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장규동 여성동지 살리려 다시 중국행
임정요인 협의 일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키로
1922년 악조건 삼엄한 경비 무릅쓰고 국내잠입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일제는 보도통제
수많은 독립투사 숨져간 원한의 장소…간담 서늘
김상옥의사 '겨우 1人' 생포하려 일경찰 총동원령
대한독립 만세! 외치며 방아쇠로 비장하게 삶마감
![]() | ||
| ▲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위대한 영웅 김상옥의사 | ||
찬탈자들에게 금은보화를 갖다 바쳐야 함은 물론 예쁜 우리의 딸들과 아들들도 그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우리가 자유를 찾지 못한 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살았더라면, 혹여 중국이 맥아더 장군과의 전쟁에 이겨 한민족을 호되게 지배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지 않는가?
● 형언할 수 없어 ‘가족의 고문과 슬픔’
1920년 8월 美國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거사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 일경에 쫓기던 김상옥의사는 그해 10월에 상해로 피신을 하였고, 일본 경찰은 그를 잡지 못한 분풀이로 가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더더욱 김의사가 쓰려던 폭탄 2개가 발각되자 그들은 가족들을 기절할 때까지 매질을 하고 다시 물을 퍼부어 깨어나면 다시 매질을 하는 극심한 고문을 하였다.
김의사의 삼형제의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 김점순 여사와 아내 정진주, 동생 춘원(春園), 그리고 여성동지 장규동(張圭童)을 심히 고문하였다.
당시 24세의 장규동에게는 매질과 고문뿐 아니라, 옷을 벗겨 끌고 다니고 거꾸로 매달아 때리며 말할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장규동은 19살부터 조국독립에 몸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김상옥 의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일을 적극 돕고 있었다.
이러한 고문을 당한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어찌할 바 모르면서 유치장이나 경찰서나 옥에 갇혀서도 고함을 치며 일본인들을 책망하였다.
“이 놈들! 너희 놈들은 어미나 누이도 없느냐? 죄 없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이렇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너희나라 풍습이냐? 비겁한 놈들! 이 벌레 같은 놈들아! 너희 일본은 틀림없이 망할 것이니 두고 봐라!”고 소리 지르며 식음을 전폐하고 일본인들을 무섭게 꾸짖었다.
1921년 7월에 암행 귀국하여 1년 만에 다시 집을 찾아온 김상옥의사는(그 사이에도 군자금 모집으로 평양, 충청, 전라, 경상도 등을 돌며 군자금 모금 등으로 국내로는 자주 들어옴) 고통 속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망연자실했으며 특히 자주 유치장에 갇혀 고문을 당하였기에 깊은 병이 들어, 뼈만 남아 늑막염으로 죽어가는 동생 춘원과 장규동의 모습을 보고 울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의사는 장규동이 ‘자신을 상해로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하자 동지들과 함께 치료해 보고자 걸음도 걷지 못하는 그녀를 등에 업고 중국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폐결핵(당시엔 치명적 병이었다.)까지 앓고 있어 치료가 불가능하였기에, 동지들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1922년 5월 10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김상옥 의사는 비통한 마음으로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昂), 윤기섭(尹琦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翼熙) 등 동지들과 함께 장례식을 준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선생은 관을 사고 장례를 치루라고 중국 돈 백 원을 보내왔다.
그러나 한참 후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7연발 모젤 권총이 들려 있었다. “아니 관은 어디 있고 왠 총입니까?” 동지들이 묻자, 그는 이렇게 비장하게 답변한다.
“사랑하는 장규동 동지를 죽인 것은 병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닙니다! 이는 바로 일제 침입자들입니다! 죽은 동지도 관 대신 일제에 맞서 싸울 총을 사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관과 바꾼 이 총으로 나는 끝까지 일제와 싸울 것입니다!” 이런 김상옥의 비장한 결심을 본 동지들은 자신들이 돈을 모아 관을 사왔으며, 다음날 상해 근교의 보산로(寶山路) 장지에 그녀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 위대한 사명받고 ‘다시 한국땅으로’
임시정부의 재정난과 계속되는 내부 갈등으로 보면서, 김상옥은 더 이상 편하게 상해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는 임시정부 수뇌부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등과 귀국 문제를 협의하고, 일본 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 등을 상의 결의한다.
그때 김원봉(金元鳳)은 김상옥의사의 활동을 위해 무기를 지원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지 김한(金翰)을 소개하였다. 김한은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1927년 4월에 출옥했다. 1930년 2월 소비에트러시아로 갔으나, 그 뒤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김의사는 1922년 11월 초반에 김원봉으로부터 권총 3자루, 신익희에게서도 그가 호신용으로 쓰고 있던 '뿌라니케' 권총 한 자루, 임시정부 등에서 대형폭탄 4개, 소형폭탄 2개 및 탄약 8백발, 그리고 연락문서 등을 구비하고 귀국할 준비를 갖추었다.
조소앙에게서도 국내 몇 동지들에게 전하는 소개장을 받았다. 그리고 상자를 만들어 그것들을 비단과 함께 넣고 비단 장사의 상자처럼 위장했다.
그리하여 11월 14일 석양녘에 영국 상선을 타고 상해 부두를 떠나 천진(天津)으로 향했다. 김상옥의사는 상해 임시정부 이시영, 이동휘(李東輝), 조소앙 등 요인들과 작별할 때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일본 놈들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 거사에 임하는 그의 결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김상옥은 함께 거사에 참여할 21세의 청년 안홍한(安弘翰) 그리고 오복영(吳福泳)과 함께 출발했다. 상선 밑 선창에 자리를 잡고 김상옥은 두 사람에게 서울 형편을 대략 이야기하고 고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자기들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천진으로 가는 도중 여비로 준비하였던 중국 돈 60원, 일본 돈 90원을 선실 내에서 도둑맞았다. 천진에 도착하여 애국부인회장 윤숙경을 만나 서울에서 필요한 활동자금을 추가로 조달하려 하였으나 15원 밖에 받지 못했다. 그 돈으로는 세 사람의 여비도 충당할 수 없어 함께 갔던 오복영은 천진에 남기로 하고, 김상옥과 안홍한은 열차편으로 봉천으로 출발했다.
봉천으로 가서 입국할 때 필요한 여권을 만들기 위하여, 그 곳의 일본 영사관 부영사인 조선인 양모(梁謀)를 만나 여권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한다. 여권은 구하지 못했지만, 귀국열차를 타야하기에 김상옥의 안경 1개와 안홍한의 스프링코트를 팔아 14원을 만들어 안홍한을 먼저 서울로 보냈다.
안홍한은 오동나무로 이중 제작한 무기 상자(대형폭탄 4개, 소형 폭탄 2개, 권총 4정, 탄환 800발)를 인력거에 실어 봉천(奉天, 중국 瀋陽)역 소하물 계에 탁송하고, 그날 밤 9시 신의주에서 출발해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다음날 아침 5시경 국경인 지금의 단동(丹東) 지역인 ‘안동’(安東)에 도착하여 세관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도중에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신의주경찰서로 연행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2월 1일 이른 아침에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김상옥은 자구책으로 여비를 만들어야 했기에, 옷 시장에 나가 입고 온 양복을 팔아 시골 농사군처럼 변장한다. 그리고 비단상자에 넣어둔 비단을 팔아 여비를 마련한다. 압록강 철교에 도착한 그는 침착하게 경비 경찰을 때려눕히고, 신의주 세관 검문소에서 보초를 실신시킨 후 야밤에 무사히 위험을 벗어난다.
마침 남쪽으로 내려가는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를 만난 그는 석탄을 파서 몸을 숨겨 24시간이 지나서야 일산역(現 일산)에 도착한다. 1822년 12월 초 그는 드디어 다시 그리운 고국에 잠입한 것이다.
그는 밤을 이용하여 부친의 동생인 숙부 김완식(金完植)댁에 들러 배고픈 배를 채우고, 무악재((毋岳─,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넘어 종로 인의동(仁義洞, 지금의 광화문 근처) 51번지에 살고 있는 동지 전우진(全宇鎭)의 집을 찾는다.
상해에서 오는 비밀문서를 김상옥의사에게 극비리에 전달해 주는 일을 맡았던 전우진은 1923년 당시 경성우편국 우체부로 근무하였다. 1919년부터 김상옥의사 등과 함께 혁신단(革新團)을 조직,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제작하여 반포하고, 1920년 5월 김상옥을 중심으로 하는 암살단조직에 가담, 인의동 자택을 연락장소로 제공하였다. 그에겐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우진은 3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동지 김상옥의사의 중대 사명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고, 안홍한이 가지고 온 무기를 인수하여 장안여관 창고에 비치하였다.
● ‘생이별조차 너무 짧아’ 死地를 향해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는 김상옥의사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보기 위해 어두운 밤을 이용해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어머니는 애타며 기다리던 아들이었지만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아이고, 아들아! 무엇하러 왔느냐?” 라고 기겁을 하였다.
“어머니, 이번엔 아주 단판 씨름을 하러 왔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저를 못 보실 수 도 있습니다.” “얘야! 네가 늙은 어미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어린 자식들과 네 처를 봐서라도 어떠하든지 살아야 한다!”
옆에서 홀연히 울고 있는 아내를 보고는 “여보, 내가 세상을 뜬 후에도 자식들을 잘 길러주구려. 정말 미안하오!” 유언 같은 언사에 정씨 부인은 할 말을 잃고 쓰러졌다. 이 짧은 만남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두 여인은 서로 부둥켜안고 밤이 새도록 울었다.
중대한 사명을 띠고 온 김상옥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적당한 은신처가 없어서 곤란을 겪었다. 동지들과 친척의 집을 2~3일 다니며 묵었고, 이필주 목사(3.1운동 33인중 기독교 대표) 댁과 관수동(現 광교 부분)의 장예학(張禮學)목사(독립 운동가들을 집에 은신시킴), 김태연 목사(감리교 목사) 댁에 머물기도 했지만,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안전한 거처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남산 밑 삼판동(現 후암동) 감나무 밭 사이에 외딴 집 두 채만 있는 누이동생과 매제 고봉근(高奉根)의 집을 찾아간다. 이곳은 조용하기에 누가 왔다가도 소문이 날 염려가 없는 적당한 은신처였다.
그는 고봉근의 도움을 받아 그 집에 ‘한당(韓黨, 한국 독립당) 서울 혁명사령부’를 설치하고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1922년 4월 상해에서는 김의사를 ‘한당 혁명사령부장‘에 선임하였다. 이렇게 김상옥의사는 매일 밤 돌아다니며, 윤익중(尹益重) 등 동지들을 만나 거사를 준비하였다.
● 독립탄압 본산지 ‘종로경찰서’ 정조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의 종로경찰서는 현재의 종각역 8번 출구 장안빌딩(YMCA 건물 옆)에 있었다.
김의사는 어머니가 집에 감추어둔 폭탄을 수유리 외가로 가지고 오시도록 부탁한 후, 산기슭에서 어머니를 만나 외투에 폭탄을 감추고는 종로 경찰서에 다가서자 동행한 윤익중에게 잠시 자리를 피하라고 말하였다.
갑자기 건물이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건은 일체 보도 금지가 되었지만 그 의거의 주인공은 김상옥의사였다.
독립 투사를 심하게 고문하던 경무계(警務係) 방에 투척된 폭탄은, 순식간에 유리창을 깨뜨리고 천지를 진동시키며 아비규환 수라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피해를 은폐했으나 당시 1925년 상해에서 발간된 한살임(韓薩任, 조소앙 필명)의 ‘김상옥전’에는 일본 경찰 및 어용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원 장화룡(張和龍) 등 10여명 피해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상옥의사는 본인이 한 일에 대해서는 자랑을 하거나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폭음소리에 놀란 윤익중은, 혹시 일경에게 우리가 오해받으면 안 되니깐 이곳을 떠나자고 김의사를 재촉하였다고 한다.
김상옥의사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것은, 첫째로 침략과 탄압을 일삼는 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를 앞두고 폭탄의 성능을 실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성능이 만족할 만하진 않아 아쉬웠지만, 일제를 전율케 했고 잠자던 우리 민족혼을 흔들어 깨운 것으로 위로하였다.
둘째로는 우리의 수많은 독립투사가 검거되어 그곳에서 심한 고문당하다 죽어나간 원한의 장소였기 때문이요, 셋째로는, 김의사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랑하던 동지 장규동이 고문과 학대를 당하며 목숨을 잃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 사이토 총독 거사도모…‘삼판동 새벽 총격전’
날이 갈수록 우리 민족을 학대하는 그 모습들이 거칠고 심해져가는 일경을 향해, 김상옥의사와 동지들은 이제는 평화적 독립운동이 아닌, 그에 상응하는 무력으로 그들과 겨뤄 자유를 찾아야 함을 재차 확인한다.
김상옥의사는 김한(金翰), 전우진(全宇鎭), 윤익중(尹益重), 서대순(徐大淳), 정설교(鄭卨敎), 신화수(申華秀), 이혜수(李惠受) 등의 동지들과 거사를 의논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첫째는 ‘사이토 총독’을 비롯하여 일제하의 고관을 저격하고, 일경에 反민족 행위를 하는 자를 숙청하기로 결정한다.
둘째는, 총독부 및 관공서 폭파를 이루고, 셋째는, 행동대원을 모아 조직적 훈련을 통해 전국으로 항일 운동을 전재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1월 17일에 동경에서 열리는 국회에 참석하고자 서울역을 떠나는 ‘사이토 총독’을 저격 하려는 계획을 세운 김상옥 의사는 일본 순사로 변장하고 서울역에 나가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거사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날 새벽,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단신으로 일경과 맞선 총격전을 벌린다.
그날은 종로경찰서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5일째 새벽이었다. 삼판동 고봉근의 집을 종로경찰서의 형사 15명이 겹겹이 포위하고 담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때 잠을 자던 김상옥 의사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다무라 형사를 비롯해 연달아 여러 명을 쓰러뜨리며, 신조차도 신지 못한 채 눈 쌓인 남산으로 달아나야 했다.
눈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아 그는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장충단 개울(現 성동구 행당동)다리를 넘어 안장사(安靜寺, 재개발로 인해 양평으로 이전) 도착하고, 일경은 남산을 포위하고 이를 잡듯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날의 동아일보 호외는 ‘설중(雪中)의 남산포위(南山包圍)’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본 수 백명 경관은 왕십리(往十里) 일대와 지금의 서울운동장 일원인 광회정(光熙町)을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三坂通) 일대를(現 후암동 부근) 경계하니 실로 서울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와 같았으며 김상옥의 누이동생과 매제 고봉근과 그 친족까지 전부 경기도 경찰부로 인치했다.”
일본 경찰이 눈 위의 그의 발자국을 주목하여 따라 추적했는데, 놀라운 것은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5미터 혹은 10미터의 간격으로 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후일 ‘김상옥이 축지법(縮地法)을 썼다’는 말이 장안에 퍼진 원인이 되었다.
안장사에 들어선 김상옥의사는 아침밥을 짓고 있는 동승(童僧, 아기동자)에게서 설익은 밥을 얻어먹고, 주지 김봉암(金峰岩) 스님에게 승복을 얻어 입고 여승의 모자를 쓰고 집신을 거꾸로 신고 급히 산길을 내려와, 왕십리에 한문을 가르쳐주던 이노인 댁에 들러 버선과 신을 갈아 신었다.
그는 시주하는 스님의 모습으로, 마침 나무를 싣고 가는 마차를 의지하여 일경의 삼엄한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효제동 73번지에 사는 반가운 동지 이혜수의 집에 들어선다.
여성 신분의 이혜수는 애국부인 단원들과 함께 독립자금을 모아 김상옥을 통해 상해로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동상이 걸린 김상옥을 위해 약을 사오기도 하고, 일경에게 쫒길 때 장충단 공원 돌다리 밑에 묻어둔 권총 두 자루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다 주었다.
한편, 장충단 공원 부근에서 발자국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일경은 동대문 부근을 뒤지며 김상옥의 원근 친족들을 가리지 않고 끌어다 심한 고문을 하며 수색망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21일 정오쯤 동대문 경찰서 형사 무리가 동지 전우진을 체포하여,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인 ‘미와(三輪), 요시노(吉野)’가 직접 고문하도록 하였다. 우체부인 그가 상해에서 김상옥 앞으로 온 비밀편지를 배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밤 8시부터 시작된 고문은 매를 비롯한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행해졌으며, 이를 견디다 못해 전우진은 김상옥의 은신처를 고백한다. 후일 김상옥의사 서거 후, 미와 형사는 김의사의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다운 기백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을 표하며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런 일을 모르는 김상옥의사는 그날 밤 정설교(鄭卨敎) 등 몇 사람의 동지들을 모아 이혜수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의논했다. 동지들은 그에게 상해로 피신하기를 바랬으나, 그는 이왕 입국한 이상 목숨을 걸고 중대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 뜻을 주장하였다.
1월 22일 아직 날이 밝기 전 새벽 3시였다. 효제동 73번지 이혜수의 집에 김상옥이 숨어 있음을 확인 한 일본 경찰은, 서울 4대(동대문, 종로, 서대문, 본정)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채소밭 속에 섬과 같이 5~6채만이 있는 서 있는 새로 건축된 집이었다. 김상옥 1명을 잡기 위해 철통같은 경계 진을 배치했는데, 제1진은 권총을 가진 형사대가, 제2진에는 장총을 든 집총대가, 제 3진에는 기마 순사대, 제4진에는 헌병대와 자동차대의 순서로 배치해서 겹겹이 둘러쌌다.
이때 동원된 경찰의 총 수효는 1천여 명이었고, 그 중 근접 포위에는 5백명이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전쟁 1선에서 적의 대부대를 포위하고 일대 접전을 전개하려는 순간처럼 긴장된 태세를 신속하게 기민하게 갖추었다.
새벽 5시가 되어 일어난 이혜수의 동생 이창규의 눈에는 새까맣게 둘러싼 일경이 눈에 보이자 놀라며 누나를 깨운다. 이혜수는 김상옥의사를 깨우며, “김동지! 경찰들이 몰려왔어! 어서 피하시오!”
이혜수의 부친 이태성 노인이 밖에 나가자, 형사들은 노인의 빰을 갈기고 발길질을 하며 그를 포승으로 묶었다. 삼판통의 비호같은 김상옥을 기억하며 덜덜 떨면서 방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 ‘구리다(栗田)’ 형사는 김상옥의 탄환에 그대로 쓰러졌다.
뒤따르던 일본 앞잡이 형사 김창호 등 형사대는 마당으로 소리지르며 나동그라진다. 이때 일경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니, 효제동 일대는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했다. 김상옥의사의 사격술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벽을 뚫고 담을 뛰어넘어 비호같이 여러 집을 넘나들며 여러 명을 쓰러뜨리는데, 문자 그대로 일기당천(-騎當千)의 단병접전(單兵接戰)이었다.
비호같은 그의 몸놀림과 총격 술에 일경은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김상옥과 3시간 이상의 총격전을 벌였고, 1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옆집으로 담을 넘을 때 동상으로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 김의사 사후 5일이 지나 현장검증에서 발견되었다. 옆집에 들어간 김의사는 주인에게 이불을 한 채 달라고 했다. 이는 몸을 피해가며 싸울 방패로 삼고자 했었다. 그러자 주인은 이불대신 “도둑이요!”라며 고함을 치자, 그 집으로 피신한 것을 모른 일경들이 그리로 몰려왔다.
“긴소오교꾸 잇삐끼니 곤나니 마욧데 도오스루까?(김상옥 하나에 이렇게 쩔쩔매서야 어떻게 하나?” 하며 분개하는 부지휘관 ‘후지모도’의 무차별 난사 지휘아래 일경의 총은 불을 뿜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김상옥은 심한 총격전으로 이제는 탄환이 단 한발밖에 남지 않음을 알았다. 그의 몸에는 여기저기 탄환이 박혀 있었고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몸에 박힌 총알만 10발이었다.
그는 34년의 생애를 짧은 생애를 원한도 풀지 못하고 마쳐야 하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나라를 잃은 설움의 시절, 가난했던 소년시절, 효도도 제대로 못해드리고 자신 때문에 고문만 당하신 어머니, 독립의 큰 뜻을 품은 남편을 두어 항상 불행했던 아내,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본 경찰의 폭행과 두려움 속에서 병들며 자라는 아들과 딸 등등.
“아버지, 가지마세요!” 라고 울며 붙잡는 어린 남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은 ‘일본의 만행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싸워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편안하게 사업이나 일으키며 남들보다 잘 살수도 있었지만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고 가족도 없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나라에 바친 그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다.
김상옥의사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끝까지 우리 민족의 위대한 혼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상옥의사는 눈을 감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아! 그는 나라의 독립과 조국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며 자신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상해를 떠나오면서 동지들에게 유언한 것처럼 장렬히 자결한 것이다.
숨이 끊진 후에도 그의 두 손은 쌍권총을 잡고 있었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일경은 무서워 접근하지 못했다.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된 그의 장례식에는, 몽둥이와 총으로 무장한 삼엄한 경찰 때문에 조객이 없어 쓸쓸했지만 저녁 무렵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수명의 학생들이 호곡(號哭)하며 그의 영혼을 위로했었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이처럼 단신으로 수백의 무장경찰들을 긴장시키며 3시간 이상 홀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한 것은 일제 36년사에 김상옥의사 외엔 없었다.
언론인 유광렬씨(柳光烈)는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흘러서 그 이듬해인 1924년의 봄은 이 불행한 가정에도 찾아왔다. 한식(寒食)에 사초(莎草)를 하여 놓은 무덤에 정진주 아내는 제사음식을 머리에 이고 소복을 한 대로 앞서면서 남편을 부르고, 육순의 늙은 시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가면서 아들을 부르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부르며…마음껏 울던 광경도 어제같이 눈에 선한데”라는 글로 슬픔에 젖어 있는 유족들의 모습을 ‘한국일보’에 쓴 바 있다.
김상옥 의사가 펼친 세 차례의 서울 시가전은 일제 식민지 치하 서울 한복판에서 펼친 유일무이 시가전이었다. 1908년 일제가 우리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남대문 일대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바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시기였다.
더욱이 시기적으로 3.1운동 3년여 뒤의 일이라 당시 일제가 바깥 세상에 대하여 3.1운동을 평화적으로 진정시킨 양, 기만 선전한 것을 폭로한 쾌거였으며, 일제의 식민통치 심장부인 서울 한복판에서 벌인 ‘대의거'였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혁혁한 전과에 비견되는 자긍심 넘치는 ‘보배로운 승리의 대전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항일 사적 가운데서도 서대문 형무소 자리가 ‘서쪽에 있는 민족의 수난처’였던데 비하여 김상옥 의사의 ‘효제동 승전’은 “동쪽 승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