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들 장이 며느리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로 시선을 돌려보았으나 목석처럼 서 있는 큰 아들 내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인, 이러지 말고 자초지종을 말씀해 보시구려!”
“우선 자리하시죠, 대군.”
수양대군이 얼떨결에 정희의 요구대로 자세를 바로하고 자리에 앉자 정희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에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소헌왕후와 세종임금과의 대화 그리고 점괘 등 일련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물론 정희 자신에게도 왕의 괘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를 듣는 수양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경련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모종의 확신에 대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말을 마치자 수양이 정희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만나 번쩍이고 있었다.
“부인, 이리 가까이 오시오!”
단순히 서방님의 말투가 아니었다. 군왕의 위엄이 한껏 서려있는, 절대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부인, 나 역시 그러한 연유로 인해 모종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소.”
수양대군의 얼굴을 주시했다. 서방님의 모습이 대단하게 보이면서도 한편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남 모르게 그 일을 준비 했는데 이미 서방님도 나름대로 그와 관련해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까지 진행 중에 있습니까?”
수양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밖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아들과 며느리가 조치를 취해놓았으니까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수양이 정희의 손을 잡았다.
“이미 일부 종친들과 대신들이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종친들이라고 하시면?”
“백부이신 양녕 대군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양녕 백부께서는 당신을 끔찍이도 생각하시니까요. 그러면 형제들은요?”
순간 수양의 입에서 끙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안평이 문제가 될 듯하오.”
“안평 대군께서요? 아니 그 분이 무슨 사유로.”
“그러니 답답한 일 아니오. 아마도 저들 간신들의 놀음에 놀아나는 모양인데 이 친구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소.”
“동생인데 한 번 설득해보시지 그러세요.”
“설득은 고사하고 안평이 앞장서서 나를 경계하는 모양입니다.”
서방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미 세종임금이 돌아가시던 시점에 서서히 활동을 시작했다. 왕권 약화를 우려한 백부 양녕 대군 또 일부 대신들에 의해 전횡되고 있는 권력에 대해 심하게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서방님은 정희와 비교할 때 목적 자체가 달랐다. 정희는 본질에서 출발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의 경우는 기왕의 체제는 인정하면서 거기에서 해법을 찾고자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가벼운 논쟁이 일어났다.
“부인의 심정 충분히 이해하오. 그러나 그 부분은 한번 두고 봅시다.”
“대군,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현 체제를 그냥 두고 무늬만 바꾼다면 그는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본질을 염두에 두시고 일처리를 함이 바람직하옵니다.”
정희의 말투가 간절하자 수양대군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방식이 정답이라면 그리해야지요. 일단은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그때 가서 일처리를 하도록 합시다.”
수양대군, 밖에서는 그리도 호탕하고 자신의 주관을 명확하게 유지했으나 정희 앞에만 서면 약해지고는 했다.
“부인, 차라리 부인이 정치를 하는 편이 나을 듯하오.”
말을 그리해놓고는 수양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를 바라보던 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들 장과 며느리 인수가 수양의 웃음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정희의 안도하는 표정 때문인지 표정이 결연했다.
“이리 들어들 오거라.”
방에 들어선 아들 내외에게 앞으로의 일 전개에 대해서 마음을 다잡으라고 거듭 다짐을 시켰다.
고명사은사
수양이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 사랑채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안채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 자리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무엇인가로 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군,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계세요?”
수양이 자리에 멈추어 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정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무슨 일이에요?”
재차에 걸친 질문에 수양이 눈을 깜빡였다.
“명나라에서 세자의 왕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지 않았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사은사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정 생각이 그러하시면 다녀오시면 되는 일이 아닌지요.”
“내 생각도 그런데 참모들은 가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요. 모종의 계략이 숨어 있다고 말이오,”
“계략이라니요?”
“나를 명나라에 보내 놓고 저들이 뭔가 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인 모양입니다.”
“저들이 일을 도모한다......대군도 저들이 일을 도모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사실 저들이 일을 도모하리라 생각하지 않소. 그런데 하도 만류를 하는 통에.”
“한명회 대감도 그리 이야기하십니까?”
“한명회......대감이라......”
일개 야인에 불과한 한명회를 대감이라 호칭하자 수양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이 그 사람 머리에서 나온 생각 아니오. 그러니 내가 이리 고심하는 것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대감께서 너무 세심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대군께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신다 하심은 바로 임금의 명에 의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의 명을 수행하는 대군을 누가 무슨 명분으로 내치겠다는 말입니까? 그 일은 바로 임금의 명을 저버리는 크나큰 죄악 아닙니까? 또 대군이 누구입니까? 임금의 고명을 받드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저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어느 누가 그런 큰일을 도모하겠습니까?”
“명분이라 하였소?”
“지금 대군께서 사사로운 일로 명나라를 가시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조선의 사직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두고 누가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그럼 부인의 말은 저들이 전혀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 이 말이지요?”
“대군, 저들이 정녕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이 왕위를 바라겠습니까? 아니지요. 저들은 그냥 알량한 권력, 자신들의 조그마한 이익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그런 경우라면 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려 할까요?”
“그래서 부인은 저들이 누리는 이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까?”
대답 대신 웃음을 머금었다. 수양이 그 모습을 바라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편안히 했다.
“아무 심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저들이 가지 말라고 해도 나서서 다녀오십시오. 대군께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취할 수 있는 일인데 어이 주저하신다는 말입니까?”
“두 마리 토끼라니요?”
“첫째는 안평 대군과 김종서 대감 등에게 대군께서 현 임금에게 충성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드리면서 그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명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대군께서 직접 다녀오셔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말인 즉?”
“사돈어른이 있지 않습니까. 명나라 왕실에 있는 사돈 식구들을 통해서 명나라와의 유대관계를 확실히 해두면 유사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이 말입니다.”
“부인에게 그런 깊은 뜻이 있어서 내가 삽니다.”
아침에 수양대군과 아들을 입궐시키고 나서 며느리 인수를 불렀다. 시아버지 수양대군의 일과 관련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길 나설 것을 주문했다. 인수도 곧 정희의 말을 새겨들었고 곧바로 길 나설 차비를 마치고 시어머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난 저녁 서방님에게 말은 그리 했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대감의 경우가 생각난 때문이었다. 심온 대감께서 고명사은사로 화려하게 길을 떠나셨다가 돌아오는 길에 역적으로 몰려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그 경우를 생각하며 태종임금과 지금의 어린 왕을 비교해보았다. 어린 왕이 여하한 경우라도 제 삼촌을 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나 간계를 부릴 수도 있다는 조그마한 염려가 들었다.
또한 서방님의 안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힘겨루기의 절정의 단계에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확고하게 명분과 힘의 우위를 유지해서 서서히 일을 마무리 지어가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다짐이 일어났다.
인수를 앞세워 도착한 곳은 인수의 친정 한확 대감댁이었다. 기별도 없이 이른 시간에 찾아온 사돈 정희와 시누이 인수의 방문에 조 씨 부인이 조금은 의외라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리도 서둘러 방문한 사유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맞이했다.
조 씨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희 역시 얼굴을 온화하게 했으나 드리워져있는 결연한 기운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를 감지한 조 씨 부인이 느긋하게 정희와 인수를 별채로 안내했다.
방에 자리를 잡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오늘 사돈댁에 긴한 말씀드리고자 염치 불구하고 기별도 없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조 씨 부인이 조용하게 정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마치 정희가 찾은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정희 역시 그를 감지했다. 자신의 성급함에 가볍게 몸을 움찔거리고는 차와 다과를 들며 담소를 나누어나갔다.
“대부인 마님, 대군 마님께서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신다고요?”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한순간 조 씨 부인이 정희가 방문한 핵심을 파고들었다.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조 씨 부인은, 인수의 아버지인 한확 대감께서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 일로 이리 경망스럽게 찾아뵈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그 일로 아버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요?”
정희의 뜻을 인수가 알아챈 모양이었다. 인수가 대신 나서고 있었다.
“그래요, 아버님께서 그와 관련해 손을 쓰기로 하셨으니 시누이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에요.”
![]() | ||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