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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서로 어떻게 불러야 옳으냐?”
“제 생각으로는 그냥 형님, 아우 이렇게 부르면 더 가깝게 그리고 사이가 좋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만......”
정희가 그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며느리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당연히 그리 해야지. 그렇지 않소, 아우.”
“아우에게 않겠소가 무엇입니까, 형님.”
박 씨 부인이 말을 그리하자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오래 이어지고 있었고 너무 웃어서 그런지 박씨 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웃음이 멎자 그것이 무안한지 앞에 있는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형님. 무슨 연유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아우, 요즈음 아버님과 오라버니를 자주 찾아뵈는가!”
“그리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가끔 연락을 취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요?”
“아니야, 일은 무슨 일. 그냥 물어보았네.”
순간 박 씨 부인이 서방님, 수양대군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형님, 혹시 서방님과 관련해서 그리하신지요.”
“바로 말하였네. 내가 들어보니까 서방님께서 일으킨 일을 두고 집현전 학자들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는구먼.”
“어떻게 말입니까?”
“서방님이 상감마마를 위협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간신들을 모두 제거한 일을 두고 마치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야.”
“형님, 사실이 그렇잖아요!”
순간 정희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설령 일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 물을 일이 아니었다. 잠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정희가 경직된 표정을 풀고 가볍게 웃었다. 박씨 부인의 순박함을 생각했다.
“아우, 그 일은 우리만의 이야기고 남들의 경우 그리 알고 있으면 아니 되지!”
박씨 부인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형님, 그러면 제가 어찌해야하는지요. 저는 오로지 형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
박씨 부인의 경우 머리가 약간은 아둔한 듯했다. 그러나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언제나 한길을 향하는 사람임을 정희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아우를 긴히 보자고 했네.”
“말씀만 하십시오.”
인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인수가 급히 방문을 나서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자네가 친정아버님과 오라버니를 만나주어야겠네!”
“그래서요?”
“그분들을 안심시켜드리라는 이야기일세. 아울러 아우의 오라비인 박팽년 대감께서 집현전의 의심의 불씨를 잠재울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일세.”
박씨 부인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자신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의 서방님께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알고 있는 마당에 정희의 이야기를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하면 아버지와 오라비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희가 가만히 기다렸다. 결코 재촉하지 않고 박씨 부인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형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정희가 가늘게 미소를 보이며 박씨 부인에게 다가앉아서 손을 잡았다.
“고마우이, 아우!”
“아닙니다, 형님. 제 서방님이십니다!”
“그래, 나의 서방님, 아우의 서방님이지.”
“형님, 하오면 어찌할까요?”
“내일 당장 아버님을 찾아뵈었으면 하네.”
“아버님을요?”
“갈 때는 반드시 아들들을 대동하고 함께 가야 할 일이야.”
“아들들을요?”
“친정 아버님께 나이 어린 손자들의 얼굴을 반드시 보이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게.”
“그런 연후에는요?”
“오라비 박팽년 대감을 만나서 서방님의 진정을 전하라는 이야기야. 쓰러져 가는 이 사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켰고 절대로 왕권에는 티끌만한 욕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이야.”
정희의 말을 듣고 있는 박씨 부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간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난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 보위의 문제였다. 물론 권력으로, 힘으로 나이 어린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왕도정치를 표방한 마당에 무력으로 왕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문제로 고민에 빠져들던 중에 인수를 데리고 귀한 술과 음식들을 하인들에게 들려 백부인 양녕대군 댁으로 향했다. 수양대군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인 양녕대군에게 조언을 받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정희 일행이 양녕대군댁에 도착하자 마침 백부께서 한가로이 후원을 산책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부님, 제가 긴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돌려서 이야기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백부와 조카며느리 사이에 결례는 무슨 결례. 어서 오거라.”
호탕한 모습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정희와 인수를 맞이해서 후원의 조그마한 정자로 올라갔다. 정희가 하인들의 손에 들려온 음식들을 손수 차리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나자 술병을 들어 양녕대군의 잔을 채웠다. 양녕 백부께서 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 때문에 왔으렷다.”
“이 상태에서 머물고 만다면 차라리 일을 벌이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생각이옵니다.”
“그야 당연하지. 빨리 수양이 보위에 올라 새롭게 그림을 그려야지.”
“그런 연유로 하도 답답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어미야. 어미의 생각은 어떠냐?”
“백부님, 힘으로 나이 어린 주상을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게 말이다. 강제로 내쫒을 수는 없고. 그래, 우리 손자며느리의 생각은 어떠냐. 손자며느리에게 좋은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인수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할아버님 그리고 어머님, 상감마마를 혼인시키면 어떨까 싶어요.”
“혼인을?”
정희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양녕 백부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정희가 혼돈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녕 백부와 인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 바로 혼인을 시키는 거야. 혼인을.”
그리고는 정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며늘아이야, 내 큰 아버님이신 정종 임금님을 생각해 보거라.”
태종임금께서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명분에서 밀렸다. 다섯째 아들인 자신으로서는 위로 많은 형님들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형님인 방과를 임금의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런 임금의 자리가 자연스럽게 태종임금에게 양위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종의 비인 정안왕후의 역할이 컸었다. 이미 모든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고 그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종의 비, 정안 왕후가 강력하게 태종에게 왕위승계를 요구했다.
여자로서의 두려움이 가장 큰 문제였으나 바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여자의 본능이 한몫했다. 그런 연유로 태종임금은 모양새 있게 임금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정희가 미소를 머금으며 인수를 주시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어머님, 할아버님의 말씀대로 갑작스레 정종 임금님 생각이 들었어요. 구체적은 아니지만요.”
“그렇게 해서 현 임금을 상왕의 자리에 앉히도록 하고 수양 조카가 왕위에 올라야할 일이야.”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듯 가슴이 확 하고 트이고 있었다.
“그러면 누구를 비로 맞이해야할까요?”
양녕대군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 부분은 며늘아이가 수양과 함께 신중하게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듯하이.”
“저희 부부가요?”
“당연하지. 수양이 왕위에 오르는 일에 대해 협조를 아끼지 않을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만에 하나 고집을 부리고 왕의 자리를 고수한다고 하면......”
양녕 백부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했다. 행여나 왕비의 자리에 올라서 마음이 바뀌고 그리고 그에 연연해한다면 비극적인 결말을 보는 수 외에는 없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한명회 대감의 여식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한명회의 여식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누구 마땅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느냐?”
“아닙니다, 백부님. 백부님 말씀대로 수양대군과 함께 신중히 생각해보아야겠어요.”
“암, 그래야 하고말고.”
“백부님, 그 부분은 저희들이 찾아보겠어요. 그런데......”
“그런데?”
“혼인 문제는 종실의 가장 어른이신 백부님께서 나서 주셔야 도리일 듯해서요.”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내 한번 힘써 볼 터이니 그리 알고 일을 서두르도록 하자꾸나.”
“백부님, 벌써 모든 생각을 정리하시고 계셨군요. 제가 부끄럽습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시게. 나의 백부이신 정종임금님의 경우에서 해법을 찾았으니 그 분에게 감사드려야지.”
“그러면 저희도 백부님께 해법을 찾아냈네요.”
“이야기가 결국 그렇게 흘러가나.”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또 명심해야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인지요.”
“바로 서둘러서 일처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야기일세. 그러니 수양에게 이야기해서 주상을 빨리 혼인시키도록 서두르라고 하게.”
그리해야 할 일이었다. 자꾸 시간이 늦추어지면 현 체제에 고착하고 말지도 몰랐다.
인수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양녕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우리 조카며느리와 손자며느리가 완전히 찰떡이구만 찰떡.”
양녕대군과 헤어지고 집에 도착하자 급히 청지기 임운을 찾았다. 바로 궁궐로 들어가서 영상대감께서 퇴궐하는 즉시 집으로 오시라는 전갈을 들려 보냈다. 물론 현 임금의 배필을 정하고자 함이었다.
임운을 보내고 며느리 인수와 함께 그 일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으나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수양대군과 논의를 거쳐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서방님의 퇴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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