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에덴동산을 다시찾은 기쁨 ‘최전성기’

People / 소정현 / 2013-05-30 18:13:03
  • 카카오톡 보내기
<스페셜-1>美國 대륙의 유대인들(上篇-移住史) 이스라엘보다 인구 많아 세계 최대 보금자리
스페인왕과 유대인 전폭 후원에 신대륙 개척

미국대륙 이주는 직접이 아닌 남미를 경유해
네덜란드 식민전쟁 패배후 미국 동부에 정착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 완벽한 자유쟁취
나치 탄압피해 우여곡절 끝에 대거이주 봇물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 유대인 ‘최상의 지상낙원’ 미국 대륙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은 총1374만61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통계청 2011년 5월 발표를 보면, 이스라엘 총인구는 1948년 80만6천명에서 2011년에는 775만 명 선이다. 인구 구성비는 유대인이 584만 명으로 총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아랍인은 159만 명으로 21%를, 드루즈족(Druze)을 포함한 기타 인구는 32만 명으로 4%를 유지한다.

美 코네티컷주립大 버먼연구소 소재 ‘북미 유대인 데이터 뱅크’는 ‘2011년 미국 거주 유대인 인구’ 보고서에서, 미국 전역의 50개 주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인구를 정밀하게 헤아린 결과, 2010년 말 美 전체 인구의 2.1%인 658만8천여 명으로 추정했다.

이렇듯, 미국에 사는 유대인의 수는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보다 75만명 정도가 더 많다. 미국 국적을 소유한 체 이스라엘에 사는 인구도 20만 명을 상회한다. 어쩌면 미국은 이스라엘을 제치고 세계 제1의 ‘유대인 국가’란 반증이다. 해외 거주 유대인으로는 미국 뒤를 이어 두 번째의 프랑스(약 48만 명)와 셋째의 캐나다(약 37만5천 명)가 그 세를 형성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제2의 고향인 셈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이 두 나라는 유대인 생활에 있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격이다. 이스라엘은 미국 대외원조의 1/5이라는 천문학적 재원을 조달받고 있다. 경제·군사적 지원과 맞물려 외교적 지원은 무한대이다. 그 배경은 미국의 위상 제고에 있어 그들의 현격한 공헌도에서이다. 공헌도가 지대한 만큼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발언권이 확고하며 강력하기 때문이다.

● 탄압과 박해에서 해방 ‘최고의 전성기’
주후 15세기 말엽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유대인의 좌표 역시 혁신적 전기를 맞았다. 스페인을 비롯하여 유럽 각처에서 박해받으며 신음 속에 고통 받던 유대인들에게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대륙을 찾아나선‘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유대 혈통이라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콜럼버스가 신천지 개척을 위해 항해의 돛을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던 1492년 3월 31일 스페인의 왕인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한다.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 1198∼1216) 칙령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페인으로 집단 이주해서 200여년 이상을 남다른 열정으로 스페인의 요직을 독식하다시피 하며 안정적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회오리 칼바람이 거세게 몰려왔다. 기독교로 개종을 하든지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야하는 절체절명의 백척간두 대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상당수 유대인이 개종을 했는데, 콜럼버스도 그 당시 개종 유대인이었다. 왕은 진귀 상품으로 후추와 향료의 신천지 개척을 적극 후원했기에 마침 종교적 박해를 받지 않고 그들만의 간절하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던 유대인들의 소망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콜럼버스가 그의 탐험을 성공적으로 이끈 데는 재력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도움이 컸다. 이를 적극 후원한 사람은 ‘아브라함 시니어’(Abraham Senior)라는 유대인이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책의 저자인 ‘허버트 박스터 애덤스’는 콜럼버스의 첫 번째 탐험을 유대인들이 전폭 지원한 것은 더 이상 유럽에서 핍박받지 않고 신천지에서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논지를 펼친다.

또한 신천지 발견을 위해 건조된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에서 기인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갈급하는 적잖은 ‘마라노’(Marrano, 강압적 개종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마라노들에게 최상의 피난처인 셈이었다.

결국 그들은 스페인 왕실과 유대인 자본가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항해사 출신 콜럼버스 선장을 주축으로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 號)를 포함한 핀타호와 니냐호 등 총 3척의 배를 이끌고 1492년 8월 3일 에스파냐 팔로스항(港)을 출항하였다. 당시 120명 중 35명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1492년 10월 12일, 니냐호의 선원이 현재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諸島)를 발견하여 콜럼버스가 첫 상륙한 장소를 산살바도르(San Salvador, 현 엘살바도르의 수도)라고 명명하였다. 결국 제4차(1392년, 1493년, 1498년, 1502년-1504년)에 걸친 그들의 항해는 미국 땅은 밟지 못했으나 미국에 가까운 바하마(Bahamas)와 아이티(Haiti)를 발견했다.

● ‘美동부 거점’ 뉴욕에 신둥지를 틀다
유대인의 미국 대륙 이주는 직접이 아닌 남미를 경유한 것이다. 유대인의 남북아메리카 대륙 이주는 당시 브라질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 ‘마누엘 대왕’과 마라노(Marano, 스페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인 ‘페르난도 드 로론하’의 계약으로 촉발되었다.

브라질에서 유대인들은 담배와 사탕수수를 경작하여 무역을 하면서 다시금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는 인내가 좀 더 필요했다. 16세기 초 남미 대륙에도 또다시 종교재판의 서슬이 몰려온 것이다.

광분한 스페인의 가톨릭 사제들과 의기투합한 포르투갈 정부는 '이단 심문소'를 브라질에 설치하여 이들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재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 식민지 각축전에서 주도권을 쟁탈하려는 네덜란드가 뛰어든다.

미국에 첫 유대인들이 도착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1654년이다. 왜 그랬을까? 스페인과 포르투갈 다음으로 식민지 개척에 뛰어 든 네덜란드! 벼랑 끝에 몰린 유대인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채택한 네덜란드 편에서 물심양면 후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654년 네덜란드는 브라질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상대로 교역소를 차지하기 위해 치러진 전쟁에서 패배했다. 네덜란드의 패배와 함께 유대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 탈출 대안은 바로 북미 아메리카 대륙의 하나인 미국으로의 선회였다.

그들은 결국 1654년 9월 각고의 인내 하에 배를 타고 현재의 뉴욕市인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하는 지역에 23명의 유대인이 상륙하는 쾌거를 이룬다.

다행히도 당시 영국에서는 제임스 1세(James I)의 신교도 탄압에 못 이겨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청교도들(淸敎徒, Puritan)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대거 이주할 때였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옮겨 온 청교도들은 영국을 탈출한 사건을 마치 모세가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서 에굽을 탈출한 사건으로 비유하며(구약성경 출애굽기 참조), 유대인들이 브라질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서 미국으로 피난 온 사건 역시 출애굽에 비유했다.

좀 더 상술하여 본다. 유대인들이 청교도들과 심정적 일체감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유대인이 미국에 급속도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데는 미국에 정착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신이 유대주의적 성향을 적잖이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美의 뉴잉글랜드는 그 명칭대로 영국계의 이주민이 많이 살아온 곳이다.

청교도는 자신들이 구약성서의 정신을 계승하는 자로서 구약성서에서 신의 원형을 찾았기에 청교도가 영국에서 ‘유대인의 신파(新派)’라고 불린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약술한바, 청교도는 종교의 대탄압에 영국 탈출을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에 견주며, 자신들이 개척한 미 동부의 메사추세츠(Massachusetts)만(灣)을 뉴예루살렘(NewJerusalem)이라고 부르며 유대인들과의 정신적 유대감을 공고히 했다.

청교도들과 의기투합하며 신대륙을 찾은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뉴욕(New York)을 건설하고 그 주변 동부 일대에 부흥의 터전을 잡았다.

유대 무역상들의 삼각무역으로 뉴욕이 부흥하였고 동부 일대에서 미국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군복무, 상업 활동, 부동산 소유 등 식민지 공동체내 한 구성원으로서의 전반적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뉴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일정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아 누리기 시작한지 10여년이 경과된 1664년 영국이 네덜란드와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운명의 여신은 유대인들을 또 다시 영국의 식민지 영역으로 귀결시키기 이른다.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을 뉴욕으로 바꿨다.

결과적으로 현재 미국 거주 유대인의 4분의 1이 넘는 160만 명이 뉴욕 주에 살고 있고, 뉴욕 주의 인구 중 8.5%를 차지한다.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주 일부를 포함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210만 명이 훨씬 넘는다. 이런 연유에 뉴욕 주에서는 유대계의 지지에 실패하면 주지사, 주요시의 시장에 당선되지 못한다는 말이 공공연히나올 정도이다.

● 북아메리카 ‘유대인 공동체’ 형성기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시대 초기 유대인 정착은 공동체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동체 단위로 유럽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개별적 또는 가족 단위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전처럼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요, 자발적으로 신대륙을 택하였다. 처음에는 유대인들 중에 스페인 계열인 세파르디(Sephardi)가 압도했지만, 1700년이 지나자 독일계열인 아슈케나지(Ashkenazi)에서 오는 유대인과 완전히 뒤섞였다. 1750년에는 이미 독일계 유대인의 수가 스페인계 유대인수를 웃돌았다. 1650년에서 1825년까지의 약 175년 동안 유대인 이민의 제 1단계가 끝날 무렵 미국의 유대인 인구는 대략 1만 명이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북아메리카 유대인 공동체는 산발적으로 더디게 형성되었다.

유대인 정착은 주로 동부지역인데 1621년에는 버지니아(Virginia)에, 1649년에는 메사츄세츠(Massachusetts)에, 1658년에는 메릴랜드(Maryland)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733년에는 유대인이 조지아(Georgia)에 유입됨으로써 미국 13개주 전부에 유대인이 유입되었다. 이는 대영제국의 북아메리카 대륙 동해안의 13개의 식민지 조성과 일치한다.

1636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가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에 새식민지를 건설하였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한 관용의 원칙을 내세웠다.

원래 목사인 윌리엄스는 신정정치(神政政治)마저 부정하는 극단의 민주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매사추세츠주에서 추방당하자, 로드아일랜드주로 도피하여 그곳에 정교(政敎)분리·신앙 자유를 표방한 정강을 내세웠다. 윌리엄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1644년에 정식 인가를 받아 스스로 최초의 로드아일랜드 총독이 되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드아일랜드의 중심 도시인 ‘뉴포트’(Newport)와 ‘프로비던스’(Providence)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에 불굴의 도전정신과 모험심으로 중무장한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나 영국을 통해 미국 대륙으로 대거 이주해 들어왔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사회적 정치적 박해를 피하여 신대륙에서 종교(유대교)의 자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직업선택이 비교적 자유롭고 선택의 폭도 넓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의 유대인들은 상인, 가축 거래인, 농산물, 은행업자와 비즈니스 등 다양한 계층의 직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숨통이 트인 자유가 도래한 것은 모든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이 동일함을 선포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독립을 천명한 1776년의 미합중국의 독립 선언이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초안을 잡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존 애덤스(John Adams)가 수정한 선언문 초안이 본회의에서 심의되었으며, 1776년 7월 4일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대륙 회의에서 '독립 선언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지구촌 도처에서 박해를 받아오던 유대민족이 마침내 첫 온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평화의 기상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일대 분수령을 이루었다.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무한한 가능성을 넉넉히 넘치도록 제공한 것이다.

이로서 미국의 유대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의미 있는 인구집단을 이루게 된다. 1880년 당시 미국 유대인의 수는 25만 명이었는데, 미국 인구는 5천만 명으로 0.5%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였다.

19세기의 유대인 이주는 대부분 독일계였고, 주로 1840년대의 1차 유대인 이주 열풍을 통해 미국에 유입되었다. 1880년대 초반부터 미국으로의 유대인 이민이 재차 크게 증가하는데 이것이 제2차 유대인 이주 열풍이다.

이는 당시 동유럽의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결과로 이들은 대부분 ‘이디시어’를 구사하는 독일계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의 농촌인들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유대인 게토에 거주하던 도시인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이민법이 강화된 1924년까지 대부분 동유럽 출신인 2백여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시한바, 이들은 주로 미국의 관문인 뉴욕에 정착하였고 뉴욕은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밀집한 곳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근면성과 자녀 교육에 대한 열성을 발휘하며 빠른 속도로 미국 사회의 뉴리더로서 급부상하기 이른다.

● 마지막 고비, 나치 독일하의 유대인
1933년 나치가 집권하기 시작한 때부터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34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죽음의 나라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나 유럽대륙을 배회하기 시작했다.너무 안타깝고 애석히도 슬픈 일은 이들 중 약 10만 여명이 이주한 국가들을 독일이 접수하였다는 사실이다. 독일 당국은 이들 대부분을 임시수용소로 이송하거나 집단 학살 수용소로 보내어 학살하였다.

히틀러는 파리에서 독일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가 독일계 유대인 청년인 헤르셀 그린슈판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린슈판은 1만2,000명에 달하는 폴란드계 유대인이 독일에서 폴란드로 강제 이송된 것에 분노하여 폼 라트를 저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유대인 사회에 대한 전국적인 광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38년 3월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인 9일과 10일 양일간 돌격대, 친위대 등 나치 단체의 회원들은 도끼와 쇠망치로 무장하고 유대인 소유의 상점과 예배당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서방 유럽과 미국은 ‘수정의 밤’ 이후 난민들의 대거 유입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명 ‘수정의 밤(Kristallnacht)’라는 이름은 1938년 11월 이틀간 폭도들의 대테러로 거리에 어지러이 흩어진 수정(깨진 유리 파편을 지칭) 더미에서 유래했다.

1938년 7월 도미니카 공화국만이 선의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볼리비아는 1938년부터 1941년 사이 불과 2만 명을 넘는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총 12만 명의 유대인 이민자 중 약 8만5천명의 유대인 난민들이 1938년 3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민을 갈망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비율이었다.

1939년 6월경에 이민 신청자의 수는 3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급증했다. 특히 1938년 말 죽음의 문턱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불과 2만7천개의 할당 미국 비자를 얻으려고 미국 영사관 앞에 줄을 섰지만 대부분 신청자들은 비자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에게 생생한 각인된 것은 일명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호 사건이다. 1939년 5월부터 6월 사이, 미국은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항해하는 900여 명 이상의 유대인 난민의 입국을 불허한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호는 쿠바 정부가 난민들의 임시 비자를 철회 직후, 곧바로 美 플로리다 연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미국은 냉정히도 입국 비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미국 입항을 거부당한 채 이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정부가 이들 유대인 난민들 일부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하였다. 세인트루이스 호에 타고 유럽으로 돌아갔던 908명의 승객들 중 254명이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이 패전한 1945년, 미국의 트루먼 정부는 이민자의 제1순위로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고 1만6천명의 이민을 허가하였지만 미국 이민 제한 규정은 계속해서 이들을 속박하고 있었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