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감성이 훈련에 의해 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글쓰기 감성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기술이 그렇듯이 글쓰기도 경험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과정은 잘 쓴 글을 읽어보고 따라 해 보는 것이다. 잘 쓴 글은 뭔가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글쓰기 감성은 모방을 통해 이전이 가능하다.
물론 그에게 사고할 수 있는 철학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내 말은 유효하다. 영어와 한글로 글을 쓰는 일에 종사하는 가운데 한글 글쓰기가 영어 글쓰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왜냐하면 한글 글쓰기가 영어 글쓰기보다 고려해야 할 규칙이 많기 때문이다. 한글은 교착어이기 때문에 조사나 용언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띄어쓰기 규칙도 다양하고 까다롭다.
외국인들은 두음법칙이나 사이시옷 규칙을 배울 때 정신을 못 차린다. 또 경어체가 있기 때문에 영어보다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소문자와 대문자 구분에서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고 다른 언어와 달리 성의 지배를 받는 단어가 없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하지만 한글은 주어나 목적어나 동사가 빠져도 말이 되는 경우가 있고 형용사가 발달했기 때문에 미묘한 감성을 활용하면 언어의 유희까지 즐길 수 있는 탁월한 언어이다. 우리가 즐겨 외우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번역하면 정말 우스운 시가 된다.
그 감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언어는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탁월함으로 인해 한글은 논리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제대로 논리성을 갖춘 문장으로 전개한다면, 표현력까지 갖춘 한글이 다른 언어보다 훨씬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지 한글은 기술이나 문화적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그런 부분은 원어나 외래어를 사용함으로써 해결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기술이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과 경험의 성숙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에 대한 이해의 차원과 다른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해 기교란 잣대를 들어 평가하려고만 든다.
그래서 글쓰기 강의를 듣는 경우 사람들은 기교를 배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주 그릇된 생각이다. 글쓰기란 바로 생각을 담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담는 기술을 알고 있다면 언어의 제약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영어로는 글을 잘 쓰는데 한글로는 글을 적는 것이 서툴다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말이 안 된다. 물론 문법이 틀릴 수 있고 언어의 기교에서 떨어질 수는 있지만 생각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글쓰기란 바람과 같다. 바람의 방향과 무게를 느낄 수 있듯이 좋은 글은 그 가치에 변함이 없다. 지금 내 글에서 글 바람을 느꼈다면 그는 제대로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바람은 세차고 또 어떤 바람은 부드럽다.
자비가 없는 바람이 있는 반면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도 있다. 글이란 그런 것이다. 테크니컬라이팅을 강의할 때는 난 글쓰기란 엔지니어링(공학)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목적에 맞는 글에 대한 요건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복 연습하면 해당 분야의 글쓰기 문체와 스타일을 익히는 것에 문제가 없기 마련이다. 결국 규정된 것은 따라하면 된다. 기술을 다루는 문서는 규정된 패턴을 배우면 쉽게 적을 수 있지만 다른 분야의 글을 적는 것은 해당 경험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을 담는 방법론과 경험 성숙에 대한 접근이다. 스킬은 다른 이들의 글을 읽고 따라하는 가운데 쉽게 이식되지만 생각하는 기술과 철학은 쉽게 이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 글에도 지문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문체가 되기 때문이다. 글은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매체이다. 난 생명이 담긴 글도 읽어보았고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글도 읽어 보았다.
우리가 글을 읽으면서 감동하는 것은 글의 기교 때문이 아니라 글의 소재와 주제를 전달하는 글 바람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글 바람의 출발은 감성이다. 논리가 아니다. 난 제품이나 기술을 분석하여 글을 적는 일을 주로 하지만 인생이나 철학도 분석하고 있다.
그때 발견한 것은 대부분의 철학이나 사조가 결국 감성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논리는 그 감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뿌리는 양념이었을 뿐이다. 인간의 신경구조는 결코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성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수많은 것을 상상하고 구축한다. 그 구축한 형상이 거짓을 반영할 수도 있지만 탄탄한 구조를 갖춘 것일 수도 있다. 그 구조의 기초가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긴 하지만 글을 통해서 조직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난 글의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물론 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규합하여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남이 쓴 글들을 토대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낼 수도 있다. 즉, 인간에게 글이 없었다면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글을 잘 적으려면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의식 흐름을 파악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고 소재가 되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성숙시키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바람이다.
그것이 빠진 글은 언어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감동을 줄 수 없는 가벼운 글이 될 것이다. 오늘 난 글쓰기 세계에서 감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글의 기교가 아니라 의식 흐름을 추적하는 기술이고 축적한 소재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아마 그동안 남들이 지적하지 않은 부분을 얘기한 것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축적한 소재를 통해 창조한 글의 액기스이기에 이 시간을 통해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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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선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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