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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요성이 언급되고 또 서울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기록은 고려 중기인 숙종 시절부터 나타난다. 1099년 숙종은 재신과 일관에게 양주에 남경(서울)을 건설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고 직접 왕비와 원자와 함께 삼각산(북한산)을 방문하여 도읍으로 정할 땅을 살펴보았다.
이어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ㆍ어사대부 임의ㆍ지주사 윤관 등이 삼각산 주변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올린다.
『“신등이 노원역(盧原驛, 동문 밖 4리에 있다)과 해촌(海村, 동쪽 30리 도봉산 아래에 있다) 그리고 용산(龍山, 서남쪽 10리에 있다) 등지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읍을 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오직 삼각산(백악산) 면악의 남쪽은 산수의 형세가 고문서에 부합되니, 청컨대 주산 줄기의 중심이 되는 대맥에 임좌병향으로 형세에 따라 도성을 건설하십시오.”
하니, 왕이 가하다고 제하였다.』
백악산은 청와대 뒷산으로 상기의 글을 살피면 지금의 경복궁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하튼 공사는 시작되고 1104년에 동 장소에 궁궐이 완성되고 그 해 7월에 남경에 거둥하여 정사를 보다 10월에 다시 개성으로 환궁한다.
비록 숙종 조에 한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천도를 위한 기반 시설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아울러 이후의 왕들은 수시로 남경을 찾아 정사를 처리한다. 그리고 공민왕 때 한양으로 천도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1357년 공민왕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太祖, 왕건)의 진전(왕의 어진을 모신 전각)에 배알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점쳤다. 허나 옮기지 않음이 이롭다는 점괘에 따라 아쉬움을 토로하며 수도를 이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우가 보위에 오른 시점에 본격적으로 이전을 서두른다. 고려사절요 우왕 1382년 8월의 기록이다.
‘한양에 도읍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정하니, 간관이 상소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한양으로 옮겼다. 경성(개성)은 시중 이자송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게 하고, 이임ㆍ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이 수행하였다.’
다시 1383년 2월 기록이다.
‘남경은 모든 일이 초기 단계에 있기에 문하부가 송경(松京, 개성)으로 환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이에 따라 우왕은 개성으로 다시 환도하나 한양에 대한 집착은 이어지고 북한산성까지 보수한다. 그리고 공양왕 당시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1392) 윤 12월 기록 중 일부다.
‘경오 년에 공양군(恭讓君)이 남경으로 옮기매.......’
상기 글에서 경오년은 1390년이고 공양군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살펴보자. 물론 1390년 기록이다.
‘9월 병오일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판삼사사 안종원에게 명하여 송경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경술일에 어가가 한양에 이르니 양광도 관찰사 유구(柳玽)가 화려한 가설무대를 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맞이하므로,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이를 그만두게 한 후에야 들어갔다.’
상기의 기록을 살피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일치한다. 즉 공양왕 당시에도 한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 잇단 악재 속에 신하들의 환도 요구에 따라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다.
다음은 조선 건국 세력들의 거창했던 수도 이전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태조 1년(1392) 8월 기록이다.
‘삼사 우복야 이염을 한양부에 보내어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하였다.’
수즙이란 기왕의 시설을 보수한다는 의미로 상기의 글은 이전에 있던 즉 고려시대에 이미 지어졌던 궁궐을 보수했다는 의미다.
다음은 한양으로 천도하기 직전인 태조 3년(1394) 8월 기록이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 가나, 한 되는 바는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도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비록 이성계 세력에 의해 수도는 한양으로 이전되지만 정종 당시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롭게 보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에 의해 서울은 이 나라의 중심으로 굳어진다.
상기의 기록들을 모두 살피면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어느 개인의 일시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오랜 기간 우리민족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러한 연유로 서울이 탄생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 간주함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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