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선의 경제프리즘] 패권은 무너지지 않는다, 신뢰가 이동할 뿐이다

칼럼 / 서정선 칼럼니스트 / 2026-04-27 10: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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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압박과 정책 변동성이 만든 균열, 그리고 자본이 선택한 새로운 질서

 

 

패권의 본질은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힘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에서 출발하지만, 그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전투력과 무기 체계는 질서를 ‘형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패권이 장기간 작동하기 위해서는 타 국가와 시장 참여자들이 그 질서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기반에는 예외 없이 신뢰라는 비가시적 요소가 자리한다.


국제 질서에서 신뢰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계약과 자본, 그리고 제도의 작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인프라로 기능한다. 통화가 국제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고, 군사 동맹이 실제 안보 장치로 인정되며, 기술과 공급망이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이유 역시 그 체계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던 구조는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패권의 유지 과정은 일정한 흐름을 따른다. 초기에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질서가 구축되고, 이후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결합되면서 영향력이 확장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통화, 결제, 규범이 결합된 제도적 기반이 형성되며, 이러한 요소들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이 단계에 이르면 다른 국가들은 해당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패권은 외형상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나 시스템이 확대될수록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과 책임이 동시에 증가하고,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릴 경우 신뢰의 균형이 빠르게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뢰의 붕괴는 특정 사건 하나로 발생하지 않는다. 정책 방향의 급격한 변화, 동맹에 대한 조건부 접근, 경제적 규제의 자의적 적용과 같은 요소들이 누적되면서 시장 참여자와 국가들은 점차 위험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면 기존 질서에 대한 의존도는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대체 가능한 구조를 탐색하는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 과정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완만하게 진행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짧은 시간 안에 방향이 바뀌는 특징을 보인다.


결국 패권은 군사력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사용되는 방식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통해 유지된다. 힘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이 언제, 어떤 기준으로 작동할지 알 수 없다면 시장과 동맹은 이를 위험 요소로 인식하게 되며, 이는 곧 질서 이탈의 출발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세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재편의 흐름은 단순한 정치적 충돌이 아니라, 신뢰 기반 질서가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 패권은 어떻게 내부에서 균열되는가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되는 공통된 흐름은 패권의 쇠퇴가 외부의 충격보다 내부의 균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와 압도적인 군사력을 기반으로 장기간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지만, 그 체계를 지탱하던 요소는 단순한 정복력이 아니라 법과 화폐, 그리고 상업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였다. 로마 시민권이 갖는 법적 보호와 계약의 안정성은 지중해 전역의 상거래를 하나의 체계로 묶는 역할을 했고, 이는 군사적 통제를 넘어선 질서 유지 장치로 작동했다.


그러나 제국이 확장될수록 행정 비용과 군사 유지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재정 압박이 심화되었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화폐 가치의 변형과 세금 체계의 불안정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시장 참여자들에게 예측 가능성의 저하로 인식되었고, 장기 계약과 교역 네트워크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군단의 규모와 장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부에서 형성된 불확실성은 지방과 주변 세력의 이탈을 촉진시키며 결국 통합된 질서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군사력은 더 이상 결속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증가하는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으로 전환되었다.


대영 제국의 경우에도 유사한 흐름이 반복된다. 해군력과 식민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형성된 제국의 핵심은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한 금융 시스템과 런던 시장에 대한 신뢰였다. 국제 교역과 자본 이동이 이 체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대영제국은 물리적 통제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거치며 재정 부담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금융 정책의 변화는 통화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파운드화의 안정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국제 결제와 자산 보유의 기준이 점차 변화하였고, 이는 곧 글로벌 금융 질서의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군사력은 여전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제국의 영향력은 급격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본과 거래의 중심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점진적으로 축소되었다.


두 사례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패권의 핵심이 외부와의 힘의 경쟁이 아니라 내부에서 형성된 신뢰의 지속 가능성에 있다는 점이다. 비용 구조의 불균형, 정책의 일관성 저하, 그리고 제도에 대한 신뢰 약화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존 질서는 유지되기 어렵고, 대체 가능한 체계가 등장하면서 중심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두 제국 모두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졌다. 이러한 흐름은 특정 시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특성이며, 현재의 국제 환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 정책 일관성의 균열과 신뢰 리스크의 확대
현재 국제 질서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한 갈등이나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운용 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신뢰 구조의 재조정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은 여전히 군사력과 금융 시스템, 기술력을 동시에 보유한 중심 국가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의 정책 흐름은 기존과 다른 신호를 시장과 동맹국에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강경한 조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조치가 어떠한 기준과 방향성을 가지고 반복되는지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 환경에서 가장 큰 변화로 인식되는 부분은 통상, 안보, 기술이 하나의 축으로 결합되면서 의사결정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세 정책은 단순한 무역 조정 수단을 넘어 산업 보호와 공급망 재편을 동시에 겨냥하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으며, 기술 분야에서는 특정 국가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접근 제한이 강화되면서 글로벌 생산 체계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방위비 분담과 장비 공급, 주둔 구조와 관련된 논의가 단순 협의의 범위를 넘어 조건부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서 동맹 관계의 성격 자체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시기 이후 강조된 ‘America First’ 기조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해당 정책은 국내 산업 보호와 재정 부담 조정을 목표로 하는 전략적 선택이었으나, 국제 시장에서는 이를 장기적인 기준이 아닌 단기적 정책 변수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특히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 방향이 급격히 전환될 수 있다는 경험이 누적되면서, 동맹국과 글로벌 기업들은 기존의 협력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안정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특정 정책 자체보다 그 정책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변화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관세 부과, 공급망 통제, 기술 이전 제한과 같은 조치들은 개별적으로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정책 수단이지만, 이들이 일관된 기준 없이 반복될 경우 시장 참여자들은 이를 구조적 리스크로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면 기존 질서에 대한 의존도는 점진적으로 낮아지고, 대체 가능한 경로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강화된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변화는 힘의 약화라기보다는 정책 신뢰도의 변동에서 비롯된 구조적 조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나, 그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면서 동맹과 시장은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단기간에 드러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누적되며,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존 질서와는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중동 일부 국가들이 에너지 거래 결제 방식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변화의 초기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과의 원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으며, 일부 거래에서는 달러 외 통화 사용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는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페트로달러 체제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최근 환율 변동성 확대는 이러한 구조 변화의 초기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달러 대비 주요 통화의 변동성은 최근 몇 년간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금리 요인을 넘어 글로벌 자본의 분산 움직임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 동맹의 성격 전환과 블록화의 가속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는 환경에서는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동맹의 의미가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과거의 동맹이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결속 장치로 작동했다면, 현재의 동맹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급망 안정성을 함께 고려하는 복합적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협력 방식의 조정이 아니라, 국가 간 관계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가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맹국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 국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 의도가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다. 정책이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동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기존의 협력 관계는 안정 자산이 아니라 잠재적 위험 요소로 재해석된다. 이와 같은 판단은 특정 국가에 대한 거리두기 형태로 나타나기보다, 다양한 대안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중심에 의존하던 구조는 점차 여러 축으로 분산되는 방향을 보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명확하다. 기존 질서에서의 이탈은 선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점진적인 재배치를 통해 진행된다. 유럽은 에너지와 산업 정책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사결정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중동 지역은 자본과 자원을 기반으로 금융 및 투자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아시아 역시 공급망의 안정성과 시장 접근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다자간 협력 체계를 확대하면서 특정 국가 중심의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군사 동맹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NATO와 같은 기존 체계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기능은 단순한 군사 협력에서 산업, 기술, 에너지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안보와 경제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체계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개별 국가들은 특정 동맹에 완전히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협력 관계를 병렬적으로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구조 변화는 ‘탈동맹’이 아니라 ‘다중 동맹’으로의 전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결속되던 질서는 점차 여러 개의 블록으로 나뉘어 상호 연결되는 형태로 재편되고 있으며, 각 블록은 독립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어느 한 축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축이 상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다층적 네트워크의 형성은 향후 자본과 산업, 기술의 흐름을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동맹은 결속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되었다

◆ 금융·산업 질서의 재배치가 어떻게 현실화되는가
질서의 변화는 정치적 선언이나 외교적 수사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실제 전환은 자본의 이동을 통해 확인되며, 투자와 결제, 공급망의 재구성이 동시에 진행될 때 비로소 새로운 균형이 형성된다. 최근 국제 환경에서 관찰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특정 통화나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시도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기간에 기존 체계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고 선택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출발한다.


에너지 거래 영역에서는 결제 방식의 다변화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특정 통화 중심 구조의 절대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거래 규모 자체를 급격히 바꾸기보다는, 일부 계약과 신규 거래에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시장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학습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자원 보유 국가들은 에너지 수익을 단순히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산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자본의 흐름을 재구성하고 있다.


금융 측면에서는 국부펀드와 연기금, 대형 기관 투자자들이 기존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특정 국가나 시장에 집중되어 있던 자산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유럽, 중동,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투자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금융 질서의 중심을 다극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투자 방향의 변화가 아니라, 자본이 머무르는 기준 자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영역에서는 공급망의 재편이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소재와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생산 거점의 다변화와 함께 기술 협력 구조가 재구성되고 있으며,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기업들은 비용 효율성뿐 아니라 정책 리스크와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의 최적화된 생산 구조가 새로운 기준에 맞게 재설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자본 이동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지역과 블록이 동시에 자본을 유치하고 배분하는 과정에서 복수의 중심이 형성되며, 각 중심은 고유한 산업과 금융 특성을 기반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세계 경제는 단일 축에 의해 움직이기보다, 여러 개의 축이 상호 연결된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자본은 항상 가장 안정적인 환경을 향해 이동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안정성은 단순한 규모나 군사력이 아니라, 제도와 정책이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신뢰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자본 이동은 특정 국가의 약화를 의미하기보다, 보다 분산된 환경에서 위험을 관리하려는 선택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결국 금융과 산업의 흐름이 새롭게 배치되는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축적되면서 향후 세계 경제의 구조를 규정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자본은 힘을 따라가지 않는다. 에너지 가격 변동 역시 단순 수급이 아니라 결제 구조 변화와 맞물려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국제 유가는 지정학적 요인뿐 아니라 결제 통화, 거래 구조, 공급망 재편과 맞물려 변동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에너지 시장이 단순한 원자재 시장을 넘어 금융 질서와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국제 유가의 변동성은 과거 대비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에너지 시장이 통화·금융 구조 변화에 점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자본은 신뢰를 따라 이동한다.

◆ 한국의 전략 /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로 전환되는 시점
질서의 중심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환경에서는 어느 한 축에 대한 단순한 편승 전략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확보하기 어렵다.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특정 국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수렴된다. 동맹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경제의 작동 원리까지 단일 축에 종속시키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해법이 되기 어렵다.


에너지 구조는 가장 먼저 재정의되어야 할 영역이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집중은 곧바로 산업 전반의 불안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급선의 다변화와 함께 저장 능력, 장기 계약 구조, 에너지 믹스의 균형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원전, LNG, 재생에너지를 병행하는 전략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산업 측면에서는 반도체와 배터리, 첨단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기술 경쟁력이 여전히 핵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의 기준은 생산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술 협력, 공급망 안정성, 정책 환경까지 포함된 종합적인 체계 속에서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이 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도, 다양한 파트너와의 협력 관계를 병렬적으로 구축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방산 산업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분야로 평가된다. 기존에는 특정 국가 중심의 공급 구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가격 경쟁력과 생산 속도, 기술 수준을 동시에 고려한 대안으로서 한국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수출 증가를 넘어, 산업 기반과 기술 축적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교와 산업 정책이 긴밀하게 연계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금융과 자본 시장 역시 전략적 설계가 필요한 영역이다. 글로벌 자본이 다극화되는 환경에서는 특정 통화나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자금 유입 경로를 확보하는 균형이 중요해진다. 중동, 유럽, 아시아를 연결하는 투자 네트워크 속에서 한국이 자본의 중개지이자 투자 대상지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장기적인 과제로 제시된다.


결국 한국의 미래는 외부 환경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능동적으로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역량에 달려 있다. 동맹은 여전히 중요한 기반이지만, 그 위에 어떤 경제적·산업적 축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위치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방향의 명확성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설계 능력이며, 이는 향후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었다. 동맹을 통해 확장된 하나의 네트워크였고, 그 네트워크는 군사력이 아니라 금융과 통화, 그리고 규범의 결합 위에서 작동해 왔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형성된 에너지 질서와 달러 결제 체계는 세계 경제를 하나의 기준으로 묶어내는 장치였으며, 걸프 국가들의 참여는 이 질서를 스스로 확장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체계가 유지된 이유는 강제력이 아니라 선택의 합리성에 있었다.


그러나 선택이 강제로 인식되는 순간,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동맹을 비용으로 계산하고 협력을 조건으로 전환하며 정책의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네트워크는 기반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변화는 선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거래가 바뀌고, 자본이 이동하며, 공급망이 재배치되는 과정 속에서 조용히 진행된다. 패권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선택의 근거가 약해지면 중심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분산된다. 하나의 축에 집중되었던 연결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고, 각 국가는 더 이상 하나의 질서에 머물지 않는다.


동맹을 압박할수록 결속은 강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빠르게 분산된다. 이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역사 속 모든 패권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기준의 변화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 세계는 이미 이동하고 있다. 누가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오래 선택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질서를 설계할 것인가.

 

 

일요주간 / 서정선 칼럼니스트 jacobxu0304@gmail.com 

 

[필자 주요약력]
現 INTERPRO H.K PEF 대표
現 일요주간 부회장
前 Proton International LLC (H.K) 법인장
前 Proton Asia PEF GP
前 Proton Asia PEF
아시아 국제 금융 법률,회계 전문위원
前 화중 테크 대표이사
前 화중아이앤씨 대표이사
前 중국 대련보세구 정부 위촉 외자유치 및 투자 구조 자문 대표
前 중국 천진 한화종합유한공사법인장
前 중국 주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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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선 칼럼니스트 / 중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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