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 역사장편소설 女帝 정희왕후 (27)

e산업 / 황천우 작가 / 2013-11-05 11: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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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결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차라리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일요주간=황천우 작가] “부인, 한번 차근차근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인지!”
“영상 부인, 너무나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제가 경거망동을 한......”

아직도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는지 말끝이 흐렸다. 민씨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희가 인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인수가 급히 밖으로 나가서 시원한 물을 가지고 들어와 민씨 부인에게 건넸다.
민씨 부인이 한 번에 물을 마시고는 잠시 가슴에 손을 얹어 놓았다가 떼어냈다.

“부인,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민씨 부인의 얼굴에 혈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상 부인, 제가 너무 결례를 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야 결례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지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잡수시고 말씀 해보세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저의 부족한 여식을 왕비로 삼고자 하는 결정을 재고해 주십사하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네?”

정희와 인수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부인, 무슨 말씀이신지 차근히 이야기 해 주세요.”
“너무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아이가 궁궐로 들어가서 왕비가 된다는 일이 너무나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이제는 정희가 진정해야 할 듯했다.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딱히 이렇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신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정희의 의도를 너무 비약하고 있었다.
“부인, 그러면 지금 제가 송 대감님 댁을 몰락시키기 위해 부인의 여식을 왕비로 천거했다는 말인가요?”

가만히 민씨 부인의 걱정을 요약해보면 결론은 그러했다.

“말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그런 두려움 때문에 이리 찾아뵙고 재고해달라고 요청하러 찾아뵈었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리 하자고 한 일이 아니라 대감이, 수양대군이 송현수 대감님과의 사이를 구실로 그리 했습니다만.”
“영상 대감께서요?”
“그렇습니다. 영상 대감이 임금께서 홀로 너무 적적하시고 그리고 그런 연유로 국정에 소홀함이 나타날까 보아 종친들과 상의를 하시고 부인의 여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해서 그리 하셨지요.”

민씨 부인이 심각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 힘들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만, 저는 오로지 영상 부인만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민씨 부인이 무엇인가에 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앞서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이 마치 자신의 가족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려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부인,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단종 비

송현수 대감의 여식과 어린 임금의 가례를 서둘렀다. 반대 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그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수양대군이 두려워 그럴 수도 있었으나 당사자인 어린 임금이 반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어린 임금에게는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 경혜공주가 있었으나 이미 혼인을 한 상태여서 구중궁궐에 언제나 홀로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함께 할 사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줄 사람을 맞이하는 일이었으니 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반가운 일은 둘 사이의 금술이 여간 아니었다. 물론 언제나 혼자 했던 어린 임금이 사람이 그리워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여하튼 왕비를 대하는 어린 임금의 모습이 마냥 흐뭇하게 보였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좋은 일 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서서히 정희의 의도가 실현되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임금의 자발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왕비의 뜻인지 임금이 서서히 권좌에서 밀려나는 형국을 취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무를 멀리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정순왕후가 정희를 만나겠으니 궁궐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전해졌다. 정희의 표정이 담담했다. 왕비가 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왕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 가까이 다가서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시어머니 소헌왕후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시어머니의 얼굴위로 자신의 얼굴이 겹쳐 그려지고 있었다.

“대부인 마님 드시었습니까!”

그 소리에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는 듯이 움찔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김 상궁이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지금 내전에는 상감마마께서도 함께 자리를 하고 계시옵니다.”
“전하께서도!”
“그러하옵니다, 마님.”

김 상궁의 안내로 내전에 이르자 한참 일을 처리하고 있어야할 어린 임금도 왕비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비를 피해 둥지에 앉아있는 한 쌍의 새처럼 보였다.
정희가 예를 올리자 단종이 자리를 권했다.

“숙모님, 오랜만에 뵈옵니다.”
“전하, 말씀을 하대하십시오.”
“아닙니다, 숙모님. 지금 저희에게는 가장 가까운 분이 바로 숙모님과 수양 숙부님 아니십니까? 그러니 숙모님이나 숙부님께 부모의 예를 갖추어도 무리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마냥 어린 모습과는 달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딱딱 부러졌다.

“전하, 너무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희 부부는 단지 신하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하대하여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숙모님.”

정순왕후가 단종의 뜻을 거들고 나섰다.
그 둘의 다정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자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듯했다. 언제나 수양대군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 생각에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숙모님, 저희들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요?”
“아닙니다, 전하. 두 분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렇습니다.”
“숙모님께서 그리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상이 들어왔다. 상위에는 각종 다과와 차가 놓여 있었다.

“숙모님, 드시지요?”
“아니 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먼저 드십시오.”

말뿐만 아니라 표정도 완곡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단종이 마지못하겠다는 듯이 음식을 들기 시작했고 왕비 그리고 정희가 따라서 음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오늘 저희 내외가 숙모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모셨습니다.”
“바로 해라 하시면 되실 일을...... 송구하옵니다.”

단종이 왕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왕비가 마치 뭔가를 종용한다는 듯이 눈길을 주고 있었다.

“숙모님, 저희 내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단종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주저하시지 마시고 말씀 하십시요.”

막상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희의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찻잔을 들었다.

“숙모님, 저와 제 부인이 그만 물러나고 싶어서 이렇게 뵙자고 했어요.”
“물러나다니요!”

막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던 정희의 행동이 일시에 정지되었다.

“저로서는 더 이상 조정 일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는 떨지 않았다. 가만히 단종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손에 들려 있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저희 둘이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수양 숙부님께 말씀을 전해 주십사 하고 이렇게 모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다.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숙모님, 오해 하지 마시고 저희 소원을 들어주세요.”

왕비가 거들고 나섰다.

“숙모님,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요.”
“전하,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임금의 자리는 하늘이 점지하는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두고 말씀하심은 부당하다고 사려 되옵니다.”

단종이 답답한지 다시 왕비의 얼굴을 주시했다.

“숙모님, 정종임금님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 분께서 임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보위를 아우이신 태종임금님께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신 적이 있지요.”
“상왕으로 물러나신다고요?”
“아니면 양녕 할아버지처럼 살아가도 좋고요.”

양녕 백부께서 왕위를 거절하고 세종임금에게 선양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혹은 현재 발생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의 중심에 양녕 백부님이 자리하고 있음을 돌려 이야기하는지도 몰랐다.

“전하,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희 자신이 원하던 바였으나 그리 일처리가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느낌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그리 말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자신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숙모님, 지금 저희가 일순간의 마음으로 이리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디 저희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전하, 결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차라리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숙모님, 아니 되옵니다. 숙모님께서 저희들의 간절한 희망을 수양 숙부님께 반드시 전해 주셔야합니다!”

왕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일로 결코 자신의 손 또는 수양 대군의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양대군의 절을 받다

단종과 정순왕후를 만나고 수양대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결국 수양대군도 정희의 생각과 다를 바 없었다.

“대감,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양녕 백부님과 한명회 대감에게 역할을 부탁하심이 어떠하실는지요.”
“당연히 그리 해야 할 일이오. 그런데 내가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거북하구료.”
“그 일이라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어차피 한명회 대감댁과는 할 이야기도 있고요.”
“할 이야기라면?”
“좀 더 긴한 관계를 맺어야 할 듯해서요.”
“긴한 관계라니요. 나에게 이야기해주면 안되겠소?”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냥 안사람들 이야기라서.”

그리 말을 하고 있는 정희가 살며시 웃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그 미소에서 그리고 안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에 모종의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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