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목사 "반려동물은 여러분을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

Interview / 김수진 / 2015-12-31 1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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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서울이기는교회 이상호 담임목사- 기독교에서 바라본 동물의 삶과 죽음
▲ 서울이기는교회 이상호 담임목사.
[일요주간=김수진 기자] “반려동물의 영혼이 천국에 갔느냐 여부로 고민하지 마세요. 반려동물은 여러분을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반려동물은 여러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떠난 겁니다. 모든 반려동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동물학대를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지 말고, 잃은 반려동물을 위하는 마음으로 반려동물을 위하는 운동에 참여하세요.”

이상호 목사님(대한예수장로회 서울이기는교회 담임목사)은 반려동물과 이별한 슬픔과 동물학대에 대한 슬픔을 긍정적으로 발산할 것을 권한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반려동물과의 이별, 그리고 동물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상호 목사님의 성경책

-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요. 성경에서는 동물이 죽고 나면 그 영혼이 어디로 간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까.
▲ 사람과 동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과정은 다릅니다. 모든 동물은 하나님이 “생겨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서 흙으로 빚어 코에 생기를 넣음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특별한 권위와 복을 주셔서 동물을 비롯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세기1:28). 그래서 동물은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이 가진 생명의 가치와 삶은 다릅니다. 만일 이런 차이를 무시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람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물에겐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가 없으나, 사람에겐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윤리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 악하게 살았던 사람은 지옥에 가고,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편해 하지만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사실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쓰을 듣고, 읽고, 깨닫고, 순종할 때 힘과 평안을 얻게 되지만 동물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동물에게도 생리적 욕구와 본능, 어느 정도의 사고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영혼과는 다릅니다. 동물은 죽으면 끝이지만, 사람은 죽은 뒤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았습니다. 동물의 지능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사람처럼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그래서 존재의 가치에서도,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가치보다 한 사람의 가치가 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것은 한 사람 죄인을 위하신 겁니다. 동물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생명은 어떤 동물의 생명보다 귀중합니다. 만일 이걸 알지 못하고 사람보다 동물을 더 사랑한다면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거나 같습니다. 그렇다고 동물에게 지능이나 감정 혹은 의지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람들과 가까운 개나 고양이, 혹은 돼지까지도 상상 이상의 지능과 감정,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두고 영혼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영혼과 달리, 동물의 혼은 동물의 숨이 끊어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가끔 죽은 동물의 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죽은 동물의 혼이 아니라 죽은 동물을 흉내 내는 영(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귀신들을 악한 영으로 규정하는데, 이들은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거나, 혹은 동물들 속으로 들어가서 동물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마가복음5:13).

- 그동안 가족의 막내였던 동물이 죽은 후, 가족들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인간 가족과 같은 고통일 수 있겠지요. 죽은 반려동물을 위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기독교분들도 많이 있는데요. 성경에서는 어떻게 해석이 되습니까.
▲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위로를 기원합니다. 가끔 반려동물이 죽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성도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도 죽어서 천국에 가나요? 혹은 윤회가 있나요? 는 질문을 자주 듣는데 여기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겠습니다.

불교와 달리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 후의 심판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전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이 심판의 결과로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갑니다. 동물은 죽으면 끝이기에 어떤 심판도 받지 않습니다. 죽은 동물을 위해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한다는 것은 헛될 뿐입니다. 가끔 기독교인 중에도 죽은 동물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동물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마당이 넓어서 동물을 키웠습니다. 강아지 1마리, 닭 2마리, 토끼 2마리. 매일 먹이를 마련해서 잘 먹이니 모두 튼실해졌습니다. 모두 방사해서 키웠는데 옆집 개가 들어와서는 토끼 1마리를 물어 죽였고 닭 2마리는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강아지는 석면이 있는 돌에서 자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토끼와 닭이 죽거나 가출을 할 때는 그리 슬프지 않았는데 강아지가 죽으니까 정말 슬펐습니다. 여동생은 며칠 간 밥도 먹지 않고 울었습니다. 강아지를 묻을 때는 정말 ‘막내’를 묻듯이 슬퍼했습니다. 동생이 너무 슬퍼하는 걸 보면서 ‘다시는 개를 키우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다가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동물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기독교인이면서도 이런 거짓말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겁니다. 이런 분에게 필요한 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만일 이런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말에 집착하면, 오히려 동물을 잃은 상처를 심화시키는 겁니다. 이런 상처로 인해 무력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 성경에서, 혹은 예수님 말씀, 하나님 말씀에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가 있는지요. 이 시대에 동물을 재미로 학대하고,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죽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대의 공동책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목사님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 직접 언급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은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모든 동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세기1:28)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정복과 다스림은 무력을 지배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생태계를 잘 보호해서 사람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연을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가 먹는 닭과 돼지, 소들을 사육하는 농장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본 적 있습니다. 좁은 쇠망 안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살다가 미비한 시설에서 고통스럽게 도축당하는 걸 보면서 슬펐습니다. 만일 닭과 돼지, 소가 말을 한다면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 고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나귀가 말을 한 사건이 있는데, 나귀 주인을 탓하는 말을 했습니다(민수기22:30).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해서 동물이 사람을 탓했던 겁니다.

이유도 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치고 착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숲에서 멧돼지나 사나운 들개를 만나면 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개나 고양이, 닭이나 돼지, 소를 학대합니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힘으로 동물을 제압하려는 권력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키우던 개나 소, 고양이를 잡아먹더라도, 키울 때는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동물애호가들을 이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았던 겁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소를 쓰다듬으면서 ‘아이고 내 새끼 잘 잤나. 많이 먹어라’라고 말씀하신 게 생각납니다. 팔 때는 팔더라도, 잡아먹을 때는 잡아먹더라도, 그때까지는 가족처럼 진심으로 보살폈습니다. 저는 그 소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난을 치곤했는데, 할아버지는 소가 놀란다고 우리를 나무라셨습니다. 이건 할아버지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소나 양,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길고양이에게 화살을 쏘아서 관통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길고양이로 인한 불편이나 괴로움을 감수하거나 주민센터 같은 기관에 신고를 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하지, 직접 학대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동물을 학대하면서 키우지는 못할 겁니다.

- 예수님께서 동물에 비유해 혹은 동물을 향해 혹은 동물들에게 주셨던 사랑의 메시지가 있나요.
▲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실망하거나 크게 오해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돼지 2000마리가 몰사한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귀신들이 돼지들에게 들어가서 돼지 2000마리가 몰사 한 겁니다. 강아지 2000마리가 익사했다, 고양이 2000마리가 몰사했다, 닭 2000마리가 몰사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에게 들어가 있던 귀신들이 돼지 2000마리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귀신들이 돼지를 몰사시킨 겁니다. 예수님이 돼지떼의 몰사를 예측하셨는지는 몰라도,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내시지만 않으셨어도 돼지떼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동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눅21:5). 예수님을 태웠다는 점에서는 영광스러운 면도 있지만,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는 개나 돼지를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복음7:6)라고 하셨습니다. 개와 돼지를 더러운(혹은 천박한) 존재로 말씀하신 겁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악한 헤롯을 여우에다 빗대어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눅13:32).

예수님은 한 번도 동물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었습니다. 돼지 2000마리가 죽게 된 것도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거였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것도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바로 이겁니다.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상상하거나 유추하여 믿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말구유에 나셨으니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든지, 아무도 예수님을 태우기는커녕 업어드리지도 못했지만 어린 나귀는 예수님을 태워드렸으니 사람보다 낫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겁니다. 이런 주장들은 터무니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동물을 학대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만 있었던 겁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2000마리 이상의 돼지나 소, 개나 고양이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간혹 동물을 키우는 분들 중에는 동물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동일시하는데, 그거야 말로 가장 비인간적이면서 비도덕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면 결코 동물을 학대하시지 않으실 분이란 걸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사람과 동물의 존재가 애초부터 정해져있고, 그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요.
▲ 다 아시겠지만 성경의 구약시대에는 제사가 있는데, 제사에는 동물들이 제물로 드려집니다. 제사장은 동물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분리하고, 다리를 자르고, 피를 다 쏟고, 기름과 고기를 불에 태웁니다. 구약의 성전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어렸을 때 5일장에서 가축시장을 본 적 있는데 피 냄새와 가축들의 소리에 역겨워 토할 뻔했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동물제사가 사라져서 더 이상 피 냄새나 역겨운 분위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동물을 음식으로 먹도록 하는 건 구약보다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부정하다고 지정된 동물은 먹지 못하도록 되었는데 이제는 그런 제한이 사라졌습니다. 정결한 동물인 소나 양만이 아니라 부정한 동물까지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행10장).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먹도록 권장하셨다는 건 아닙니다.

동물은 음식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애써 부인하려고 합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소를 가족으로 생각하면서도 팔거나 잡아먹었던 것과 지금 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팔거나 먹지도 않는 것을 비교해봄직 합니다. 그러나 채식주의가 아니라면 개를 가족처럼 키우는 사람은 소를 먹을 것이고, 소를 가족처럼 키우는 사람은 닭을 먹을 것이고, 곤충을 키우는 사람은 개나 소나 고양이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동물을 먹도록 허락하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이런 가르침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람과 대비되는 동물의 운명이 아니라, 학대받으면 살다가 공포 속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에 대한 관심과 개선입니다.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템플 그랜딘’ 생각나는데, 자폐증 환자이면서도 동물학자가 된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템플 그랜딘이 소를 도축하는 환경을 개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랜딘 자신이 자폐증을 앓으면서 겪은 공포감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도축당하는 소들도 겪을 수 있다고 착안해서 도축시설을 개선합니다. 사람들 입장에서 동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물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착안한다면, 동물을 이용하여 판촉을 하는 기업이나 가정에서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개선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한 기업에서 판촉을 위해 사슴을 가져왔는데 그 사슴이 자기 변을 먹는 정신이상을 보였다는 겁니다. 가정에서 키우는 동물의 경우도 동물에 맞지 않은 환경 때문에 동물들이 이상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동물 입장이 아니라 자기들 방식으로 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가 천만 반려동물가족의 통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동물의 복지라거나, 동물학대방지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요. 이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 혹은 성경의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피조물이 다 탄식하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타락해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타락할 때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고통을 겪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귀가 말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귀의 주인이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기 위해서 나귀가 말을 한 겁니다(민수기22:30). 주인을 잘못 만난 동물들은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나, 법적으로나 ‘동물복지’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동물복지라는 말이 정부기관에서도 사용하고는 있지만(예를 들면 동물복지축산농장 인증제 등) 엄밀히 말하면 ‘동물보호’라고 해야 합니다. ‘복지’란 말은 사람의 삶과 관련해서 안락하고 좋은 환경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동물복지’는 동물의 왕국에서나 가능한 말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급한 건 동물보호입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본 기사인데, 겨울이 되면 입는 거위털이나 오리털 의류를 위해 오리와 거위들이 털이 뽑히는 고통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대로 감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의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장품이나 다른 용도를 위해 동물을 학대해서 원료를 뽑아낸다고 합니다. 철망우리에 곰을 가둬놓고는 곰의 생간에 빨대를 뽑아서 진액을 빨아 먹었다는 기사가 생각났었습니다. 돼지나 닭이 좁은 우리에서 한 번도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육되어 도축된다고 합니다. 이런 가축의 고기가 사람 몸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애호가 아니라도 ‘동물보호’하는 데는 모두가 동참해야 합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몇 가지 행동은 이렇습니다. 1)가능하면 육식을 하지 않는 겁니다. 2)모든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다는 생각하고 대하는 겁니다. 3)개나 소, 돼지 농장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겁니다. 4)길고양이나 유기견을 위한 보호소를 늘이고, 구체적이고 엄중한 동물보호법을 조속히 마련해야 합니다.

-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이 있다면.
▲ 반려동물을 잃었을 때의 슬픔은 반려자를 잃은 슬픔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려자를 잃고서 슬퍼하고, 불안해하고, 대인을 기피하고, 심하게는 공황장애까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성도 중에 반려동물(강아지)을 잃은 분이 있는데 너무 슬퍼서 식음을 폐하고 우울증 중세를 보이는 겁니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분의 증세가 심하기에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그분의 슬픔에 전적으로 공감해줬고, 반려동물을 화장하고 납골당에 묻는 모든 과정에 함께 했고,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들(동물에게 영혼이 있느냐, 동물도 천국에 가느냐 등등)에 대해 정직하게 성경의 내용 그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반려동물을 잃은 분들에게 필요한 건 슬픔을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죽은 반려동물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반려동물을 잃은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많이 힘드실 겁니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여러분에게 가족이었을 테니까요. 혹은 가족 그 이상의 반려가 되었을 테니까요. 슬퍼하세요. 대신에 너무 아파하지는 마세요. 만일 제가 아내보다 먼저 죽는다면 아내가 슬퍼하는 건 몰라도 아파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잃은 반려동물을 대신해서 다른 반려동물을 찾는 것도 하지 마세요. 오히려 다른 상처를 입을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도 반려자와 함께 살다가 나이 들면서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반려동물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고요. 또 생각지 못한 때에 반려동물을 잃을 때라도 이별을 감수해야 하고요.

이제 제가 가장 하고픈 말씀을 드립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을 하세요. 반려동물이 자폐증이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크게 도움을 된다는 의학적 소견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반려동물을 잃고서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잃기 전에도 이미 그러한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 기피가 있고, 내면에 외로움이 있는 겁니다. 그러다 반려동물을 잃게 되면서 터져 나온 겁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반려동물을 잃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피하지 말고 만나서 대화를 하는 걸 즐겨야 합니다. 반려자를 잃은 사람의 후유증보다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의 후유증은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훨씬 복잡하고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려자를 잃은 사람에 대한 가족과 사회적 시선은 동정적이지만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에 대한 시선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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