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독재자 '변태' 김정일 성생활 "기쁨조 실체"

사회 / 이지영 / 2011-02-28 12: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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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복잡한 여자관계 전모

김정일의 복잡한 여자관계 “지도자 동지를 만나게 해달라” 영화배우 우인희 총살령


'변태'로 점철된 김정일 性생활…‘기쁨조’실체 “나의 청춘을 김정일에게 짓밟혔다”


베일에 가려있던 김정일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하나씩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논란이 많았던 김정일의 ‘기쁨조’의 실체까지도 낱낱이 알려지고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김정일을 거쳐 간 여자들의 수는 어느 정도일까? 결론부터 말해 셀 수도 없이 많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김정일에게 부인으로서 대우를 받은 여인은 김옥을 포함해 故성혜림, 김영숙, 故고영희씨 등 4명이다. 이밖에 홍일천이라는 여자와도 결혼했으나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의 여자관계는 인간 김정일에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다. 그 통로를 통해 수많은 여자들이 거쳐 갔으며 김정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여자는 버림받고 희생당했다.


동그란 얼굴형에 전체적으로 귀여운 이미지의 미인을 좋아한다는 김정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부인으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누굴까?


▲ (왼쪽부터)홍일천, 성혜림, 고영희, 김옥
첫 부인으로 추측되는 홍일천


홍일천은 김정일의 첫 부인으로 김일성대학 러시아학부를 나온 혁명가 유자녀라고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정부호위총국 지도원으로 있을 1966년 결혼해 딸 김혜경을 낳았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했던 김정일은 그녀를 업신여겼으며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우거나 손찌검을 해 두 사람의 결혼은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홍일천은 김정일과 이혼 후 1980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문교부 차관)을 거쳐 지금은 김형직 사범대학 학장이자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동거녀는 경남 창녕 출신 성혜림


김정일의 첫 동거녀는 서방으로 망명소동을 일으킨 성혜림이다.
경남 창녕군에서 출생한 성혜림은 유명한 영화배우로 월북 작가 리기영씨의 장남 리 평씨와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1960년대 말 문예부문을 지도하던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이혼하고 김정일과 동거했다.

성혜림의 조카인 故이한영씨는 “숙모는 이 평과의 사랑 없는 결혼에 실망하고 있었고 68년경부터는 김정일과 비밀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성혜림은 1968년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나 69년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게 되는데 당시 그녀는 33살이었고 김정일은 28살이었다. 성혜림에게 결혼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식 결혼하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성혜림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200평 정도의 ‘15호 관저’를 세워 그녀를 본처로 대우했다.


1971년 5월10일 성혜림은 고관 전용인 봉화진료소에서 아들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을 낳았다. 김일성이 김정남의 존재를 안 것은 4년 뒤의 일로, 그 때까지 김정일의 아들은 극비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성혜림은 마음고생이 많아 73년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74년 봄 평양에 돌아온 성혜림은 다시 15호 관저에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스크바에도 아파트를 갖고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살았다. 이후 그녀는 96년 서방으로 망명, 스위스와 러시아에 장기간 머물며 요양하다가 2002년 모스크바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일성에게 승낙받은 유일한 공식부인, 김영숙


김 위원장이 두 번째로 동거한 여성은 김영숙으로, 사실상 故김일성의 정식 허락을 받아 결혼식을 올린 공식 부인이다. 김영숙은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시기에 김철만 장군의 소개로 김정일을 만났다.


그러나 김영숙씨는 슬하에 장녀 설송(33), 차녀 춘송(31) 등 2녀만 두면서 김 위원장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숙은 김일성이 인정해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 이외에는 부인으로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김정일의 공식 부인으로 알려진 김영숙은 현재 두 딸과 함께 북한 호위사령부 초대소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애정이 각별했던, 고영희


김정일의 세 번째 동거녀는 재일교포출신의 고영희씨로 평양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했던 1970년 중반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 이후 사망 전까지 오랫동안 김정일과 함께 살았다. 고영희는 재일동포 출신 고태문의 딸로 1947년생이다. 귀순 무용수인 신영희씨는 고영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고영희는 유명한 무용 배우였고 김정일의 마음에 들었다. 김정일은 이따금 연습실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연습을 지켜볼 정도로 열을 올렸다고 한다. 고영희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로 키도 크고 스타일이 좋은 미인이었다. 춤 솜씨도 뛰어나고 무대에서의 인상도 화려해 주변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김정일도 그런 점에 주목한 듯하다.”


북한 상층부에서 김정일의 공식 부인으로 인정받으며 김정일과 함께 살았던 고영희는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였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는 자서전에서 “고영희를 알고 난 뒤부터 김정일의 여성 편력이 줄었다"고 밝혀 고씨에 대한 김 위원장의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씨는 김 위원장과 사이에 아들 김정철과 김정은, 딸 김여정 등 2남 1녀를 뒀다. 2004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암 치료중 사망한 고씨는 생전에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선정되도록 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퍼스트 레이디’ 김옥


김정일은 고영희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출신 김옥과 동거를 시작했다. 김옥은 1964년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고영희가 사망할 때까지 김정일의 기술서기로 활동했다.


김옥은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병상을 지키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정일이 건강을 어느정도 회복 한 뒤 정식으로 결혼했을 것이라는 추측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김옥은 2009년 8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방북해 김정일과 오찬할 때 함께 배석했고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 직후 김정일·김정은이 북한 새 지도부와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등장해 북한의 새로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왔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김정일의 사생활


공식적으로 알려진 부인과 동거녀들 외에도 김정일은 젊은 시절부터 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보도와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 러시아 대사 손성필의 여동생 손희림, 여배우 홍영희, 주 튀니지 대사의 처 이형연등과 단기간 동거했으며 이 여자들 외에도 김정일에게 농락당하고 버림받아 자살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김정일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내부에서는 폭로를 사전 방지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고 민감한 사항은 공개처형하는 등 과감하게 김정일의 사생활을 관리하고 있다. 유명한 예로 ‘우인희 처형 사건’이 있다.


북한 영화계의 톱스타였던 우인희는 김정일과 불륜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후에 그녀가 재일교포 청년과 차에서 관계를 갖고 히터를 켜고 잠들었다가 청년이 질식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세간에서 우인희에 대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그녀가 조사받는 중에 최고 지도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김정일에게 들어가자, 김정일은 즉각 총살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영화인들이 보는 앞에서 “인민 배우 우인희는 부화 방탕죄를 범했으므로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소리가 끝나가 마자 처형당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애타게 “지도자 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면서 김정일을 찾았지만 그녀의 부탁은 거절당했다. 김정일의 여자관계는 온전히 사적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한 권력을 여자관계에서도 이용했고, 비밀 유지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김일성의 복잡한 여자 관계외에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기쁨조’실체가 탈북자의 증언에 의해 낱낱이 폭로됐다. 기쁨조란 김정일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유흥행사시 여흥을 돋구는 여성으로 성적 쾌락의 도구로 이용되는 일명 만족조, 안마 마사지 등 피로 회복을 위한 행복조, 무용·노래·연주등을 하는 가무조로 나눠져 있다.


기쁨조의 시작은 70년대 초 김정일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북한 전역에서 미모를 갖춘 여성을 선발, 김일성 별장에 이들을 배치하면서 부터다.


구체적으로 1983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김정일을 위한 기쁨조가 생겨났는데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그때그때 충원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 왕조는 기쁨조 선발을 위해 유급 초급 당 비서 이상의 당 간부들에게 기쁨조의 선발기준 표준지표를 비밀리에 제시, 이를 수행해왔다.


기쁨조로 선발 되면 6개월정도 교육을 받는데 만족조는 주연시중과 성적봉사에 필요한 예절과 기교를, 행복조는 피로회복 전문기술을, 가무조는 가창·율동 등을 교육받는다. 한국의 장관·차관급에 해당되는 정무원 부장급보다 더 높은 특별대우를 받으며 그 가족 한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기쁨조’, 실태는 어떨까?


“나의 육체 모든 것은 내 몸에 붙어 있다고 해도 내 것이 아니다” 16살의 어린나이에 5과에 뽑혀가 사랑이라는 말도 모르고 오직 김정일의 한 여자로 살아야 했던 탈북자 김씨의 증언이다.


김씨는 “‘김정일 기쁨조’에 들어가서 부터는 김정일의 승인 없이는 타인과의 연애도 할 수 없으며, 김정일 사생활을 알고 난 후에는 절대로 외부와 단절된 사회에서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없이 생활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김정일의 기쁨조’ 집단은 어린 여성들만을 고집하며, 나이가 차거나 병든 여성들이라고 해도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김정일과 그 무리들의 노예로 살아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쁨조 출신으로 2000년 탈북해 서울에서 평범한 직장여성으로 지내고 있다는 한 여성도 “북한에서의 악몽을 생각하면 결혼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성의 노예로 지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5년 정도의 기쁨조 생활을 한뒤 25세 정도가 되면 국가에서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하거나 혹은 고위간부들의 소실노릇을 하게 된다. 기쁨조 출신 처녀들은 다른 이성과 교제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다만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서만 교제와 결혼이 가능한 것이다.


어린나이에 김정일의 아낌없는 배려라는 꼬임에 넘어가 청춘을 바치는 여자들, 북한에서 여자로 태어난 다는 것은 큰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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