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 이주농민 아들로 출생… 탁월한 항일 투쟁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지난 2012년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이자 한중수교 20주년의 해였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은 일제 강점기 때 만주벌판으로 혈혈단신 건너가 한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살아남아 중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에 <일요주간>에서는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한민족의 역량과 자질을 유감없이 빛내온 조선족의 인물 특집을 장기 연재 시리즈로 기획했다. 독자 제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주덕해는 세계 속 특히 구소련의 영향 속에서 중국혁명이란 역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지역이란 특수한 사업 환경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방침을 충실히 집행하면서 조선족의 근본이익을 대변하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이어왔다.(김혁, ‘주덕해의 이야기’ 著者)
2011년 4월 2일 중국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州長)을 지냈던 주덕해(朱德海)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성대히 열렸다. ‘쑨’ 길림성(吉林省) 서기는 "혁명 전사이자 걸출한 조선족 간부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연변 여러 민족의 단결과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주덕해 주장을 평가했다.
‘덩 연변주 서기’도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초대 주장으로 일하면서 사회 발전과 민족의 단결을 위해 헌신했다."며 "조선족 자치주 건립과 발전에 앞장섰던 그의 숭고한 정신은 연변이 거듭 발전하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그의 공적을 높이 치하했다.
본명이 오기섭(吳基涉)인 주덕해(朱德海, 1911.3.5~1972.7.3)는 1911년 음력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우쑤리스크 부근의 ‘도베아’라는 산간마을에서 한 가난한 조선족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적(原籍)은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 복색동이였다.
이곳은 역대 중국 왕조의 관할이었으나, 1860년 ‘중로북경조약’ 체결의 결과로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또한 이곳은 가난에 못이긴 조선의 이재민들의 이주가 시작된 첫 번째 지역이기도 하다.
오기섭은 1918년 8살 되던 해 부친 오세우(吳世寓)가 비적(匪賊)들한테 피살되자 고향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잠시 귀환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1920년 2월부터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수동촌에서 소년기를 보내면서, 1925년 화룡현 공립 14소학교를 수료하였다. 1927년 고려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연안(延安)과 하얼빈 등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주덕해는 일제가 패망하자 1946년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최초의 조선족 학교인 '창즈(尙志) 조선족중학교'를 세우고 1949년에는 연변대학교를 개교, 초대 총장을 맡아 조선족 교육 발전에 헌신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립되면서 초대 주장에 취임하였으며, 길림성 부성장도 겸하였다.
이렇듯, 주덕해는 다방면에서 56개 민족 중 탁월한 일원인 중국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제반 사업 기반 구축에 전심전력을 다하였으며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조선인 中건국 지대한 공로 국적과 토지소유권 부여 주창
1952년 9월3일 새역사 ‘연변조선민족자치주’ 산고끝 태동
● ‘연해주에서 출생’ 항일투쟁 젊음 불살라
19세기 70~80년대를 전후하여 함경북도와 평안북도로부터 이재민들이 끊임없이 연해주에 밀려들었다. 1902년 연해주 관청에 등록한 조선 이주민들은 무려 3만2천4백여 명에 달하였다.
두만강을 넘은 조선의 가난한 이주민들은 매서운 혹한으로 벼농사가 어려운 지역임에도 수로를 관개해서 불모의 땅에 벼꽃을 피워 냈다. 주덕해의 아버지 오우서는 이곳에서 먼저 자리 잡은 7촌 숙부의 알선을 받아 도베아촌에 사는 러시아인의 밭을 소작으로 받아 가까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오기섭이 8살 되던 해 이곳에서 근 10년간 살고 있던 부친 오세우가 불행히도 토비들에게 살해되었다. 살길이 막연한 그의 어머니는 원 고향인 조선 회령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향에서도 막막하여 이듬해인 1920년 2월에 일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오기섭은 어머니와 세 삼촌을 따라 화룡현 수동촌(現 룡정시 지신향 승지촌)에 와서 정착하였다.
소년 시절 오기섭은 매우 어려운 불우한 환경을 보냈다.
늘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며, 어머니가 뜯어온 산나물과 들나물로 보릿고개를 넘겼고, 엄동설한에도 노닥노닥 기운 홑저고리와 바지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게다가 가정의 큰 일군이었던 둘째 삼촌마저 세상을 뜨면서 극도의 가난에 4학년까지 다니고 월사금(月謝金)을 물수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청년으로 성장한 주덕해는 흑룡강성의 동녕, 동경성, 림구, 밀산 등 북만일대에서 항일에 투신하면서 1931년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초 주덕해는 사흘 앞으로 다가온 혼사마저 물리친 채 김광진 등 반일지사들과 함께 일제와의 무장투쟁에 매진하기 위해 룡정을 떠나 북만으로 향하였다. 1930년부터 1936년 사이에 주덕해는 흑룡강성 녕안, 밀산, 벌리 일대를 누비면서 원흉인 일본 관동군에 맞서 청춘을 불살랐다.
오기섭이 주덕해로 이름을 바꾼 연유에는 다음의 사연이 전해온다. 1942년 겨울, 항일부대는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산속에서 얼어터진 산열매와 나뭇잎을 먹으며 적과 싸웠다. 어느 하루 주덕해를 포함하여 네 사람은 공교롭게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제 주덕해 한 사람만 남았다. “이젠 영락없이 죽었구나” 하고 주덕해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려는 찰나, 키 큰 부녀자 한명이 사람들 속에서 달려 나오며 “이 사람은 내 남편이예요!”라고 곱씹어 외쳤다. 일본군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마을사람들한테 거듭 확인했고 한결같이 “맞다.”는 확답을 받은 뒤에야 주덕해를 풀어주었다.
주덕해는 자신을 구해준 키 큰 여인의 하늘같은 은덕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려고 주씨 성을 쓰는 그녀의 성씨를 받아 이름을 오기섭으로부터 주덕해로 고쳤다.
그동안 투쟁의 선두에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수시로 이름을 바꾸며 일제와 맞섰던 주덕해는 강도일, 김도순, 오동원, 오영일등의 가명을 써왔었다. 이후로 오기섭은 더 이상은 이름을 바꾸지 않았고 주덕해라는 이름은 그의 발자취와 더불어 계속 불리게 되였다.
남다른 혜안 소학교 중학교 건립, 연변대 설립해 인재 양성
농업전문인 연변새벽대학과 문화요람 ‘연변예술학교’ 세워
● 역사적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세우다
주덕해는 재중국 조선인은 중국 공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일관된 주장을 명료하게 펼쳤다.
“그는 재중국 조선인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와 중국대륙의 땅을 개척하고 수호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인이 헌신한 피의 땀의 대가가 크다.”
주덕해는 혈연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조선인의 모국이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중국은 조선인의 조국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 기반하여 주덕해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조선족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연변 땅에 몰려있는 동포들이 정치의 평등을 실현하고 경제의 번영을 구가하며 문화면에서 자신의 고유한 민족문화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이 힘겹게 개척한 이 땅에서 조선 민족의 위치를 견고하게 하자는 확고한 구상이었다.
주덕해는 연변의 급변하는 정세를 통찰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설립할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확신하였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가 북경에서 열렸다. 주덕해는 조선족을 대표하여 참가했다. 이 회의에는 각 당파, 인민단체, 각 민족 대표 662명이 참가했다.
동년 9월 29일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 채택된다. 강령은 “여러 소수민족의 집거지구에서는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바, 민족집거구에서의 인구의 다소(多少)와 구역의 대소(大小)에 따라 각각 민족자치기관을 건립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회의에서 주덕해는 “동북의 벼농사는 조선인이 개척했고, 항일과 해방전쟁의 승리에는 조선인 피의 대가가 크다.”면서 중국 조선인들에게 중국 국적과 토지 소유권을 부여할 것을 적극 건의했다.
주덕해가 연변에서 가장 고심한 문제는 재중국 조선인들의 국적문제였다. 동북 농촌에서 전면적으로 토지개혁을 하면서 재중 조선인에 대한 국적문제가 암초처럼 떠올랐다. 외국인에게는 토지소유권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국적과 토지분배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격이었다.
이로부터 3년여가 경과된 1951년 가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2주년을 즈음하여 ‘중국연변지위’는 주덕해동지를 주임으로, 동옥곤동지를 부주임으로, 최채동지를 비서장으로 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준비위원회’를 인준했다.
드디어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구역자치실시요강’이 발표된 12일후인 8월 21일에 연변 각계 인민대표회의주비위원희의가 연길에서 열렸다. 이어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300여명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연길시 인민극장에서 열렸다.
제1기 각계 인민대표회의에서는 ‘연변조선민족자치주 인민정부’를 성립하고 ‘자치주인민정부조직조례’와 ‘민족 단결에 관한 결의’를 통과한 후 제1기 인민정부주석, 부주석, 비서장 등을 선거하였다.
주덕해가 제1기 연변조선민족자치주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부주석으로는 동옥곤(董玉昆), 최채(崔采)가, 비서장으로는 곽명광(?明光)이 그리고 전인영(田仁永), 요흔(姚昕) 등 32명이 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연변조선민족자치주성립기념일로 규정하였다.
이윽고 9월 3일, 연변의 각계 인민 3만여 명이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변조선족 자치주 인민정부’가 성립되었다. 자치주 산하에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인구는 도합 85만4천명이었다. 그중 조선족이 53만 명으로서 62%를 차지하였다.
'자치주 인민정부' 주석 주덕해가 ‘연변조선민족자치주인민정부창립’을 선포하자 대회장은 환호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쪽박 차고 눈물의 두만강을 넘고 한숨의 오랑캐령을 넘어온 족속, 불모지에 뼈를 심고 살을 파묻어 벼꽃의 신화를 피운 족속, 전화가 타오르던 처절한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나날에 이 땅에 진붉은 선혈을 바쳤던 족속, 그 민족이 드디어 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되였다.”
이날 연길시 거리는 명절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 골목과 거리마다엔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주민들이 북장고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면서 자치주 성립의 날을 경축했다. “에루화 저절시구 좋구나 좋네 /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 연변조선민족 자치주 세웠네”
조선족 공민들은 작곡가 김성민이 작곡한 노래에 맞추어 북장고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조선족 자치의 숙망을 담고 자치주 창공에 널리 울려 퍼졌다.
바로 이것이 오늘 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석으로, 원래 명칭은 ‘자치구’였으나 1055년 12월 20일 ‘자치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여기에서는 시점을 탈피하여 자치주로 통일한다.

1978년 복권, 2011년 탄생 백주년 맞아 대업적 중점 조명
● 교육과 농업, 문예와 언론에 초석쌓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으로서 주덕해는 마치 섬세한 화가마냥 미래의 연변의 모습을 세부적으로 그려나갔다. 주덕해의 힘찬 붓터치에 새연변이라는 화폭은 굵게 커다랗게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주덕해의 교육열은 남달랐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이다.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관건은 교육에 있다.” 주덕해는 교육으로 민족부흥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각 지에 학교부터 세웠다. 주덕해의 혜안에 힘입어 이미 1946년부터 1947년 사이 북만 조선인들은 토지를 분배받고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다. 조선인들이 밀집된 고장에서는 중학교까지 선보였다.
1948년 7월 20일에 거행된 조선인간부학교 개학식에서 교장 주덕해는 동북 각지에서 선발되어 온 150명 학생들에게 “학습을 잘하여 인민의 훌륭한 근무원이 되어달라.”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다. 주덕해는 간부학교에서 ‘당의 건설’ ‘민족정책’ 등 과목을 직접 강의하였다.
1949년 봄! 주덕해는 중국연변지위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전근하였다. 동년 2월 그가 연변에 와서 손을 댄 첫 사업은 ‘동북조선민족인민대학’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주덕해는 연변에서 ‘조선족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인재양성이라고 여겼다. 주덕해는 민족자치의 원대한 구현을 위해 ‘연변대학’ 설립을 기획하였다. 비록 연변조선민족자치주 성립이전이지만 주덕해가 중국에서 첫 소수민족대학을 창설한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1948년 12월,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였을 때 주덕해는 대학의 태동을 건의했고 임춘추, 문정일, 로기순, 로승균 등과 연변에 민족대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드디어 1949년 4월에 조선족들의 엘리트 산실 ‘연변대학’이 개원하기 이른다.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바, 교육자로 존경을 받아온 임민호 선생은 연변대학교 초대 부총장으로 활동하며 연변대학이 민족대학으로 발전하는데 탄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연변대학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연변의 당정기관 특히 문화, 교육 분야의 간부 대부분은 연변대학 졸업생들이었다.
연변대는 지금까지 13만여 명을 배출했으며 졸업생 중 2만여 명이 한국에 진출하여 있다. 2만여 명 중 한국인 유학생 5천명을 빼고는 약 1만5천명이 기업과 학계 법률계 등 한국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조선족 교포다.
이어 주덕해는 전문농업일군의 양성을 모토로 농업전문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0년대 중국의 전반의 경제는 회복단계에 진입했다. 농업은 국가경제의 토대라는 것을 간파한 주덕해는 연변의 농업발전을 대업으로 삼기 위한 혁신적 대안을 제시했다.
과학적 영농에다 이에 필요한 전문기술일군들을 양성하기 위해 주덕해는 집단농장의 대표인물인 김시룡을 도와 연길현 동성에 ‘연변새벽대학’을 세웠다. 농민 스스로 세우고 운영하는 첫 대학이라는 특성으로 이 대학은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주덕해의 업적중 하나는 척박한 토양에 중국 최고의 ‘사과배’의 산실을 이룬 것이다. 민둥산에서 과수농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주덕해는 우선 룡정 서산언덕에 시험적으로 사과와 배묘목을 옮겨 심게 하였다. 몇해 후에 ‘연길현’ 소재의 과수농장은 모아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룡정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비암산 고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면적을 가진 과수농장으로 발전되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가 되는 이 농장에서는 사과와 배를 주로 재배하면서 조선양리, 연광리, 명월리, 단배, 팔배 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많은 품종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중 사과와 배를 접목시킨 ‘사과배’는 연변의 명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께서는 과일을 보면 연변의 사과배와 비교하셨으며 또 호북(湖北)의 늦벼는 연변의 입쌀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걸으면서 쉼 없이 얘기하셨다. 호북에 있는 것이 연변에는 있는지? 만일 연변에 없다면 언제면 연변에도 있을 수 있을까? 호북의 것이 좋은가 아니면 연변의 것이 좋은가? 무슨 물건이든 모두 연변의 것과 비교하셨다."
이는 주덕해동지의 딸 오영채가 아버지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쓴 ‘아비지의 연변감정’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
다음으로 주덕해는 조선족의 문예예술부흥에도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주덕해는 연변가무단의 부단장 조득현과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였다. 주덕해와 조득현이 의기투합한 가운데, 문예일군들을 양성하는 학원을 세우려는 제안이 비준되어 1957년 10월에 ‘연변예술학교’가 산고 끝에 태어났다.
연변예술학교는 성악, 무용, 작곡, 미술 등의 여러 학부를 갖춘 종합적인 예술학교로 거듭났다. 1980년대에 들어 길림성예술학원 연변분원으로 되여 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전문지식을 구비한 연변예술학교 졸업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의 우수한 예술의 자양분을 널리 알리며 확산시키고 있다.
주덕해는 교육사업 못지않게 문화건설에 정력을 불살랐다. 주덕해는 교육과 함께 특히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주덕해는 ‘민주일보’를 발간하고 문공단을 조직하였다.
“우리 민족은 자신의 언어문자를 가지고 있고 우수한 문화예술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황민화정책의 압제를 받아 문자는 취소당했고 문화예술은 처참하게 유린을 당했다.…우리의 신문을 발간하고 우리의 문공단(文工團, 문예공연단체)을 조직하여 문화유산을 발전시켜야 한다.”
1948년에는 ‘민주일보’사를 세웠다. 민주일보는 조선족 거주 지역에 널리 배포되면서 국내외 정세와 당의 방침, 정책들을 두루 알리었다. 또한 조선족 거주지구의 토지개혁운동, 공농업생산, 문화 교육사업 정황을 적극 보도함으로써 조선족 거주지구의 사업들을 활발하게 진척시켰다.
● ‘문혁에 온갖 고초’ 쓸쓸하게 삶을 마감
조선족의 걸출한 지도자! 주덕해의 리더십 하에 연변인민들이 위대한 국가 건설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문화대혁명이 촉발되었다. 1966년 12월, 동북의 '태상황'으로 불린 모택동 주석의 친손자인 ‘모원신’(毛遠新)이 한무리 반란분자들을 이끌고 연변을 접수하면서 연변의 하늘에는 진한 먹구름이 뒤덮였다.
모원신은 주덕해를 첫 투쟁대상으로 잡았다. 주덕해에 씌워진 누명은 '한사코 개조하지 않고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매국적, 독립왕국, 지방민족주의 등 열거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라는 것은 주덕해가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주장이였으므로 피할 수 없는 당연지사일 것이다. 당시 간부직에 있던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투쟁의 타도 대상이었다.
‘매국적’이라는 근거는 주덕해가 두만강 연안 양국 간의 자유로운 왕래의 통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변의 조선족은 거의 모두가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도 사람들이다. 이에 두만강을 사이 두고 혈육들이 갈라선 경우가 제법 많았다. 이들 혈육 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주덕해는 1955년 동북공안부에 제의하여 당지 공안파출소에서 변경통행증을 발급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이듬해 조선내무성과 협의하여 다섯 개 두만강 통상구를 만들었고, 16개로 늘렸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은 통행증을 받아서 조선(북한)으로 쉽사리 다녀올 수 있었다. 아침에 조선에 건너갔다가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냉면을 먹으러 조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영화구경도 갔다 왔다. 문화대혁명 시기 한때는 통상구가 완전 봉쇄되었지만, 이후에는 국경을 넘나드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
‘독립왕국’이라는 단견은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길림성과 대등한 지위로 올려서 독립하려고 했다.”는 억지 주장이다. 또한 1957년 연변예술학교를 세워 조선족 예술인을 양성하는 등 조선족의 권위신장에 노력한 것이 화근이 되어 ‘지방민족주의 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연변에서 갖은 수모와 탄압을 당한 주덕해는 1969년 호북성(湖北省) 중부의 강한평원(江漢平原)에 소재한 ‘53농장’에 내려가게 되였다. 주덕해는 그곳의 기계수리 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했고 사탕수수밭에서도 일했다. 모진 육체노동에 시달렸지만 식량도 매달 12kg 고작이었고 고기나 콩 기름은 아예 차단했다.
결국 주덕해는 폐암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약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1972년 병환에 시달리던 주덕해는 주은래총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것을 탄원했다.
주은래총리는 즉시 답장과 함께 약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병이 깊어진 주덕해는 “나는 길림에 돌아가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1972년 7월 3일 61세를 일기로 연변에서 수만리 떨어진 호북성의 유폐지에서 조선족 애도 속에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
'4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1978년 6월 연변에서는 “주덕해동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명예 회복의 관한 ‘중공연변주위 결의’를 채택하였다. 연변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진리를 견지한 주덕해의 공적이 불편부당 평가를 받게 되면서 드디어 원상회복된 것이었다.
1984년 5월 중국의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주덕해의 영원한 고향 연변을 찾았다. 호요방은 길림성과 연변의 주요지도자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주덕해 동지의 기념비 건립의 메시지를 던졌다.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생전에 ‘주덕해 동지는 훌륭한 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좋은 곳을 골라 기념비를 세웁시다. 잔디밭도 만들고 나무도 심어 유원지처럼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시오. 사람들이 늘 찾아와 주덕해동지의 업적을 기리도록 말입니다.”
호요방은 이렇게 훈시하고서 ‘주덕해동지기념비(朱德海同志記念碑)’라는 제사((題詞)를 친히 써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6년, 연변인민들의 각별한 애정이 진하게 스며있는 연길시 연변대학 서북쪽 산등성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주덕해의 서거 14돌이 되는 날인 7월 3일에 제막식이 열렸다. 사철 푸른 소나무 숲속에 높이 20미터의 웅장한 회백색 화강암건축물로 숙연히 솟았다.
‘장춘혁명열사릉원’에 안치되어 있던 주덕해의 유골은 2008년 4월, 가족의 뜻에 따라 길림성정부의 비준과 연변주 당위의 노력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연변 땅으로 봉환되었다. 주덕해기념비 뒤에 주덕해와 그의 부인 김영숙 동지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주덕해가 남긴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주덕해는 소박하고 인덕 있고 도덕성에서 극히 훌륭한 지도자이다. 말씀은 느리게 하고 조직력, 친화력이 뛰어나다. 주덕해는 아래 일군들에게는 위엄 있고 존경스럽고 말수 적고 쉽게 접근하기 힘든 상급이었고, 농촌 백성들에게는 농담 잘하고 허물없고 친숙한 이웃어른이었다.”
주덕해의 삶 자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으로 자치주 기반을 닦은 조선족의 지도자일뿐더러 사심 없이 제반 사업의 초석을 닦은 나라와 인민을 위해 공헌한 일생이었다.
주덕해는 오늘날의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제반사업 기틀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연변의 산천초목, 연변의 도시와 시골 도처에서 조선족들은 주덕해의 은덕과 체취를 느끼지 않은 곳이 없다. 주덕해는 정녕 연변의 사과배, 벼농사, 연변교육, 연변가무단, 연변의 신문출판방송을 총망라하여 오늘날 연변 조선족의 모든 삶에 알찬 씨앗을 뿌린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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