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독립투사..."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다"

People / 김영실 박사 / 2013-07-10 14: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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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헐버트 박사(Dr. Homer Hulbert)
▲ @Newsis
[일요주간=김영실 박사]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철학은 그 나라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학도들이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에게 고문역할을 한다. 미래의 설계를 계획하고, 그 나라 민족정신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는 역사와 철학은, 학교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깊이 논의되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나라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자유와 부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의 자유를 위해 숭고한 삶을 살다 가신 선인들을 잊고 방종 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밝은 미래는 없다. 나라를 위해 젊음과 생명과 재산까지 다 바치신 그들을 기리며 마음을 모아 깊이 머리를 숙인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1863.1.26-1949.8.5) 그는 누구인가?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버몬트(Vermont) 州에서 태어난 그의 가정은 교육자의 집안이었다. 아버지 칼빈 헐버트(Calvin Hulbert)는 목사이며 미들베리(Middleberry) 대학총장이셨고,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Mary Woodward) 여사는 다트머스 대학(Dartmouth College) 창립자의 후손이셨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헐버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도덕성과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부모에게 배웠으며,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고상한 인품을 키워갔다.

헐버트는 1884년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New Hampshire) 주에 소재한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유니온장로세미너리’(Union Presbyterian Seminary)에서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그해 여름 아버지 친구인 미국 교육장관 이튼(Eaton)으로부터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헐버트는 어려서부터 세계 지도의 작은 자락인 ‘코리아'를 가슴에 두고 있었기에 자진해서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다.

그를 포함한 2명의 선교사 길모어(Gilmore)와 벙커(Bunker)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때를 기다리다가,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 자격으로 제물포 땅을 딛고 그 날로 서울에 도착한다.

육영공원이란 1883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고종황제의 허락 아래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가 세운 근대식 국립학교로 양반집 자녀들과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1886년 9월 23일 35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으며, 영어를 주로 가르쳤으나 각국의 언어와 역사, 정치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재정의 어려움과 학생들의 공부하고자 하는 열의가 부족하여 1894년 폐교에 이르게 되고, 후엔 한성영어학교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헐버트는 계약기간이 끝나는 1891년까지 육영공원에서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뛰어났으며, 한국어를 ‘가장 완벽하고 과학적인 음성언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역사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고종황제도 그를 몹시 좋아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의 교재용 ‘사민필지(士民必知)’ 세계 지리서를 만들어서 한국 청년들에게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1888년 9월 18일 뉴욕에 위치한 은혜장로교회(Grace Presbyterian Church)에서 메리 한나(Mary Hanna)와 결혼을 하고, 1891년 육영공원과의 계약이 끝나게 되므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893년 헐버트는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돌아왔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았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 사건(春生門 事件)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1월에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을 지원하였고, ‘코리아리뷰’(The Korea Review)를 창간하여 제2차 만국평화 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하는 활동도 담당하였다. 영문잡지인 ‘코리아寶庫’('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코리아리뷰’를 통해 한국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또한 헐버트 박사는 YMCA의 창설과 초대회장을 맡아 일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근대적 사회개혁 의식을 가르쳤고, 러일 전쟁 후 일본의 만행을 보면서 ‘워싱턴 밀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가서 일본 침략행위를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등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해 애썼으나,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1906년 다시 내한하여, 1907년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이준, 이동휘, 김구 등에게 전하고 헤이그 밀사의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헤이그 밀사 3인과 함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불어로 번역된 호소문은 언론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참가자격을 얻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헐버트는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9년 광복 후,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국빈 자격으로 다시 찾았던 그는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뜨게 된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여, 8월 11일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었다. 130년 전, 미개했던 코리아를 위한 그분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무지한 민족을 깨우려 했던 도전정신과, 역사와 한글을 위한 놀라운 창의력, 그리고 일제의 압제 하에 시달리는 이 민족을 위해 혼을 다해 싸워주신 그 분의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유산이다.

정부에서는 1950년 3.1절을 맞아, 외국인 최초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다. 1999년 8월, 헐버트 박사의 50주년 추모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필서로 ‘헐버트 박사의 묘’라고 묘비에 새겨 넣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우리의 영원한 독립운동가 헐버트 박사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영정 앞에 감사의 마음을 올려드린다.

헐버트 기념사업회(www.hulbert.co.kr)의 김동진 회장은 그를 기념하는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를 집필하여 교육자이며 역사학자요, 언론인이며 한글학자였고, 선교사며 황제의 밀사, 그리고 항일독립운동가인 헐벌트 박사를 역사를 잊어가는 이 시대를 위해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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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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