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맛
조승래
속까지 까맣게 태워낸 불맛을 뜨겁게 내린 커피
잔 속에서 얼음조각을 만나 벌인 타협,
흑갈색 고집이 차가운 투명과 악수하며 만났지만
점차 커피는 연갈색으로 얼음은 빙하의 꿈을 버리며
시간의 얼굴을 씻고 있었어
아메리카노, 아이스의 불맛은 시원하지
찻잔의 바깥에는
시간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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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화 작가 |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생두를 볶는다. 불의 세기와 시간에 따라 원두 색과 향이 변하는 로스팅 과정은 기다림의 예술이다. 너무 서두르면 쓴맛이 너무 늦추면 향이 날아가 버리니까.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급하면 쉽게 타버리고 너무 오래 견디면 처음의 빛과 향을 잃기 때문이다. 팬에 원두를 저으면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향과 색을 띠고 있을까. 시거나 고소거하나 쓴맛 사이 어디쯤에서 멈춰야 자신만의 고유한 향을 가질 수 있을까.
원두 색의 변화에 이렇게 다양한 향과 맛의 비밀이 담겨 있다니. 불맛은 입안에서 식으면서 동시에 마음을 데우는 묘한 맛이다. 연두에서 시작해 황갈색과 진갈색 마침내 윤기 나는 검은색까지. 이 안에서 향을 고르는 손길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선택의 예술이 아닐까 싶다.
불의 맛'이라는 단어에서 그을음과 불향이 느껴진다. 그러나 “불맛을 뜨겁게 내린 커피” 한 잔은 단지 음료가 아니다. 나 자신 또는 다른 누군가와의 대화를 끌어내는 향이다. 이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유리잔 속에서 일어나는 온도의 연애사건 같다고나 할까. 갈색의 뜨거운 액체가 투명한 얼음 큐브를 만나 서로를 녹이고 식히며 절정의 맛을 찾아가는 여정처럼 말이다. 진한 폭발적인 풍미가 곧 '불의 맛'이 아닐까. 갈증 앞에서 식도를 타고 내리는 시원한 맛. 이 맛이야말로 커피 한 잔이 주는 중독적 쾌감일 것이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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