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다섯 번 죽어서 비로소 제맛을 내는 삶

칼럼 / 최철원 논설위원 / 2023-12-18 1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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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온 가족이 모인 방안에는 아낙네들이 소금으로 절여 씻어놓은 배추를 양념으로 버무리며 웃음꽃을 피웠고, 마당에는 남정네가 장작 한 더미를 도끼질하여 마루 밑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다. 부엌에는 콩으로 메주를 한 솥 가득 쑤어 적당하게 절구질을 한 후 네모 모형으로 다듬어 윗목에 듬성듬성 재어 놓았으니 이젠 월동 준비 끝이다. 오래전 우리나라의 초겨울 풍경이다. 마루 밑에 가득 쌓인 장작더미는 습기가 말라가고, 뒷마당 장독대에는 김치가 익어가고 있다. 방 윗목에는 메주가 뜸을 뜨는 냄새가 온 방 안을 쿵쿵한 냄새를 뒤덮었던 내 어린 날 그렇게 겨울은 깊어만 갔다.

내가 사는 대구는 눈을 보기가 어려운데 모처럼 첫눈이 내리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추운 겨울을 맞으니 주변 단체 이곳저곳에서 김치 담그기를 하며 이웃에게 사랑 나눔 행사가 한창이다. 바야흐로 김장시즌이다. 우리 민족은 해마다 이맘때는 각 가정에서 연례행사로 김장을 담그고 메주를 쑤며 겨울나기 준비를 한다. 지난 주말부터 김장시즌이 시작되어 내가 다니는 단체에서도 불우 이웃돕기와 사랑나누기 행사로 김장을 하였다. 나도 불우 이웃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권사님이 교회에서 김장을 담갔다며 김치 5kg을 선물했다. 이건 김치가 아니라 권사님의 사랑이다.

김치를 생각하며 권오길 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가 쓴 책 '괴짜 생물 이야기'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눈길에 붙잡혔다. "풋내 나는 겉절이 인생이 아닌 농익은 김치 인생을 살아라. 그런데 김치가 제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아, 배추가 내 입에 닿기까지 다섯 번 죽는구나. 최초의 죽음은 땅에서 배추가 뽑히면서이다. 두 번째 죽음은 부엌칼이 통배추 배를 가를 때 속 살을 허옇게 내보이며 또 한 번 죽는다. 소금에 절여지며 배추는 세 번째 죽는다. 매운 고춧가루 양념과 젓갈로 버무려지며 또다시 죽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다섯 번째 죽음은 무엇일까. 배추는 장독에 담겨 질식한 채 그늘진 땅에 묻혀 다시 한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내며 새 생물로 태어난다.

요즘은 김치 냉장고로 대체되며 장독대와 정겨움 넘치는 정서는 사라졌지만, 김치 맛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늘 먹으며 느끼는 잘 익은 김치처럼 삶도 그렇게 깊은 맛을 전하는 푹 익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오늘의 성질, 고집, 편견을 죽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김장할 때 찹쌀이나 멥쌀 밀가루로 풀을 쑤어 넣는 것은 유익한 세균의 번식 (발효)을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보통 미생물은 짠 소금에 죽어 버리지만, 염분에 끄떡 않는 내염성 세균인 유산균은 살아남아 김치를 익힌다. 김치를 차곡차곡 눌러 담는 것은 김치에 사는 유산균들이 산소를 싫어하는 험기성 세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때 온 가족이 김장하러 부모님 집에 모였다가 흩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김장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도시 생활로 흩어진 가족을 한곳으로 모아 정담을 나누는 가족 행사로 자리매김했었다. 아삭한 생김치에 보쌈을 먹으며 막걸리를 한잔할 때, 소확행이 따로 없었다. 헤어질 땐 각자 자동차 트렁크에 김치통이 한 통씩 실려 있다. 상업의 발달로 이곳저곳에 김치공장이 많이 늘어났다.

이젠 김치도 담궈 먹는 것보다 사 먹는 편리함으로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는 집이 많아졌다. 우리의 고유 정서가 그만큼 사라졌다는 것이다. 권사님이 선물하신 맛있는 김치를 씹으며 상업의 발달로 대량 생산시대에 잃어버린 것에 대해, 배추의 일생에 대해 생각했다. 배추는 다섯 번 죽어야 비로소 제맛을 낸다. 내 삶도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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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원 논설위원

최철원 논설위원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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