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걷기연맹 의 올레길 확정

사회 / 신태문 / 2009-10-01 06: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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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국에서 한창 붐을 일으키는 올레길 걷기가 한창이다. 먼저 강화도 올레길을 시작으로해서 재주도 올레길 지리산 올레길 기타 많은 지역의 올레길을 소개하고 있다.. 녹색성장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있는 자전거타기및 걷기운동이 한창인 요줌 가장쉽게 누구나 함께할수 있는 운동이 바로 걷기운동이다. 가족과함께 할수있고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것이 바로 걷기운동이며 걷기는 하루에 1시간이상 걸어줘야만 재대로 걷기운동이라고한다.


올해 대구시걷기연맹에서는 대구에 많은 올레길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대구 전체를 걷는 대구성 올레길 약100km거리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한 각 구군 마다 5~6개구간의 올레길을 만들어 놓은상태다. 그 첫구간인 대구동구의 1구간 올레길 신숭겸 유적지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면 대구시내에서 팔공산을 오르다보면 파군재삼거리에서 파계사쪽 으로 100 여 미터를 가다보면 오른편에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팔공산 초입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신숭겸(?~927)장군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장군으로 평산(平山)신씨의 시조이다. 어릴 적 이름은 능산 으로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나 광해주(춘천)에서 성장하였고.신숭겸은 궁예의 무장으로 있다가 궁예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힘들어지자 배현경,홍유,복지겸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렇듯 고려개국에 앞장선 신숭겸은 이들과함께 개국4공신의 한사람으로 대장군이되었다. 신숭겸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 사연은 하루는 왕건이 장수들과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마침 머리위로 기러기 한 무리가 지나가자 왕건은"누가 저 기러기를 맞힐 수 있는가?"라고 묻자 신숭겸이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힐까요?"라고 되물었고 왕건이 세 번째 기러기라고 하자 신숭겸이 "그럼 왼쪽날개를 맞힐까요. 오른쪽날개를 맞힐까요"라고 묻자 왼쪽날개를 맞추라 고하자 그대로 명중시키니 왕건이 크게 탄복을 하고 그 근처의 땅을 그에게 주었고,


그의 성씨 본관을 평산 으로 삼게 하였다.태조10년(927년) 통일신라는 껍데기만 남아있고, 천하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후백제 견훤은 전략적 요충지 합천 대야 성을 고려에게 빼앗기자 기수를 신라로 돌렸다. 견훤은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자 태조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공산 동수(公山 桐數:지금의 동화사)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으나 견훤군사의 급습으로 대패하고, 왕건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태조왕건의 안위를 담보할 수 없자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후백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장열히 전사한 곳이 바로 이곳 이다. 후일 태조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했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베어진 그의 목을 대신해 황금으로 두상을 만들고 남은 시신을 거두어 그의 제2고향인 광양주(춘천)에 예장하고, 피 묻은 의복과 흙등을 수습하여 그가 전사한 자리에 혈단을 쌓은 것이 순절단(표충단)이다. 태조는 그 후 나라의 잔치가 있을 때마다 그가 없는 것을 슬퍼하며 짚으로 그의 형상을 만들고 관복을 입혀 옆에 앉히고 그를 잊지 않으니 짚으로 만든 인형이 일어나 신숭겸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에 있는 용산 재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그의 태를 묻었다는 단소도 있다.


또 그가 죽자 그의 말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태안사 뒷산에 와서 3일간 울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1819년 신의 직에 의해 묵는 제단을 중수하고 고려 장절 신 공순 절지지(高麗 壯節 申公殉 節之地)라 새겨진 순절비를 세웠다. 표충단은 수령 400여년된 백일홍 고목이 단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며 이 나무이름이 신숭겸 나무라 이름지어 지기도했으며.1974년 대구광역시 기념물1호를 지정된 이곳은 장절공의 충절을 기리는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있으며, 순절단과 충렬비등이 있다.


아직도 대구에는 태조 왕건과 관계된 지명들이 사용되고있다. 그 지명들을 살펴보면,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고해서 파군재, 유적지 뒷산은 왕건이 피신해 목숨을 살렸다 하여 왕산,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모두 피난가고 아이만 있다고해서 불로동,홀로 바위에 않자다가 돌아갔다고 해서 독좌암. 겨우 위험을 피해 이곳에서 한 숨을 돌리고 얼굴을 활짝 폈다 고해서 해안, 도주 중 날은 반야고 달이 떠있어 길을 비췄다 고하여 반야월, 이지역에 도착하여 안심했다고 하여 안심. 현재 사용되는 지명들이다.


이곳 신숭겸 유적지를 출발하여 한시골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하면 한시골 굿당이 나오고 아담한 저수지가 나오며 경주최씨 재실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씩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 약 3.5km지점에는 운동기구와 휴식처가 준비되어있으며 잠깐휴식을 취하고 물한모금마시고 출발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앞에 보인다 약500m미터정도의 임도 오르막길이 초보자들은 걷기가 힘들만큼 가파르다.


그러나 쉬엄쉬엄 올라가면 금방 응해산 중턱 체육시설공원이 보인다 약4km지점 여기서 잠깐 산아래로 내려다보면 미대동 앞 들이 눈앞에 보이고 멀리 동봉과 갓바위가 보이며 좌불 부처 능선도 선명하게 보인다. 잠깐휴식을하고 길을걸으면 눈앞에 몇개 의 오르막이 있다 그러나 방금 쉬었다 가기 때문에 그리힘은 들지않을것이며 몇 개의 언덕을 오르고 나면 내리막길이보이며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오면 고개가 하나있다


최동하(60)씨는 이고개가 열재고개이며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장골이 (힘이센사람)10명이 넘어가야한다고 해서 열재고개 라고 불러졌고 그 당시 만해도 산짐승들도 많았고 산적들도 많았다고 때문에 그런 이름이 지어졌으며 고개양쪽에는 큰 소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며 참 허무한 생각이 든다며 담배한대를 피워 문다.


이 고개에서 좌측으로 가면 노태우전대통령생가가 있고 노태우전대통령도 이 열재고개를 지나 공산초등학교를 다녔다고한다. 우측으로 내려오면 내동마을(소꼴마을)로 내려오는 산길이 있으며. 골짜기에 아담 하게 자리 잡은 이 동네는 옛날에는 사과농사를 많이 지었고 지금도 주민들은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6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 여름이면 동네 분들이 나무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느티나무고목을 지키고 있다.


공산터널 구길 에 오면 약 700미터 가파른 언덕이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으며 이 고개 정상에서 내려오면 동화천땜이 있고 공산동 주민자치센터를 지나 지묘고 다리를 건너면 출발 했든 신숭겸유적지에 도착 약10km 정도되는 거리며 가을에는 단풍이 아주 아름다우며 하루에 한시골을 찾아 운동하는 사람들이 약 500~6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올레길 코스 동구1코스 이며 다 2.3.4.5.6코스가 더있기도하며 금연내로 자체예산으로 이올레길 이정표도 준비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걷기메니아 들에게 좋은정보를 제공할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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