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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히 이야기해 보거라. 대감님도 지금 명나라에 가 계시거늘 집안에 이 무슨 변고란 말이냐!"
“어머니, 무수가......”
가만히 며느리의 얼굴을 주시했다. 다음 순간까지 기다리겠다는 무언의 암시였다.
“저년이 서방님을 홀려서 잠자리를......”
“무엇이라! 도원군과 잠자리를!”
순간 정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서방님을 유혹해서는......”
그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정희가 무수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갈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화약처럼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정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시선이 곤혹스럽게 변해갔다. 저들은 큰 마님이 출현해서 무수를 곤경에서 구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큰 마님의 얼굴이 변해가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차라리 나타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순간적인 바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감히 저 년이......저 년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는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는 한순간 한쪽으로 휘청거렸다. 곁에 있던 순임이 급히 정희의 손을 잡았다. 아울러 자리에 꿇어 앉아 있던 며느리 인수가 급히 몸을 일으켜 정희에게 다가섰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다가오는 며느리 인수의 팔을 잡았다.
“이것이 무슨 장난이라는 말이냐......”
바로 자신의 남편 수양대군과 덕중의 관계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수와 아들 장의 관계를 이르는 말이었다.
자세를 바로 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순임을 물리고 인수의 손을 놓고는 무수에게 다가섰다.
“지금 작은 마님이 한 말이 사실이렷다!”
피와 땀으로 얼굴이 흥건한 무수가 힘들게 눈을 뜨고 있었다.
“큰 마님......,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 년이 차마......”
더 이상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무수를 바라보던 정희의 시선이 무수의 곁에 서있는 하인들에게 향했다.
“청지기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당장 저년을 죽여서 이 집에서 쫒아내지 않고!”
순간 사방이 고요했다.
“청지기는 당장 저년의 주리를 틀어서 이 집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쫒아내도록 하라!”
이미 당할 대로 당한 무수를 바라보는 하인들의 시선이 곤혹스럽게 변해갔다. 그들의 동작이 굼떴다.
“당장에 저년의 주리를 틀라는데 뭐하는 것이냐!”
추상같은 명령에 무수의 곁에 있던 두 장정이 급히 움직여 무수에게 다가가서 주리를 틀기 시작했다. 무수의 신음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이미 당할 만큼 당해서인지 그 소리가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체념으로 인한 신음소리처럼 들려왔다.
순간 고개를 돌렸다.
“며늘아이는 당장 저년을 이 집안에서 내치도록 하거라! 다시는 이 집안에 얼씬거리지도 못하도록 해야 할 일이야!”
말을 마친 정희가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이 붉게 아니 파랗게 부풀어 오른 얼굴로 내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는 지속해서 무수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변고란 말이냐?”
내실에 들자 뒤를 따라온 순임에게 아니 저 혼자 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님......”
순임이 막상 정희를 불러놓고는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곤란했던 모양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해 보거라!”
순임이 머뭇거렸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님, 무수를 어찌 처리할까요?”
“방금 전에 이야기한 대로 실행하도록 하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 당장 이 집안에서 내치도록 할 일이야!”
순임이 다시 머뭇거렸다.
“어서 움직이지 않고 무엇 하는 게냐! 며느리에게 당장 그년을 내치도록 하라 이르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마님.”
마치 울음이 배어있는 투로 답을 한 순임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내가 처리하마!”
방문을 향하던 순임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평대군 댁으로 갈 준비를 해라!”
순임에 등 뒤에 대고 짤막하게 말을 잘랐다.
“안평대군이라고 하셨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고 손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자 이미 판이 끝나있었다. 며느리 인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초주검 상태에 이른 무수가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희의 출현으로 무수의 주위에서 상처를 어루만지던 하인들이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청지기 임운은 안평대군 댁으로 향할 차비를 준비하고 박 서방은 저년을 지게에 싣고 나를 따르도록 하게!”
임운이 잠시 무슨 말인지 몰라서 우물쩍거리다가는 순임의 눈치를 살피고 급히 서두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서 안평대군의 집에 도착했다.
하인들이 정희의 행차를 알리자 안평대군의 부인이 급히 정희를 맞이했다. 얼굴이 상기될 대로 상기된 정희의 표정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형님께서 연락도 없이 이 어인 일이십니까!”
“왜요, 내가 오지 말아야할 곳을 왔습니까!”
정희의 표정을 바라보고는 순간 움찔 거렸다.
“그것이 아니지요. 그러지 않아도 무료해서 한참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기별을 주시면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터이건만......”
정씨 부인이 순간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 정씨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듯했다. 전혀 치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행색으로 보아 집에 있을 경우에는 치장을 할 이유가 없는 듯했다.
정씨 부인이 정희의 얼굴을 향하기를 잠시 정희의 뒤에 지게를 지고 서 있는 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형님, 저것이 무엇인지요!”
정희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대군께서 집에 계십니까?”
이번에는 정씨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이 지금 집에 있겠습니까! 어디 공기 좋은 곳에서 술 퍼마시고 그림이니 시니 하면서 골이 비어도 한참 골이 빈 여인네들 품속을 헤매고 있겠지요. 얼굴 본지도 오래됩니다.”
정희가 마치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대군께서 참으로 문제입니다, 문제.”
“형님,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인간 포기한지 오래되니 심려 마십시오.”
정희가 이미 둘 사이의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둘 사이가 이제 원수의 단계를 넘어서 무관심의 단계에까지 접어들었다는 사실, 또한 그로 인해서 정씨 부인의 친정과 안평대군이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인, 실은 바로 저 아이 때문에 기별도 없이 찾아왔어요.”
“저 아이 때문이라니요?”
“박 서방, 이리 오시게.”
정씨 부인이 지게 위에 늘어진 무수를 세밀하게 살폈다.
“이 아이는 며느리가 거느리는 아이 아닌가요?”
“부인이 기억하고 있군요.”
“그럼요, 아이가 여간 성실해 보이지 않아서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대관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정희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여자라고......”
순간 정씨 부인이 뭔가 떠오르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래요, 아들과 잠자리를 가졌지요. 그래서 며느리가 그를 알아채고......”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래서 부인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려고 데리고 왔어요. 그러지 않으면 며느리 손에 살아남지 못할 듯해서......”
정씨 부인이 혀를 찼다.
“그저 남자들이란......”
정씨 부인이 순간적으로 이빨을 갈았다. 자신의 증오스러운 남편, 안평대군을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막후활동
수양대군이 명나라로 길을 떠난 지 여러 날이 경과하자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비록 곁에는 장성한 아들 내외와 태어난 지 오래 되지 않은 작은 아들이 있었으나 서방님의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외로움에 빠져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서방님의 공백을 자신이 채워야했다. 어떻게 해서든 서방님이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일처리를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며느리를 내실로 불렀다. 함께 길을 나서고자 생각했다. 그런데 부르면 바로 오고는 했던 며느리의 행동이 그날따라 느렸다. 그런 경우가 없었던 터라 의아한 생각으로 며느리의 등장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며느리가 방문을 열고 손에 작지 않은 보따리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정희의 시선이 그 물체로 향하기를 잠시 인수가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게 무엇이냐?”
며느리가 늦게 등장한 사유를 보따리와 결부지어 말을 꺼냈다.
“어머님,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말을 마친 인수가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고 정희가 호기심이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따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각종 금붙이와 진주 등 귀한 물건, 보물들이었다.
“대체 웬 것이냐!”
“어머님,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준비해 놓았어요. 일부는 제가 혼인할 때 받은 패물이고 일부는 친정아버지께서 명나라를 가고 오시면서 가져오신 물건들을 보내 주신 것이고요. 긴요하게 쓸 때가 있을 것이라 하시면서 말이에요.”
가슴이 뭉클거리고 있었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더욱 만전을 기하라는 사돈어른의 마음,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그 일을 도맡았을 며느리의 깊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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