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14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행사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최룡해 비서가 연설했다고 전한다. 최룡해의 공개 활동은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만이다. 최룡해는 2015년 12월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의 장의위원회 명단에 서열 6위로 이름을 올리며 복권 가능성이 관측되어 왔다.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를 거쳐 김정은 정권의 핵심 실세 최룡해 노동당 근로단체비서는 2015년 11월 7일 사망한 리을설 인민군 원수 국가장의위원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면서 신변 이상설이 제기되는 등 온갖 설이 무성했다.
북한 정권 창건 1세대인 최현의 아들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1986년부터 12년간이나 800만 명의 청소년이 소속된 ‘청년동맹’의 최고 수장 자리에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한때 최룡해를 '청년대장'으로 부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최룡해가 북한 수뇌부의 최측근에 포진하면서 자취를 감춘 속사정은 대략 이렇게 파악된다. 최룡해는 2015년 11월 김정은의 업적인 양강도에 건설된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공사부실 책임을 물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러 복수 채널에 따르면 김정은이 참석한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준공식에서 일부 구간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에도 발전소가 충분히 가동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발전소 책임자가 바로 최룡해였다는 게 관계 당국의 분석이다.
일각에선 최룡해가 맡고 있는 근로단체 담당비서 산하 청년동맹에서 바치는 충성자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문책을 당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부친 최현은 김일성과 항일 투쟁한 전설적 인물
軍최고직책 총정치국장 역임 김정은 최측근인사
혁명화 교육받고 복권 ‘對中외교’ 공백 메꿀 듯
‘김정일과 의형제’ 맺어 최룡해 권력은 무소불위
그러나 청년동맹위원장 등 실무자급은 건재하다는 점에서 최룡해 개인 비리에 무게를 싣는 의견도 있다. 최룡해가 주로 건설 업무를 많이 담당했기에 이권에 개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이고 결정적인 빌미는 장성택 숙청 이후 권좌에 대한 불안이 커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룡해의 영향력 확대와 장악력을 우려하여 쥐락펴락한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항일 빨치산 2세대라는 북한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출신 성분도 자신의 절대 권력 앞에선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과시하고자 최룡해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은 빨치산 혁명이라는 지지 기반이 확실한 최룡해를 권력 핵심에 포진하는 것을 묵과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최룡해의 세력이 한층 커지면 자신에게 위협적 존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책 수위가 문제인데, 최룡해 노동당 근로단체비서가 최근 공식 활동 재개 이전에는 함경남도 덕성군에서 주요 농업단위로 평가 받고 있는 장흥 협동농장에서 일반 농장원으로 3번째 혁명화 교육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에서 혁명화 교육은 태공(怠工, 일을 나태하게 처리)을 부리거나 중대한 과오를 범한 간부를 농장과 공장, 탄광 등 생산 현장에서 매일 육체노동과 사상교육을 받는 책벌의 일종으로 고위 간부에 대한 처벌 수위 중 처형, 숙청 다음 단계로 높다. 최룡해는 지난 2004년에도 비리 문제가 불거져 협동농장에서 2년간 혁명화 교육을 받은 전례가 있고, 1998년에도 역시 비리 혐의로 강등됐던 경험이 있다.
● 부친 최현의 후광업고 승승장구
최룡해(崔龍海)는 빨치산 출신으로 인민무력부장을 역임한 최현의 둘째 아들로 1950년 1월 15일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1937년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에서 김일성과 함께 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회자되는 전설적 인물 아버지 최현은 김일성보다 나이도 많고 계급도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석상 외에는 죽을 때까지 김일성에게 절대로 존칭어를 쓰지 않은 북한의 유일한 인물이 최현이었다. 김정일의 당조직 비서 임명 관련 당정치국 회의에서 김영주를 중심으로 많은 간부들이 반발하자, 최현이 권총을 빼들고 쏴죽이겠다고 난리를 친 일화는 북한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최현은 김일성에게 깍듯한 충성심을 보여 인민무력부장 등 요직을 거쳤고, 여전히 ‘충직한 혁명투사’로 찬양받고 있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에게 삶을 불사른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까지 찍어 주민들에게 많은 선전을 했다. 김일성 주석의 영원한 충신이고 동지라는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이 사망한 게 1982년 4월이다.
최룡해는 북한 정권의 최고 핵심 인물의 자손을 교육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김정일의 대학 학과 후배(김일성대 정치경제학부)로 인연을 맺었다. 최룡해의 약진은 노동당의 핵심 외곽조직인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現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서 시작됐다.
30세이던 1980년에 청년조직인 사로청의 해외교양국장을 맡았고, 6년 만인 불과 서른여섯 때인 1986년 사로청 위원장 자리를 꿰차 1998년까지 무려 12년간 800만 명 규모의 거대조직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1989년에는 김일성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응하여 맞불을 놓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최룡해가 처형당한 장성택(김정은 위원장 매제)과 첫 인연을 맺은 것도 사로청 위원장 시절로 추정되는데 당시 장성택은 사로청을 관장하는 당 청년사업부를 맡고 있었다. 최룡해는 사로청 위원장을 맡으면서 북한의 청년층에 유일 영도체제를 집중 학습시키는 등 김정일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1996년 사로청 개편에 따라 청년동맹 1비서를 맡았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한 1998년 부화방탕한 생활이 보위사령부에 포착되면서 최룡해는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당비서로 좌천됐다. 암울한 시기를 보낸 최룡해는 5년 만인 2003년 8월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중앙당에 복귀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장성택이 분파행위로 숙청될 때 다른 측근들과 함께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듯 최룡해는 여전히 ‘장성택 라인’의 핵심이었다. 단적인 실례로 2005년 말 장성택이 당 행정부장으로 복권하자 최룡해는 바로 2006년 3월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로 발탁됐다.
최룡해는 김정은 체제 등장 초기에 김정은의 권력을 단단하게 하는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최룡해가 군 경력은 없었으나, 화려하게 부활한 건 김정은의 후계 체제를 결정한 2010년 9월 28일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당대표자회의에서이다. 이날 최룡해는 당 비서(근로단체 담당), 당 중앙군사위 위원, 당 정치국 후보위원, 당 중앙위원에 임명되면서 김정은 측근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최룡해는 제3차당대표자회의 하루 전인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승진했고, 2012년 4월 11일 제13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특히 그는 2012년 4월 차수에 승진하며 거의 동시에 군 최고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총정치국장에 임명됐다.
최룡해는 군총정치국장에 임명된 후 자신의 인맥을 요직에 심으며 군부를 장악해 나가 장성택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12월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처형되면서 초기에는 김정은 체제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최룡해는 김정은의 수행 횟수 1위를 기록하는 등 최고 실세로 자리하면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는 듯했으나 장성택 처형 이후 불과 얼마 되지 않는 2014년 4월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황병서에게 총정치국장 자리를 인계하고 당 비서로 물러나면서 재임 시 겸직했던 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등의 직책에서 물러난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 중국과 러시아 외교에 공들여
최룡해는 청년동맹 수장 출신답게 청년동맹 창립 7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두고 권력무대로 다시 복귀했다. 북한은 청년동맹 창립 70주년인 1월 17일 대규모 경축행사를 치렀다.
최룡해는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때 황해북도 당비서 자격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접하기도 했다. 또한 최룡해는 2014년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 차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 최고위급인사들과 함께 방한한 바 있다.
최룡해의 이례적인 복권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현재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대남통이자 국제관계 전문가인 김양건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관측 하에 최룡해가 김양건의 공백을 메울 담당할 가능성을 거론한다. 조선중앙통신은 2015년 12월 29일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교통사고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한바 있다.
북한은 제4차 핵실험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있지만, 김정은 주변에서 대외관계를 조언할 참모의 부재가 최룡해의 빠른 복권을 불러왔다는 분석이다. 또한 대표적 중국통이었던 장성택 처형 이후 북중관계가 악화 일로를 걸었던 점도 김정은으로선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최룡해는 2013년 핵 실험 이후 특사의 자격으로 김정은을 대신하여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만났고, 2015년 9월에는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는 등 중국 관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만큼, 꼬일대로 꼬인 중국과의 관계를 푸는 데도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014년 11월 17∼24일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최룡해 비서는 푸틴 대통령 면담에 이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만나 회담을 가진바 있다. 최룡해는 러시아와 합작으로 착수한 내륙철도 현대화 사업을 양국 경제협력의 ‘본보기’로 내세우며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물류 거점’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최룡해 비서 일행은 러시아에서 군사 관련 시설을 방문했다고 전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부군 산하 5군 지휘부, 태평양함대 군사역사박물관 등을 참관했다. 최룡해 비서의 러시아 방문은 급속히 강화된 북한과 러시아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이를 한 차원 높일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문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 김정은·김정일 ‘양 父子’ 끈끈한 인연
김정은의 부친 김정일에게도 의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온다. 맏형은 오극렬(呉克烈 작전부장 출신), 둘째는 김정일, 막내는 최룡해였다.
오극렬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 오중성의 외아들이다. 장성택과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던 군 원로인 오극렬(86)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공개 석상에 자주 등장해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오극렬 부위원장은 1931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옛 소련에서 유학했으며, 공군사령관과 군 총참모장을 지낸 뒤 1989년부터 노동당 작전부장으로 일해 왔었다.
지난 2004년 11월 1일에 발매된 日 주간지 ‘아에라 11월 8일자’는 서울의 정보 소식통을 인용하여 과 같이 보도한다. “북한 군부의 초거물의 친족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로부터 3일 후 일본의 NHK는 “당작전부장인 오극렬 대장의 장남인 오세욱씨가 2003년말 북한의 청진에서 배로 탈출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NK지식인연대 북한정보센터는 북한이 2014년 9월 15일경부터 10월 20일 사이에 외화벌이기관들에 전반적 조직검열과 경영회계실사 등 전열을 재정비한 사실을 전한다.
북한은 외화벌이회사들의 통일적 지휘체계를 새롭게 수립하면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통치자금 확보에 집중시킬 것을 결의하였는데, 국방위원회가 직접 총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정비된 외화벌이회 라인총책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며 국방위원회 3국을 전담하고 있는 오극렬이 맡게 된 것이다.
6.25전쟁 후 김일성 저택 옆에는 ‘최현 장군’이란 명패가 붙은 큰 저택이 있는데, 최룡해는 바로 그 집 막내였다. 김정일은 최룡해를 당 조직부 고위직으로 배려한다. 다른 빨치산 출신 자녀들은 중앙당에 받지 않도록 제약하면서도, 오직 최현의 두 아들인 맏아들 최룡택과 막내 최룡해를 중앙당 조직부 핵심부서로 불러들인다. 그 이유는 김정일의 세습권력 과정에 최현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북한 권력가들이 모두 최룡해 앞에서 굽실거릴 만큼 그의 정치적 파워는 대단했다.
또한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김정은 제1비서와 사돈 관계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정은 제1비서의 여동생 김여정 당 부부장이 최룡해의 둘째 며느리라는 사실에 관계당국은 주목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청년동맹 고위 간부를 지냈던 탈북인사가 우리 당국에 확인해 준 것이다.
이 인사는 청년동맹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관장했기에 12년 동안 청년동맹 위원장을 지냈던 최룡해에 핵심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은이 최룡해에게 처형된 장성택과는 달리 혁명화 교육이라는 일종의 반성 기회를 준 것도 사돈 간이라는 배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