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가을 기다림..."자연의 덤덤하고 엄연한 순행(順行) 아직은 ‘이상무(異常無)’"

People / 육인숙 작가 / 2013-08-27 1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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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의 풍경소리(6) [일요주간=육인숙 작가] 땅에서는 귀뚜라미의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지요. 처서가 지나자 무더위로 지쳐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아침저녁으로는 생기가 돌고, 한낮의 도도한 햇살 사이로 차분하게 걸어오는 가을얼굴도 언뜻언뜻 보입니다. 산길을 산책하다보면 벌써 물을 내리기 시작했는지 나무 빛과 풀빛이 푸르죽죽하고, 깊은 밤 소란스럽던 매미소리도 어느새 귀뚜리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곧 한철의 푸름도 스러지겠지요. 산과 들은 알록달록 물들고 물소리 바람소리는 차가워지며 하늘은 맑고 투명한 얼굴을 드높이 치켜들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니 기상이변이니 지구 종말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어도 자연의 덤덤하고 엄연한 순행(順行)은 아직 ‘이상무(異常無)’인 듯 보입니다.

‘가을’ 하고 중얼거리니 어느새 입 안 가득 달달한 향기가 고입니다. 가을은 민트향을 닮았습니다. 꿀꺽 삼키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포만감. 창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아침바람에서도 두 팔 벌려 끌어안은 나에게서도 온통 민트초콜릿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구겨진 종이처럼 자고 있는 아이들이 때론 초콜릿 조각 같아 마구 빨아먹고 싶어지고, 때론 돌돌 말린 낙엽 같아 코를 벌름거리며 디밀기도 합니다. 책상 위의 책들도 한입에 털어 넣고 싶고 밤새 깨알을 심은 공책도 아기작아기작하면 민트향이 스미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집안 곳곳에서 민트초콜릿 냄새가 풀풀 나 혀를 날름거리며 눈 내리는 날 개 뛰듯 집안을 돌아다닙니다.

▲ @Newsis
어떤 날 아침에는 풀과 낙엽이 곰삭은 숲 냄새가 나고 어떤 날은 부두의 비릿비릿한 바다 냄새가 납니다. 어떤 날 아침은 엄마 무덤가에 앉아 있는 마음 같고, 또 어떤 날은 속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아이를 대하는 마음 같습니다. 어떤 날 아침은 여행 중 이름 모를 정류장에 앉아 바람과 이야기하며 차를 기다리는 기분이고, 어떤 날은 새벽 댓바람부터 상념의 꽁지에 불이 붙어 이리 콩닥 저리 팔딱거리다 넉 다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날 아침은 절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또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어수선하고 분주합니다. 어떤 날 아침은 세상 모든 일이 이해된 듯 마음이 넉넉해지는가 하면 어떤 날은 지나는 바람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시비하며 유난을 떱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그 시간이 그 시간 같은 하루하루 반 백 년의 생, 일만 구천 일이 사실은 모두 이렇게 달랐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지난 세월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인생 백 년이라 해도 삼만 육천 오백 일이고 팔십 칠만 육천 시간입니다. 걸핏하면 억, 억 하는 물리적 숫자에 무디어져선지 인생이 참으로 헐값이다 싶어 씁쓸합니다. 하지만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요, 소중한 인생을 물질적 혹은 물리적 개념으로 가감승제 하는 일은.

짧다면 짧고 길다하면 긴 36500일, 876000시간. 그 순간순간의 한 생각과 한 행동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지금의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인생도 어떤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아직도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우지 않고 생각 없이 망설이고 주저하고 게을리 한다면 하루하루가 지워지고 순간순간이 흘러가버려 남은 생마저 허덕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생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아픔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모두 내려놓으려 합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면이 어설프고 모자랐는지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잠시 접어두려 합니다. 내가 아닌 나와 내가 될 수 없는 어떤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으려 합니다. 여름과 함께 모두 지우고 게워 보내고 하얗고 텅 빈 마음만 준비하려 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리거나 쓰지 않은 그 마음 바탕 위에 남은 생 하나하나 새로이 그리고 색칠하려 합니다.

시간에 민감해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인간사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자주 되새기곤 합니다. 인정사정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이 그렇고 필연성을 지닌 숙명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삶이 선택의 연속인 것처럼 후회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도 곱씹게 됩니다. 그래서 자주 힘주어 말하곤 하지요.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내 자신을 허투루 대접하지 않으면서 살아내자고 말입니다.

천재(天才)보다 연습이 낫다고 말했던 연습 벌레 루빈스타인처럼, 새벽에 노래하는 새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리는 선수처럼, 그저 산이 좋아 오르는 등산가처럼, 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 썼다는 베케트처럼.

갈무리할 때가 다가와선지 마음이 쉬지 않고 들썩입니다. 오늘도 일터에서 돌아오면 가을 기다림으로 산책을 나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록달록 물들어버린 가을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지친 여름 다 불어 날리고 한마디만 담고 돌아와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멋지게 살아내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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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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