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 역사장편소설 女帝 정희왕후 (26)

e산업 / 황천우 작가 / 2013-10-29 10: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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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 무슨 말씀입니까! 어느 누가 부인 댁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정희의 태도에 수양이 궁금했는지 퇴궐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왔다. 사실 최근 들어서 정희로서는 수양의 퇴궐 시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바쁘게 흘러가다 보니 집에 들어오면 그 시간이 바로 퇴궐시간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 무슨 일인데 청지기까지 보내셨소?”
“무슨 일은요, 그냥 영상 대감 얼굴 잊어버릴까 보아 그러지요.”

일순간 수양대군이 밉게 보였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수양 자신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있는 정희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일에 대해 뼈가 들어있는 말임을 감지했는지 수양대군이 급히 정희를 방으로 끌었다.

“부인 마님, 소인을 보자고 한 사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부인의 명을 받잡고 이렇게 번개같이 달려왔으니 노여움을 푸시고 어여삐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수양의 능청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양녕 백부에게 다녀온 일 또 양녕 백부께서 정종임금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어린 임금을 빨리 혼인시켜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수양의 얼굴에 일순간 화색이 돌더니 다시 침울하게 변해갔다. 그 표정의 변화를 정희가 이상한 듯이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대감.”
“양녕 백부께서 말씀하신 방법이 좋기는 한데......”
“그런데요?”
“두 가지 부분이 걸립니다.”
“두 가지 부분이라니요?”
“하나는 형님이신 선왕께서 상을 당한지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나가는데 혼인식을 거행한다는 일이 그렇고 또 한 가지는 과연 그렇게 합당한 인물이 있을까하는 걱정이오.”

정희나 양녕 백부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왕께서 상을 당한 일이 바로 지난해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새 어린 임금의 혼인을 서두른다고 한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아보였다.

근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미처 그를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상실감이 동반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린 임금의 혼인 문제는 한낱 수포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그리 될 수는 없었다.

“대감, 생각을 달리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달리 생각한다고 하면......”
“주상의 경우는 단순히 혼인의 문제가 아니고 이 나라의 안주인을 정하는 문제 아닙니까. 더욱이 현 임금께서는 그야말로 곁에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의 몸 아닙니까? 그런 경우라면 먼저 신하들이 나서서 혼인을 주선해서 나라의 안녕을 기함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수양이 가만히 정희의 말을 새겨보았다.

‘나라의 안녕, 신하의 도리.’

수양이 갑자기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바로 그거요! 원만한 국정 운영을 이유로 홀로 지내고 있는 임금에게 배필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임금이 좀 더 활기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거지요!”

정희가 가만히 수양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도 양녕 백부님께 부탁을 드리고 말입니다.”

궁합이 탁탁 들어맞았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그러면 어느 집 규수와 혼인을 치르도록 하나.”
“저도 그 생각을 많이 해보았는데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래서 대감과 함께 상의하려고.......”

수양이 정희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기는 한데 그들의 여식 중에 한 사람을 골라 비로 앉힌다.”
“대감, 여하한 경우든 이번 난에 참여했던 공신들의 경우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들의 경우 유사시에 대감과의 관계가 모호해질 수 있지요. 또한 그들이 작당해서 새로운 판을 짜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요. 어차피 그들로서는 한 번 경험해 보았으니 말입니다.”

수양의 입에서 끙 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참, 한명회 대감에게 그런 여식이 있을 터인데......”
“한 대감댁은 더욱 아니 되지요!”

수양에게 한명회 대감의 기지가 순간적으로 생각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부인의 경우는 나와 가까우면서도 무던한 사람 그리고 이번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여식을 마땅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니요?”
“바로 그 말입니다, 대감.”

수양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주위에 많았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설령 마땅한 사람이 떠오른다고 하여도 그에게 여식이, 철저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여식이 없다면 만사 헛일이었다.

“그것 참,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네.”
“대감, 대감과 친한 분들의 성함을 들려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해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다보면 훨씬 도움이 될 듯해서 그렀습니다.”
“좌우지간 내가 부인의 총명을 따르지 못하겠소,”

수양이 정희에게 대감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입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수양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정희를 바라보았다.

“참,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어느 분이세요.”
“송현수 대감 말이요, 송현수 대감.”

돈녕부 판사로 있는 송현수 대감을 지칭했다.

“왕족 관리한다는 그 분 말이에요?”
“부인도 본 적이 있지 않소. 그 무던한 사람 말이오.”
“송 대감댁에 과년한 여식이 있는가요?”
“아, 있고말고.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보았는데 여간 아닌 듯이 보입디다. 그에 맞는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요.”

가만히 송현수 대감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양대군과는 막역한 사이였고 과묵한 성격으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야말로 선비였다. 정희도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현수 대감의 여식이라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했다.

여인의 직감

날씨가 차가웠다. 집안의 모든 여인들이 김장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통솔해서 일을 하고 있는 며느리, 인수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지게 일하는 모습에서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 제가 하겠사오니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내가 지금 일하는 거 감독하는 것처럼 보이니?”
“그러시면......”
“바로 네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 네 모습을 바라보니 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구나. 어련히 잘 할까봐서 하는 마음에 말이야.”
“어머님, 송구하옵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 테니 네가 수고 좀 하거라.”

인수에게 일을 맡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 다시 인수를 생각해보았다. 인수의 존재가 자꾸 자신을 물러나게 만드는 형국이었다. 너무나 차지고 자신의 할 일까지 처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자꾸 인수에 의해 역할이 축소되어진다는 느낌이 일어났다.

며느리를 생각하며 시할아버지 태종임금의 비 원경왕후를 생각했다. 둘 다 당찬 면에서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며느리의 경우 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그야말로 열녀요 효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감생심 남편에게 투기는 생각도 하지 않을 듯했다.

인수가 그동안 너무나 고생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으니 김장을 끝내면 등을 떠밀어서라도 친정을 다녀오도록 해야 할 듯했다. 아니 며느리와 함께 사돈댁을 방문해서 그간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또 차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협조를 구해야 할 듯했다.

수양대군이 임금으로 올라선다고 하면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하고 그런 경우라면 사돈어른의 역할이 중요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을 구실로 저들이 승인을 거부한다고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명나라 통인 사돈어른이라면 그를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터였다.

“어머님!”

한참 생각에 잠겨들 무렵 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송현수 대감님의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송 대감님 부인께서!”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식의 혼사 문제로 한창 바쁠 터인데 갑작스런 방문은 이외였다. 급히 방문을 열자 송 대감의 부인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급히 마당으로 내려섰다.

“기별이라도 주시고 오시지. 너무나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찾아 온 사실을 탓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시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면에 숨겨있는 사유에 대해서 일종의 의구심과 호기심 또 반가운 마음에 말이 저절로 그리 나갔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정희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서는 송 대감의 부인, 민씨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부인?”

방으로 들어서자 정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씨 부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정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정희를 주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민씨 부인이 앞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희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기겁을 하고 황급히 민 씨 부인의 소매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민씨 부인이 정희의 동작에 가벼이 저항을 하고는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상 부인, 저희 집안을 살려 주십시오!”

정희를 바라보는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부인,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상 부인, 우리 집안을, 우리 집안을......”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 눈물이 말끝을 자르고 있었다.

“부인, 그 무슨 말씀입니까! 어느 누가 부인 댁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민씨 부인을 일으키려던 행동을 멈추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민씨 부인이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가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인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머님, 무슨 일이에요?”
“글쎄다. 나도 지금 영문을 몰라서 이러고 있지 않느냐. 그래, 며느리도 이리로 들어와 보거라.”

인수를 불러들이자 민씨 부인이 냉정을 찾기로 했는지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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