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정율성, 인민해방군가로 中國 전역에 생생히 각인

e산업 / 소정현 / 2013-11-08 15:09:48
  • 카카오톡 보내기
‘中國을 빛낸 별! 조선족’(3) 정율성(中) 팔로군 행진곡 1988년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공식확정
1938년 작곡 ‘연안송’ 20세기 中 음악사 기념비적 평가


▲ ▲ 만리장성 앞에 선 정율성! 정율성을 중국인에게 불후의 영웅으로 군림하게 한 것은 역사적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의 작곡이다.
● 항일운동 본산 ‘연안’에서 불후의 작품

현대 중국인들은 정율성을 위대한 음악가로 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선명하게 기억하며 떠올린다. 정율성의 음악이 이토록 중국 전역에서 심금을 울리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율성을 중국인에게 불후의 영웅으로 군림하게 한 것은 역사적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의 작곡이다.

중국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되는 ‘인민해방군가’는 300만 중국군이 조석(朝夕)으로 애창할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빠짐없이 연주되는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바로 팔로군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1945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8년 7월 25일에 등소평이 공식적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확정한다.

정율성에게 있어 중국인에게 세대를 초월하여 대역사적 분기점을 굳힌 장소가 바로 연안(延安)이다. 1937년 정율성은 바이올린 하나를 어깨에 메고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인 연안으로 향했다.

항일(抗日)의 성지 연안에 당도한 정율성은 곧 루쉰문예학원에 입학해 체계적 음악교육을 받고 졸업 후, 이곳 교수로 근무하면서 중국인의 아리랑이라 일컫는 '연안송'(延安頌)과 오늘날의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리고 있는 '팔로군행진곡' 등 불후의 대작들을 연거푸 쏟아냈다.

바야흐로 연안은 혁명의 심장부가 되고 있었다. 당시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의 근거지로 거대한 병영(兵營)이었고 작열하는 용광로였다. 정율성은 이곳에서 팔로군 군인으로 소속돼 생활하면서 뜨거운 혁명의 열기를 음악의 선율로 담아낸다.

연안 이곳에는 병력이 모이기만 하면 노래로 행사를 시작했다. 당시 연안은 서북의 작은 산성(山城)이었지만 노랫소리로 가득찬 ‘음악의 도시’였으며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이곳에서 부르면 저곳에서 따라 부르고 수만 명이 합창을 하면 연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폭발한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홍군(紅軍)'의 일부가 팔로군(八路軍)으로 편입되었다. 팔로군은 일본군이라는 시대사적 산물과 접전하면서 장개석의 추적과 탄알을 피해 장장 2만5천리 대장정의 신화를 일구어냈다.

팔로군(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국민당에 의해 궤멸 직전이던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의 항전을 명분으로 성사시킨 제2차 국공합작(1936년-1945년 사이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연합 전선)의 소산이었다.

1937년 국민당 정부가 국공합작(國共合作)을 받아들이자 중국공산당은 홍군을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해 각각 화북(華北)과 화중(華中) 지역에 투입했다. 중국공산당으로선 전화위복이자 원기회복의 절호 기회였던 셈이다.

그런데 팔로군이 중국공산당의 정예부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눈부신 활약이 컸다. 실제적으로 일본군에게 대타격을 입힌 것은 팔로군의 한 지대인 ‘조선의용군’의 무장저항이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았다.

심지어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태향산 십자령(十字?) 전투에선 팔로군 사령부를 구해내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과 전차, 비행기까지 총력 동원하여 팔로군에 대한 대대적 섬멸작전을 펼쳤다. 특히 팔로군 사령부는 십자령에서 일본군 2만 명에 포위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 포위망을 단 30명의 조선의용대가 뚫어낸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그 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다가 1944년 일본군이 물러나자 연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들 중 일부는 한반도로 돌아왔으나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숙청당하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매도돼 극심한 고초를 겪는다.

소수민족 민요와 민간의 음악을 수집 ‘풍성한 창작활동’
이데올로기에 묻히나 1992년 한중수교이후 새롭게 조명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 인민군가’로 자리매김
DJ와 노무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당시’ 군악대가 연주


● 위대한 탄생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

정율성이 연안에 새로운 둥지를 큰 시기는 1937년 10월로 일본 침략이 최고조에 이른 무렵으로 무력충돌이 극대화하던 시기였다. 정율성은 항일이 시대의 조류가 된 상황에서 군가(軍歌)외에 다른 음악을 생각할 수 없었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본격 음악활동에 몰두 전념하게 된다. 작곡을 하려면 빼어난 작사자가 필요했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중국인민해방군군가’(팔로군대합창)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女性 시인 모예(莫耶)이다. 특히 궁무는 정율성과 아주 가까웠고 다수의 곡을 함께 탄생시킨다.

정율성은 셴싱하이가 작곡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에 자극을 받아 궁무와 의기투합하여 ‘팔로군행진곡’ 창작에 전력을 다한다.

황하대합창은 중일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래이며 이 노래는 중화민족의 생명의 강, 어머니 강으로 불리는 황하의 거세찬 흐름을 빌려서 항일 전쟁에 나선 중화민족의 민족존엄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구가하고 있다.

황하대합창은 총 여덟 곡으로 이루어진 낭송과 합창 형식을 띤 노래이다.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장광녠(張光年)의 시에 작곡가 셴싱하이(?星海)가 곡을 붙였다. 원래는 낭송을 위한 시였으며 가락이 붙은 때는 1939년이다.

중국인들은 황하(黃河)를 ‘모친하(母親河·생명을 주고 키워준 어머니의 강)’라고 부른다. 티베트 칭장고원에서 5464㎞를 달려 발해로 흘러가는 이 강은 중국인의 삶 그 자체였다. 황하가 중국 문화의 여러 장르에서 상징적인 주제로 쓰이고 있는 까닭이다.

1939년 1월, 정율성은 시인 궁무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그해 5월에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던 공무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율성에게 건네준다. 정율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궁무가 쓴 노랫말은 팔로군대합창은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 모두 8수로 형성되었다.

1939년 겨울, 정율성의 몸과 혼이 불살라진 ‘팔로군대합창’은 로쉰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全軍), 전후방(前後方) 할 것 없이 배포돼 울려퍼졌다. 1940년 초에는 정율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대합창’의 첫 공연이 연안에서 열렸다.

1949년 동북(東北)과 화북(華北) 지역에서 국민당 군대를 연파한 인민해방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베이징(北京)을 포위했다.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중원(中原)과 화동(華東)지역에 발이 묶인 사이 장개석의 허를 찌른 것이다. 베이징의 국민당 군사령관 푸쭤이는 고심 끝에 인민해방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푸쭤이는 공산당 지하당원인 딸의 설득에 넘어가면서 인민해방군은 자금성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백만이 넘는 목소리가 이 노래를 합창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조국의 대지 위에 / 민족의 희망을 안은 / 우리 힘을 막을 자 그 누구냐? (중략)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 아, 나팔소리 울린다. /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 (중략)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북경 천안문 광장에 홍기가 나부끼면서 울려 퍼진 힘찬 선율이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대합창)였다. 1990년 9월 22일에는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 첫 프로그램에서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팔로군대합창’의 힘찬 연주가 울려퍼졌다.

'팔로군대합창'은 건조한 산야에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중국인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진바,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공인받는다. 정율성이 2만5천리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한 뒤 그 감흥을 바탕으로 '팔로군 대합창'의 위대한 탄생이라는 불멸의 대위업 기적을 펼친 것이다.

아울러 제1·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서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할 때에는 정율성이 작곡한 또 하나의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평양 하늘에 울려퍼졌다. 중국의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극찬한다.

▲ ▲ 정율성의 연안송 친필 악보
●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 ‘연안송’(延安頌)

정율성 음악세계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은 1938년에 ‘연안송’(延安頌) 작곡이다. 연안송은 중국항일투쟁 당시 全 중국인민들의 대일 항전에 대한 필승의 결심과 믿음을 찬양하는 곡으로 지난 1990년에는 20세기 중국음악의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항일과 혁명을 위해 천리 만리 먼 길을 걸어 연안에 모인 젊은이들의 혁명의 열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연안송’은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 악보로 만들어 중국 전역으로 보급했을 만큼 그 파장은 지대했다.

곡조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전투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연안송은 삽시간에 항일 근거지로부터 국민당 통치구까지, 화북(華北)에서 멀리 동남아까지 항일 웅비의 영원한 노래가 되었다.

1938년 봄, 연안성에서는 모택동까지 참석한 야회집회 첫 행사로 정율성이 만돌린을 타면서 소프라노 여자 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가송연안’(歌頌延安, 뒤에 ‘연안송’으로 불림)을 격앙된 목소리로 불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아, 연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뚜렷하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모택동 주석이 자리에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뒤 모택동은 물론 청중들은 모두가 감격한 나머지 한결같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안송’의 작사자는 당시 루쉰예술학원문학과의 모예(莫耶)로 연안을 칭송한 한편의 시가 정율성이 작곡한 아름다운 선율로 옷을 입으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모예는 연안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여성 시인이었다. 얼마전에는 ‘연안송’이란 드라마가 중국 국영방송인 CC TV에 방영될 정도였다.

중국인들이 정율성을 자자손손 칭송하는 것은 그의 음악 속에는 강한 서정성이 내재되어 있다는데 있다. 중국인들은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을 듣고 부르면서 중국적이지도 않으면서 낭만적인 서양음악의 선율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연안송이 서정성과 전투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안송의 전반부는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로 잔잔하게 흐르다가 중간에 발랄하고 빠른 곡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부분에서 또다시 잔잔한 분위기로 완결되는 오묘한 구도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1939년에 창작된 ‘연수요’(延水謠)는 ‘연안송’의 자매편으로 서양풍의 송가형식과 산베이(陝北, 산시성 북부) 민족의 농밀한 서정풍이 배어있는 곡이다. 중국인들은 연안송을 처음 듣는 순간 깊게 빨려 들어가는듯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의 중국 젊은이들 역시 너무 좋아한다.

‘연수요’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깊은 한국적인 한이 느껴진다. ‘연수요’는 정율성이 당시 연안이 위치해 있던 산시성 북부지역 민가(民歌)의 가락을 취해서 한국적 정서를 담아 새롭게 작곡한 것이다. 이는 정율성이 민가에서 그 진수를 흡수하는 재능이 탁월했음이 거듭 확인된다.

정율성은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63년까지 조선족이 거주한 연변은 물론 쓰촨(四川), 헤이룽장(黑龍江), 저장(浙江), 후난(湖南),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푸젠(福建), 장시(江西)성 등지를 다니면서 소수민족의 민요와 민간의 음악을 수집하고 중국인의 정서를 한층 풍부하게 창작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정율성은 연안에 있던 4년동안이 그의 일생을 통해 창작활동에서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약 50수를 썼으며 특히 연안에서 초기 2년동안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연수요’ 등 대표작 걸작 3곡을 창작했다. 정율성은 이 3곡을 통해 송가, 진행곡과 민가 등 3분야에서 중국현대음악사상 선구자적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단순히 항일가요는 항일가요로 남는데 정율성 작품의 항일가요는 예술가곡으로 남을 정도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정율성은 쓰라린 심정을 더욱 폭넓고 아름다운 창작활동으로 달래어 나갔다. "생활 속에는 투쟁만 있고 붉은 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유쾌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초목산천도 노래하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 1952년 정율성은 눈덮인 만주땅 북녘 흥안령의 생활상을 통해 '벌목가'와 '흥안령에 눈 내리네'를 작곡하기도 했다.

● 韓中 수교 이후에 드디어 빛을 보다

1942년 폐결핵을 앓고 있던 정율성은 조선의용군 ‘무정(武亭) 장군’을 따라 태항산으로 들어가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정율성은 일제가 패망한 후 해방이 되자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서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에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장을 맡았는데, 당시 정율성은 ‘조선해방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인민군가’가 되었다. 이 곡은 지난 2006년 6월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했다.

北韓에서 5년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 10여곡의 작품을 창작한 정율성은 1951년에 33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오페라, 항일가요, 군가, 서정가곡, 민요, 동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총 360여곡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정율성은 19952년부터 북경인민예술극원으로, 이후 중앙악단에서 전문 작곡가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정율성은 위대한 음악가이자 항일민족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생소한 존재였다.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가 국민에게 소개될 기회는 매우 희박한 것이었다.

1992년 8월 24일 마침내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북경과 서울 하늘 아래에서 펄럭이게 된 것이다. 수교 이후 음악가 정율성에 대해 단편적으로 기사가 다뤄졌지만 지엽적 수준이었다. 다행히도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정율성은 새롭게 조명된다.

2012년 1월 15일 KBS스페셜에서는 ‘13억 대륙을 흔들다-음악가 정율성’ 편이 방영되기 이른다. 원래 8.15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될 프로그램이 이념논란에 휩쓸려 두 번의 방송 불발을 거치면서 다섯 달 만에 빛을 본다.

이례적으로 사장과 본부장까지 검토하고 승인한 프로그램을, 여당 추천 KBS 이사들이 정율성의 공산주의 활동전력을 이유로 방영을 제지한 것이다. 제작진들은 ‘2011년 8월, KBS를 떠도는 매카시의 유령’이란 제하의 성명을 통해 “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투사이자 음악가”라며 “공영방송의 이사들과 경영진의 역사의식이 용도 폐기된 이념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정율성(鄭律成)의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人民은 영원하며, 율성 同志의 노래도 영원하다. 中國人民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KBS스페셜에서 생존자들이 회상하는 정율성은 "자유주의자였으며, 깔끔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회고한다. 정율성이 항일투사였다는 사실과 비록 그가 조선인 신분이지만 북경 ‘팔보산 혁명열사릉’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무척 드물다는 것이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