 것이 불 보듯 보인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온전하길 바란다면 그 생각은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다.
우리끼리 집단 패싸움에는 승자가 없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자기 편의 승리라는 사적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파도는 보려 하지도 않아 나라의 근간이 점점 무너진다. 따라서 우리끼리의 승리는 사소한 승리일 뿐이며 나라가 결단나는 승리다. 대체 정치는 무엇 때문에 왜 하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정치의 이율배반을 수없이 보았다. 올바른 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정의의 개념은 타인을 향한 것이지 결코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 줬다. 상대를 부도덕하다고 공격하는 언명만큼 자신도 도덕적이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면서 그들의 한계다. 따라서 위장과 위선일 수는 있어도 도덕과 윤리의 실현을 위한 자기 규율과 공동체 가치는 더욱 아니다. 그렇게 치장하려 할 뿐이다. "정치가 올바름을 지향할 때는 바른 정치가 실행되는 그것이 아니라 정치적 바름에 압도당한다." 임마뉴엘 칸트의 통찰이다.
논란에 논란이 거듭되는 민주주의의 바른 정치 모습이 과연 지금처럼 혼란만 부추기는 것인가.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숙제인 이념 갈등이 심화되는 매듭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시급한 당면 과제는 둿전이고 권력 쟁취에만 눈이 뒤집혀 있으니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와 보수의 과도한 갈등으로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절대 왕권의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른가. 무늬만 바뀌었을 뿐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똑같다. 나만이 옳다는 편협함은 나와 다른 사람은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사회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공존하면서 다양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깊이가 생긴다는 사실을 왜 부정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 시기를 우리는 매우 중요한 기회이자 변혁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당시, 군사독재의 폐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역사적 대타협의 산물인 대통령 단임제는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은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정치의 무책임과 비효율성을 만드는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 분산과 단임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개헌과 국회의원의 과도한 특혜 등,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우리 사회의 제도 재선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의 공고한 카르텔을 깨야만 한다.
결국, 정치 제도가 바뀌어야 국민이 편하다. 바른 제도를 만들자는 대의에는 의견이 없겠지만 어떤 모양으로 다듬질하는 것인가는 제각각이다. 새 판을 짜는 제도개선의 배에 깃발만 펄럭일 뿐 올라타려는 사람이 모이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정치가 정당과 개인의 사유물로 전락하면 역사는 퇴행할 것이고, 이미 퇴행의 행보 조짐이 보인다. 국민을 끌어들이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사적 정치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내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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