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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1960년 `버터필드8'과 1966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테일러의 사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지금까지 영국 배우 리처드 버튼과의 두 번의 결혼을 비롯해 7명의 남자와 여덟 차례나 결혼하는 등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다. 고인은 생전인 지난 1989년 한 인터뷰에서 "너무 많은 것이 내 인생에서 벌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1932년 영국 런던에서 미술품 중개상 아버지와 연극배우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테일러는 10세 때 영화 `귀로'를 통해 데뷔한 뒤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관능적인 모습과 큰 눈망울, 아이콘과 같았던 짙은 속눈썹은 전 세계 많은 남성과 영화팬을 사로잡았다.
테일러가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유명한 역할의 하나는 클레오파트라였다. 거기에서 자신과 두 번 결혼한 버튼을 만나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테일러가 영화 출연료로 100만 달러의 벽을 깬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말년에는 `엘리자베스 에이즈 재단'을 설립해 에이즈 퇴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왔다.
테일러는 자신이 `팝의 황제'라는 칭호를 1989년 처음 붙여줬던 마이클 잭슨과도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고, 2009년 잭슨이 사망했을 당시 추도사를 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고인은 연기와 연예분야에 대한 공로와 에이즈 퇴치를 위한 활동 등으로 2000년 버킹엄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데임' 작위를 받았다.
테일러는 세계적인 명성에도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다. 그는 마이클 잭슨과 함께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려다 지병 때문에 방한하지 못했고 1999년에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에 특별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내한 일정이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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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숨졌다고 CNN방송을 비롯한 미 언론이 23일 보도했다. 향년 79세. |
미국영화협회(MPAA) 크리스 도드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그의 연기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영화팬들에게 남았다"면서 "단순히 뛰어난 연기에서뿐 아니라 에이즈와의 싸움에 기울인 노력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긴 진정한 미국의 아이콘이었다"고 추모했다.
또 '에이즈 건강재단'의 마이클 와인스타인 회장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에이즈 환자뿐 아니라 이 질병과 싸워온 많은 이들의 가슴에 특별히 남아 있다"며 "그는 에이즈가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테일러의 오랜 친구였던 엘튼 존은 CNN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할리우드의 거인을 잃었다"면서 "더 중요한 것은 너무나 훌륭한 한 인간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라고 애도했다.
팝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테일러의 죽음을 "한 시대의 끝"이라면서 슬퍼했고, 머라이어 캐리는 테일러를 "영원히 함께할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전설"이라고 추모했다고 미 언론이 전했다.
또 에이즈 투병을 했던 미 프로농구(NBA)의 전설 매직 존슨이 "엘리자베스, 에이즈와 싸움에 헌신한 당신에 감사하며 세계인들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글을 올리는 등 유명 인사들의 트위터 추모글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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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스타 동판'에 꽃들이 놓여진 가운데 취재진이 대거 몰렸다. |
팝스타 마돈나는 연예잡지 Us매거진을 통해 "위대한 전설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면서 "배우로서 뿐 아니라 에이즈 활동가로서 놀랍고 고무적인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있는 테일러의 '스타 동판'에는 수많은 꽃이 놓였고 팬들의 추모 발길도 이어졌다.
한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망하자 생전 그가 사랑했던 남자들에 대한 관심에 네티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녀는 ‘세기의 여우(女優)’ 답게 여덟 번의 결혼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테일러는 우선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과 두 번에 걸친 `세기의 결혼과 이혼'으로 화제를 낳았다. 두 사람은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촬영 세트장에서 만나 불타는 사랑에 빠졌다.
모두 배우자가 있었던 두 사람의 열애는 언론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교황청이 나서서 비난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1964년 결혼해 1974년까지 사랑을 이어가다 이혼했고, 이 과정에서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10월 재결합했으나 다음해 7월 버튼의 알코올 중독 등으로 다시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생존 시 "로마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미칠 듯 강력한 사랑에 빠졌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1984년 뇌출혈로 숨진 버튼도 최근 발견된 테일러에게 보낸 연서에서 "당신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일 것"이라면서 "특출한 미모까지 겸비해 당신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며 정열적인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보석을 고르는 안목과 씀씀이가 대단했던 리처드 버튼은 리즈 테일러에게 33.19 캐럿의 `크루프 다이아몬드' 그리고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물방울 모양의 라 페레그리나 진주도 선물했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를 촬영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글이 웨일스어로 새겨져 있는 금시계를 버튼에게 선물하며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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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
1957년에는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토드가 다음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세 번째 남편 토드가 죽은 뒤 테일러는 토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자기 친구 데비 레널즈의 남편이었던 팝가수 에디 피셔와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됐다. 당시 한 기자가 세간의 비판을 전하자 "날더러 어쩌라구? 그럼 혼자 자란 말야?"라고 응수했다.
테일러와 피셔 부부는 런던으로 이사했지만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리처드 버튼을 만나면서 파경을 맞게 된다.
테일러는 버튼과 두 번의 결혼과 파경으로 인연을 끝냈지만 "내가 죽으면 전 남편인 리처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은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테일러는 해군장관을 지낸 정치인 존 워너와 1976년 결혼했고, 워너는 이후 버지니아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돼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내는 등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82년 헤어졌다.
테일러는 1991년 20년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이던 래리 포텐스키와 마이클 잭슨의 목장에서 결혼식을 치러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5년만인 1996년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작년 4월 78세의 나이로 29세 연하남인 할리우드 매니저 제이슨 윈터스와의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인했다.
테일러는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나의 약혼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제이슨은 내 매니저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혔다.
테일러는 여덟 번의 결혼으로 4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주, 4명의 증손주를 둔 가운데 말년에는 독신으로 지냈다. 파란만장했던 결혼생활과 관련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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