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광해, 왕이 될 수 없는가!

칼럼 / 황천우 작가 / 2013-07-24 15: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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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우의 역사에세이
[일요주간=황천우 작가] 조선조 왕들을 살피면 시호를 지니지 못한 두 사람의 군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11년 간 보위에 앉았던 연산군이고 다른 이는 무려 15년 간 임금이었던 광해군으로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실각했다.

반면에 왕의 자리에 올라보지도 못한 인물들이 왕의 시호를 받은 사례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을 필두로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 정조의 양부인 진종, 정조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 즉 장조 그리고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이 그들이다.

한편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 임금 자리에는 앉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왕으로 기록되는 반면 보위에 앉아 일순간을 풍미했던 두 사람을 군으로 격하시킨 일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이와 관련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보자.

먼저 고려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경우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정략적으로 보위에 올랐으나 후일 조선이 건국되자 간성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된다. 이어 삼척으로 옮겨졌다 사사되는데 역사는 그를 엄연히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우왕의 경우다. 폭군으로 따지면 결코 두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거기에 더하여 이성계의 주장에 의하면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로 적통성의 문제도 함께 지니고 있다. 후일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지만 역사는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 조 단종의 경우도 예로 들 수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 가고 급기야 서인으로 전락하며 사사되지만 후일 역사는 그를 자연스럽게 단종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연산군과 광해군은 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 사유에 대해 사람들은 폭군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특히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 연산군은 두 숙의와 인수대비 등 그리고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죽이려한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사유 때문에 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비교하여 살피면 태종 이방원 그리고 수양대군 세조도 그들 못지않기 때문이다.

태종은 포은 정몽주를 포함하여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도전, 남은 등을 위시하여 이복동생들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후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빌미가 되어 네 명의 처남을, 또한 단순히 경계 차원에서 상왕으로 물러난 시점에도 자신의 사돈 심온(소헌왕후의 아버지) 등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수양대군 역시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 과정에서 태종 못지않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김종서, 황보인, 성삼문, 박팽년 등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세종의 부인(혜빈 양씨), 안평과 금성대군 등의 동생들 그리고 단종까지.
이뿐만 아니다. 영조의 경우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이기까지 했다.

실상은 이러한데 연산군과 광해군의 반 인륜적 행위만을 빌미로 삼는다면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군으로 지칭되는 사유를 권력에서 찾아야할까. 두 사람 공히 반정을 통해 권력을 빼앗긴 때문이라고. 그러나 상기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고려의 우왕과 창왕도 그러한 경우였다.

상기의 사례를 살피면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금이었던 그들을 군으로 격하시킨 부분이 역사적으로 옳다고 간주할 수 없다. 특히 광해군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판단할 일이다.

광해는 재위 시 백성들을 위해 경기도에 대동법과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나라의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자 이에 대비하여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능란한 중립 외교 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이어 임진란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외교를 재개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돌아오도록 했다. 아울러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 ·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 ‘선조실록’ 등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무주 덕유산)에 사고를 설치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여 광해군에 대해서는 색다른 생각, 정비의 소생이 아니었기에 군으로 강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성군 중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영조를 생각하면 그 역시 편파적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빈 최 씨로 숙종의 다섯 번째 부인이며 미천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경우 여타의 사례와 비교해볼 때 하등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여 그에게 시호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만의 독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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