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지훈이 그런 동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아무리 그래도 10년씩이나 만났는데, 어데 사는지도 모른단 게 말이 됩니꺼?”
“어허~! 자슥이 불량스럽게 힘이나 쓸라카지, 철학이 없어요. 철학이! 김지훈이,”
“예.”
“잘 들으라. 우리 똥근이 행님 왈, 길에서 만난 인연이란? 당장이라도 갈 길이 생기면 헤어져야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보살피고 챙겨주다 때가 되면 부는 바람인지, 흩어지는 모래알인지 모르게 사라지면 되는 기라. 그것이 길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우정인기라. 알겠나.”
그래도 마지막은 자신의 개똥철학이 읊어지는 상황이다. 동근이 만족한 듯 술잔을 독려하며 건배를 선창하자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잔을 들어 부딪치며 재창한다.
“자, 자, 자! 그만하고 코 삐뚤어지도록 함, 먹어보자. 건배.”
“건배”
새벽의 침입자들
1. 사무실에서
2평이 조금 안 되는 공간 다홍색 탁자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 3인용소파가 그 끝 벽엔 뭐가 그리 좋은지 시시덕거리기 바쁜 소형 TV가 놓여있다. 그 위 창틀 밑 선반엔 옷가지들과 수건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탁자위에 시계는 새벽2시45분을 반짝거린다.
준은 얼마 전 집나간 애완견 둥이(닥스훈트) 생각에, 토요일새벽 지훈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전환삼아 사무실구조를 바꿔본 것인데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무실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둥 마는 둥 쏟아지는 졸음에 눈꺼풀의 무게가 더해져 감당하기가 벅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해진 TV소리사이로 “찰카닥, 끼이익~~” 사무실 문손잡이를 비틀어 미는 소리, 준이 잠결에 놀란 두 눈을 부릅뜨자마자 확인되는 소주병을 거꾸로 잡은 손이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뼈 속을 타고 흐르는 전율[戰慄]을 견딜 수 없어 과다하게 활성화된 몸을 튕겨진 용수철처럼 일으키며 탁자 위 5시41분27초를 ‘반짝반짝’ 시계를 휘둘려 잡는다. 그런데 귀청을 찢는 절대 절명의 비명소리, 명우다. 사무실 문턱을 넘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 다급한목소리를 더듬는다.
"으아아~ㄱ, 주...준아. 내다. 내..."
명우는 지훈을 보면 연락하란 준의 호언장담(豪言壯談)이 생각나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6시도 안된 시간, 노크를 해 응답이 없으면 발길을 돌려야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직접 깨우는 것이 최 상책, 조심스레 사무실문손잡이를 비틀어 당겼다.
며칠 전 하곤 다르게 세팅[setting]되어 있는 사무실 풍경에 준이 소파위에 누워 단잠에 빠져있고, 시청자를 잃은 채 희희낙락(喜喜樂樂)거리기 바쁜 TV와 에어컨소리가 시원하다. 명우는 그렇게 사무실 문지방을 넘으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리를 차고 일어난 준이 번뜩이는 안광에 산발한 긴 머리를 흔들며 탁자 위 시계를 집어 던지려는 것이다.
"내...다. 내, 명우다. 내다. 내."
다급함에 지쳐 구조요청을 하듯 옹알대는 명우, 준은 시계를 집어든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긴 숨을 내쉬더니 반짝거리는 시간을 확인한 시계를 내던진다.
“5시41분 34초, 휴~! 야 이씨~ 이게 미쳤나? 지금이 몇 신데? 노크도 없이.”
“터~ㅇ”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소파 등받이에 부딪쳐 나동그라지는 시계, 그래도 오감[五感]을 끌어 모아 생생하게 곤두세워야했던 몇 초 동안의 흥분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시계를 집어 머리위로 옮기며 소파위에 몸을 던진다.
“아~! 피곤하니까. 좀 있다 와라.”
자신의 처지를 호소 할 적절한 찬스를 살피던 명우에겐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당황해 더듬다 단어 끝을 떠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안 된다. 와..왔다, 왔다, 와..왔어.”
“뭐가? 새꺄.”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킨 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사이로 치켜뜬 두 눈이 ‘번들번들’ 섬뜩하다.
“지..훈이가 왔다.”
“뭐! 지훈이가,”
“지..훈이가 아덜 데리고 와 사람들 괴롭히고, 내..를 찾는다. 어떻게 좀 해도.”
말을 더듬다 떨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울먹임, 준이 탁자 위 안경을 집어 잠에서 덜 깬 눈의 초점을 잡아본다. 알록달록 지저분한 옷차림이 며칠 전 찾아와 목욕하고, 얻어 입은 차림 그대로다. 그런데 땀범벅인 얼굴에 초점 잃은 눈알을 굴리며 소주병을 움켜잡은 손을 떨었다, 멈췄다를 반복하는 것이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알았다! 알았어! 내 나가 보께.”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앉으며 퉁명스럽게 내뱉은 준, 하지만 명우는 간절히 원하던 대답이다. 걱정스런 당부를 챙기더니 사무실 문턱에 걸쳤던 몸을 뺀다.
“근데 그 자슥, 오른쪽 허리춤에 칼 차고 다닌단다. 알았제!”
명우가 사라지자 앉은자리를 털고 일어난 준이 기지개를 켠다.
“우~~아~”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차려입은 다홍색계량한복차림으로 사무실을 나선다.
2. 부산역광장에서
이른 아침인데도 부산역광장은 여름철 피서객들의 일사불란한 열기로 가득하다.
가로수벤치에 앉자 있는 지훈은 아스팔트 바닥에 석고대죄[蓆藁待罪]라도 하는 냥 무릎 꿇은 두 사람을 윽박지르기 바쁘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크게 화가 난 듯하다. 그러나 버릇처럼 휘두른 시선에 준이 클로즈업[close up]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 돌리는 딴청이다. 그렇다고 마냥 모르는 척 할 수만은 없는 노릇,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자 벤치에서 일어나 불만과 넉살 섞은 인사를 한다.
“웬일인교? 꼭두새벽부터..........”
좀 떨어진 뒤에서 딴청을 부리다 뒤늦게야 준을 발견한 두 덩치들 또한 피우던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 끄며 고개를 숙이는 등의 인사가 부산스럽다.
“행님! 오랜만에 뵙십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꺼.”
레슬링을 했다고 자랑하는 지훈의 심복들로, 연안부두에서 인사를 받은 적이 있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준은 힐끔거린 관심을 보일뿐 여전히 삐딱하게 서있는 지훈을 향한 걸음이다. 그런데 한발 한발 다가갈 때 마다 확인되는 아스팔트바닥에 무릎 꿇고 앉자있는 얼굴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산역 꼬지꾼이었다 이젠 사과장수를 하는 지민과 장기간의 노숙생활로 마른기침을 뱉어내기 바쁜 병든 노인이다.
그러니까 지훈은 술이나 담배 값을 뜯어내기 위한 협박과 폭력을 휘두르고 두 덩치들은 걸려든 먹잇감이 덤비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대비하는 역할분담으로 지민과 병든 노인을 분탕질 중이었던 것이다.
“야! 김지훈이,”
“와요?”
“너 자꾸 이럴래?”
175Cm 키에 다른 부위보다 덜 발달된 듯 보이는 짧은 팔, 스포츠머리에 주저앉은 주먹코, 감은 듯 뜬 듯 종잡을 수 없는 일자 눈, 검게 그을린 피부와 공사판 일로 다부진 체격,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우악스러운 지훈이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놓고 꾸부정하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준을 향해 종잡을 수 없는 일자 눈을 치켜뜬다.
“인사도 했는데, 와 그라는교?”
“뭐 인사! 함부로 힘자랑하다, 잘못 걸리면 너 죽는다고 했지.”
카랑카랑한 준의 우격다짐을 코웃음으로 받아 넘긴 지훈이 뒤를 힐끔거린다. 뒤엔 눈 둘 마땅한 곳을 찾는 덩치와 밉지 않게 생글거리는 덩치가 떡 벌어진 어깨를 과시하며 사이좋게 서있다.
“흣”
“뭐, 이 새꺄! 어떻허자고?”
“행님, 옛날에 지한테 빚진 것 있지예? 오늘 해결하입시더.”
여전히 꺾일 줄 모르는 준의 우격다짐에 지훈이 종잡을 수 없는 일자 눈을 번들거리며 뒤돌아 ‘휘적휘적’ 두 덩치들을 향해 걸어간다. 181Cm에 72kg인 준보다 어림잡아도 반 뼘 정도 크고, 어깨 또한 주먹 하나정도가 더 넓어 보이는 덩치들이다.
무일푼, 골병든 몸뚱이뿐...
1. 부산으로
빛바랜 보라색 모직벙거지에 풀어헤친 긴 머리, 준은 보름동안 투숙했던 여관을 나와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등에 짊어진 찐빵처럼 부풀은 옷가방과 손에 든 검은색기타케이스가 전부, 사람들의 지레짐작한 시선과 향수냄새가 사막태풍의 모래 알갱이처럼 허기진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다. 아침부터 굶은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갈 곳 없는 막막함이 미치도록 서글프다.
준이 부산에 내려오게 된 것은 장난 같았다. 대안학교설립을 위한 제주도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김포공항을 나서고 있었다. 뒷주머니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비발디[Vivaldi, Antonio]의 사계[四季]중 봄, 도착하자마자 궁금함을 못 참는 버릇처럼 전원을 켠 핸드폰 벨소리다.
“예~ 이준입니다.”
“준이가! 내다. 니 지금 어디고?”
불우이웃돕기거리공연으로 경남지역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던 성호였다. 그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로 준과는 공연을 같이한 것이 인연이 되었는데, 종종 의정부 집까지 찾아와 친분을 과시 했었고, 제주도에 있던 동안도 잊어버릴만하면 전화통화로 자질구레한 사연들을 늘어놓는 소식을 전하곤 했었다.
그러나 준은 학교설립으로 의기투합했던 친구들과의 갈등 때문에 하루일과를 술과 낚시질로 보내야 했었다. 몽상가에게 자본 없는 현실은 무기력한 조롱거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돈으로 저울질하는 타협은 죽기보다 싫어 육지를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싫었던 것이다.
“김포공항, 근데 나 나오는 것 어떻게 알았소?”
“내가 쪽집개가 그걸 다 알게! 학교에다 연락해봤다 아니가. 뭐 잘됐다. 쭌아 니, 지금 부산에 올수 있겠나?”
“무슨 일 있소?”
“부산에 비가 엄청 와가 난리다. 그래 부산역광장에서 ‘수재민돕기모금공연’할낀데, 니 내려와가 일주일만 도와도.”
김포공항에 내린 준은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계시는 의정부가 아닌 부산으로 향했다. 이상기온으로 퍼붓다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비릿한 바다향이 적당히 뒤섞여 활기보단 어수선함이 먼저 느껴졌던 부산역, 모든 일은 보름 만에 악몽이 되어버렸다.
성호의 홍수라는 말은 구실일 뿐이었고, 준을 같이 공연할 후배라며 지인[知人]들에게 소개하더니 그동안 생활하면서 밀린 여관비, 밥값, 술값에 적잖은 돈까지 빌려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성호의 오랜 친구로 부산역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태민 조차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어째든 준은 현 상황을 이겨내고 다른 인생을 살아보던가? 아니면 또다시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사회부적응자’가 될 기로[岐路]에 서야했다. 그러나 선택은 성호의 채무를 대신 변제하겠다는 것으로 단호했다. 그런데 4인용 탁자2개를 붙어놓고 둘러앉은 태민과 악기점, 술집, 여관사장님들은 의심의눈초리를 반짝이며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생각지도 않는 준의 선택은 의심해 볼만한 여지가 충분했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2. 만남
얼마나 걸었을까? 벌써 서면번화가다. 양쪽도보에는 젊은이들의 싱그러운 행렬들이 넘실거리는 강줄기 같고, 차선 바깥쪽을 따라 줄지어 서있는 액세서리[accessory]자판리어카들은 행렬들의 넘실거림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barricade]같다.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도 유난히 눈에 띠는 레코드판 난전[亂廛]이다. 확연하게 표가 나는 것은 최소한 한두 명의 손님들이 구경하고, 흥정하는 액세서리리어카와는 다르게 눈길조차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붙어있는 ‘명반 판매합니다.’란 문구가 접근금지 푯말이 아니가 싶을 정도다.
준은 기타케이스를 아스팔트바닥에 내려놓고, 얼굴에 땀을 훔치며 쭈그려 앉는다. 그리고 박스 안 LP판들을 능숙하게 꺼내 살펴본다. CCR, Tom Jones, Lobo, Joan Baez..... 배고픔에 암담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7~80년대 팝 아티스트[pop Artist]들의 회상이다.
“벙거지에 긴 머리, 와~! 키타, 멋지네.”
뒤돌아보는 준, 곱슬머리에 손때가 반질반질한 밀짚모자를 쓴 사내가 태양을 등진 채 서있다. 비쩍 마른 몸이 그렇잖아도 큰 키를 더 커 보이게 하는데, 구릿빛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표정은 누가 봐도 인상적이다. 준과 눈이 마주치자 목에 두른 노란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등받이가 있는 파란플라스틱의자를 파라솔 안으로 끌어당겨 앉는다.
“뭐 오핸 마시고 손님도 없는데, 키타연주 함 해보소. 내, 밥 살텔께네.”
준은 레코드판을 내려놓는다. 대중음악역사상 가장 성공한 그룹으로 1963년 오빠부대의 원조인 비틀마니아[Beatlemania]란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당대의 흑백음악인들 모두에게 칭송받았던 멤버전원이 영국 리버풀[Liverpool]출신인 비틀즈[Beatles]의 빽판이다. 중기에 ‘Yesterday’와 후기의 ‘let it be’등 수록곡들의 시대적 조합[照合]이 ‘뒤죽박죽’ 제멋대로다.
“진짜 밥 사는 거죠?”
말끝머리에 힘을 주며 등에서 풀어 내린 옷가방을 깔고 앉은 준, 자신의 마음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사내의 대답을 들으며 검은 케이스 안에 기타를 꺼낸다. 시쳇말로 잘나가던 시절 장만했던 300만 원짜리 클래식기타다.
“아~! 박수 칠정도면 밥뿐이겠습니까. 기분인데 술도 한잔 사지예.”
보라색모직벙거지, 자동차가 지나칠 때마다 살랑거리는 꽁지머리, 움직임의 각도에 따라 ‘번들번들’ 카리스마를 내뿜는 기타,.... 지금껏 별 볼일 없었던 길거리 한 귀퉁이풍경이다.
“드라랑~ 띵, 딩, 띵............”
준이 연주를 시작하자 가던 발길을 멈추고 좌판 앞으로 다가서는 사람들, 표정들이 진지해지더니 연주가 끝나자 박수에 환호성을 친다. 레코드좌판주인장 또한 의외[意外]라는 듯 감상을 평하며 준이 내려놓았던 비틀즈 빽판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던진다.
“앵콜~ 짝짝짝~~~”
“와~! 비틀즈에 예스터데이[Yesterday] 아닌교. 아제는 무지 쉽게 연주하네.”
“.................................”
대답대신 구경꾼들의 시선을 즐기며 기타 줄을 조율하는 준, 레코드좌판주인장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의외의 연주 실력에 확인이 필요한 구경꾼들을 대변[代辯]하는 재촉을 한다.
“아제요. 아쉬운데 한곡 더해 보소!”
기다렸다는 듯 오른쪽 입 꼬리올린 미소를 지으며 기타를 연주하는 준, 흥겨운 비긴템포[beguine tempo]다. 시각적인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박자에 맞춰 가볍게 몸까지 흔들자, 레코드좌판주인장 또한 가볍게 몸을 흔들며 강약을 조절한 손놀림으로 기타연주를 받쳐준다.
흥겨움이 농염[濃艶]한 기타연주와 어울리는 교묘한 박수소리, 중년의 노신사가 구경꾼들을 배경으로 몸을 흔들며 나선다. 백구두에 빨간 넥타이를 맨 하얀 정장차림, 관록[貫祿]을 엿볼 수 있는 유연한 스텝[step]과 몸동작, 구경꾼들이 흥미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한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재대로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에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춤동작이 파트너[partner]라도 있는 듯 절도 있게 활발해진다.
막힌 길을 비켜가는 사람들, 왁자한 소음과 교묘하게 어울리는 기타소리, 엇박이 되었다가 정박이 되는 박수소리, 절도[節度]있는 동작으로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노신사, 보라색모직벙거지에 갈색뿔테안경의 사나이, 꽁지머리를 ‘살랑살랑’ 몸을 흔들 때마다 각도를 달리하며 ‘번들번들’ 카리스마[charisma]를 내뿜는 기타............
“짝짝짝............”
“와! 끌로드 치아리(claude ciari)에 래 플레아 (La Playa) ‘밤안개속의 데이트’주제곡 아닌교?”
“오래 되서 제목은 잘..........”
구경꾼들의 박수소리에 뭔가 발견한 아이처럼 호들갑스런 레코드좌판주인장, 약지가 구멍 난 목장갑 벗은 손을 내밀며 일어난다. 준 또한 간발의 시간차로 일어나며 레코드좌판주인장이 내민 손을 잡는다.
“뭐 아무튼, 내는 김 상중입니더.”
“이준입니다.”
절도[節度]있는 춤 동작으로 흥을 돋웠던 노신사, 준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그리고 잡은 손에 손을 더해 흔들며 속마음을 늘어놓는다.
“야~! 나하고도 악수 한번 합시다.”
“야! 예.”
“길거리에서 이런 음악을 라이브로 들을 줄이야! 귀가 즐거워서 어디 몸을 가만둘 수가 있어야지!”
“아닙니다. 어르신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요.”
세 사람의 손을 잡고 흔들며 나누는 통성명, 구경꾼으로 뭉쳤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간다. 볼 장 다 봤다는 걸 눈치 채고 원래 계획했던 행선지를 향해 갈 길을 재촉하려는 것이다. 그래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몇몇은 각자 개성 있는 포즈로 LP판들을 살핀다. 앨범재킷[album jacket]만을 보겠다는 듯 박스 안에 LP판을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는 이도 있다.
기분 좋은 너스레를 늘어놓던 노신사가 이런 변화된 환경이 아쉽다는 듯 뒷주머니지갑에서 꺼낸 만원권 지폐를 내민다.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와봤는데, 와~아! 진짜 옛날 생각나게 하데, 바쁘지만 않으면, 한곡 더 청해 듣고 싶은데, 그건 그렇고 이건 성의니까 받아주게.”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준이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상중이 타박하듯 타이르며 몸을 낮추는 인사로 노신사의 손에서 지폐를 낚아 채 준의 청바지주머니에 반쯤 쑤셔 넣는다. 구릿빛 얼굴에 하얀 이를 드려내는 것이 미워할 수없는 행동이다.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교. 어르신 무안하구로. 감사합니다.”
“주인장 인상이 참! 좋네. 나중에 LP판 좀 사려 와야겠군.”
뒤돌아서는 노신사의 칭찬에 상중은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인 하얀 이를 드러내며 허리를 굽실굽실 마중을 한다.
“살펴가시이소. 한번 들리시소. 지가 커피 한잔 대접하겠심다.”
그리고 자신이 앉았었던 의자를 준에게 권하며 뒤에 의자를 끌어 당겨 앉는다. 여름 볕에 노골해지도록 방치해 놓았던 등받이가 없는 손님맞이용 빨강색플라스틱의자다.
“청바지에 돈 챙기소!”
“아! 예, 감사합니다.”
챙겨주는 것에 허리 굽혀 감사를 표한 준, 반쯤 삐져나온 만 원짜리 지폐를 쑤셔 넣으며 상중이 권한 자리에 앉는다.
“아제, 키타리스튼가베?”
“뭐 작곡을 좀, 하다 보니.”
“와~! 그럼 작곡갑니까? 뭔 곡 작곡했는교?”
“가수들한테 몇 곡 줬는데 히트곡은 없습니다. 말해도 잘 모를 겁니다.”
“어데, 작곡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인교! 뭐, 때가되면 히트곡도 나오겠지예! 근데 서울에서 왔는교?”
“아닙니다. 오긴 제주도에서 왔는데, 설명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말씨는 서울 말씬데, 무전여행 하는 가베?”
“아뇨. 고향은 전북 정읍인데, 의정부에서 오래 살아 사투리가 없습니다.”
“잠깐, 잠깐만.”
“?..............................”
“우리 인사도 했는데, 커피라도 한잔 하입시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상중이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들을 두 손 모아 ‘짤랑짤랑’ 흔들어대며 잡화점 옆 자판기를 향해 걸어간다. 장기매매, 급한 돈 해결해드립니다, 선원급구, 등의 스티커로 도배된 커피자판기다.
“아니 무전여행도 아니데, 무슨 일로 제주도에 까지?”
“아! 예. 친구들이랑 대안학교를 만들었는데 뭐 마음이 안 맞아 그냥 나왔습니다.”
“사연 많은가베? 안 바쁘면 나랑 있다, 저녁 먹고 내 후배 만나려 가입시다.”
“..............................”
“내, 오늘 먹고, 마시고, 자고 풀코스로 모시께.”
“뭐 그렇게 까지!”
“그래하입시다. 그 친구도 아제처럼 키타를 쳤는데, 잘 통하겠네. 술도 한잔하고.........”
그렇게 종이커피를 홀짝거리는 친숙함에 준이 지난 보름동안의 신세한탄을 늘어놓자, 상중 또한 자신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토막을 늘어놓는다.
“와~! 그런 일이 있었는가베. 내도 부산에서 꽤~ 큰 레코드 가게를 했는데, 빌어먹을 IMF 때문에 가게 부도나삘고, 마누라 도망가삘고, 빚보증 때문에 은행에 집 뺐기삘고, 술로 세월아 내월아 하다 몇 번 죽을라꼬 했는데, 죽지 못해 이레라도 한다 아닌교.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죽으라는 법 없으니까네. 힘내소.”
“예 감사합니다.”
“아! 그럼 아침도 안 먹었는가베?”
“뭐 괜찮습니다.”
“그럼! 내랑 비빔밥이라도 한 그릇 하러 가입시다.”
일어선 상중이 머뭇대는 준을 부축하듯 달래며 도심지 의심스러운 골목을 익숙하게 앞장선다.
“장사는 어떻하시고?”
“장사는 뭐! 1500원 짜리데 부담 갖지 마소.”
식당에서 다시 난전으로 시시덕거리는 이야기가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장황하다. 그렇게 장사를 정리한 상중, 뒤꽁무니에 준을 단 바쁜 걸음이다. 후배와 약속한 장소를 향해 가는 것이다.
기름 냄새, 쇠 냄새가 풀풀한 공업사 간판들이 도열[堵列]하듯 붙어있는 뒷골목 깊숙이 단비소주방, 인적 드문 어둠에 불안이 좀 지나치다 싶을 때 눈을 환하게 하는 불빛, 요염[妖艶]하다. 상중이 밤색알루미늄출입문을 잡아당긴다.
“캭~”하며 귀청을 찢는 소리와 더불어 코끝을 물씬 자극하는 음식냄새, 누런 물들어 흐릿한 형광등불빛, 손님들이 3~4명씩 짝 지어 앉자 있는 4개의 낡은 4인용탁자위엔 술이며 담배, 안주거리가 널려 있다. 그리고 자욱한 담배연기와 왁자지껄한 사연들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와 뒤죽박죽 한마디로 정신사납다.
3. 다른 시작
두 사람이 확인하지 못한 구석에 4인용 탁자를 뭐라도 되는 냥 차고앉자 있는 사내, 게슴츠레한 눈으로 손을 흔들며 일어난다.
“행님, 여깁니더.”
“벌써 한잔 했는가베!”
“기다리다. 그래 됐심더. 앉즈이소.”
인사를 대신해 권한자리에 상중이 앉으려다 말고 준에게 인사를 종용[慫慂]하는 소개를 한다.
“아 참! 내 정신 좀바라. 서로 인사부터 하이소. 후배데 아제처럼 키타를 쳤지.”
“이준입니다.”
“아! 예~ 지는, 안경탭니더.”
“예전엔 이 친구도 아제처럼 긴 머리 휘날리며 잘 나갔제.”
“행님도 참! 쑥스럽게 와 이라는교.”
“맞다 아이가. 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니 키타 메고, 아가씨 끼고 잘 나갔다 아니가.”
“아제 들어오시는데 참! 옛날 생각나데예. 반갑십더.”
손을 맞잡고 분위기를 띠우기 위한 너스레로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은 세 사람, 서먹함도 잠시다. 소주 몇 잔에 데워진 정신이 왁자지껄한 환경에 적응하는가 싶더니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오히려 시끄럽다.
“아제도 참! 오갈대도 없는 것 같은데, 수가 생길 때까지 내랑 노가다라도 뛰보는게 어떻켔는교? 도로 건너편 골목으로 한 백메다(미터) 쯤 들어오면 ‘행진인력’이라고 있으니까. 생각 있으면 다씨삼십분(5시30)까지 오소.”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하다 노래방기계 업그레이드[upgrade]에 밀리고 밀린 안경태, 젊은 시절엔 돈, 여자.... 무엇하나 무서운 줄 몰랐다. 거짓말 조금보태 기타만 있으면 널린 게 여자요, 빳빳한 현찰을 주머니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술과 여자에 마약까지, 그렇게 몇 번의 구속과 출소를 반복하는 사이 세상은 적응하기엔 너무나 생소하게 변해있었다.
“시간가는 줄 몰랐던 거죠. 아제도 내꼴라지 나지 말고, 안되겠다 싶으면 발 빼이소. 이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음악, 그것도 돈 있고 빽 있어야 음악이지, 나이 먹고 돈 없어보이소. 음악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음악! 구걸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제. 안 그런교?”
세월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변화를 요구한다지만, 누군가에게 변화란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익숙지 않은 현실을 인정 할 수 없었던 안경태는 매일 매일을 케케묵은 넋두리에 술타령이었다. 결국 만나는 여자들마다 3류 딴따라, 사이코란 악담을 퍼부으며 떠나버렸고, 변변한 통장하나 없이 나이만 먹어버렸다.
그나마 아직 버텨낼 몸뚱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노가다라도 뛰어 떼거리를 해결하고, 마음 편하게 소주라도 한잔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혀 꼬부라진 안경태의 넋두리를 끝으로 술자리가 끝났다.
"저 자슥이 예전엔 잘나갔는데, 근데 아젠 어떡할랑교? 갈 때 없으면 우리 집이라도 같이 가입시다.“
“아닙니다. 아까 형님께서 챙겨주신 돈도 있고.”
“그깟 꼴랑 만원 갖고 뭘 어떻게 할라꼬? 미안타 생각 말고 같이 가입시다.”
“그게 아니라 찜질방에라도 가서 좀 쉬었다가, 아까 말한 인력사무실이라도 가 볼려구요.”
“그럴랑교. 그럼! 가든 안가든, 서면으로 오소. 같이 밥 한 그릇 하입시다.”
저만치 가로등 불빛 아래, 세월 먹은 점퍼 차림의 사내
휘청휘청 걸어가는 뒷모습
슬픔이다.
그래도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을 아낌없이 살았으니까.
아쉬운 것은 없다.
다만 온 뼈마디가 쑤셔 죽겠는데 주머니엔 먼지뿐이다.
사기나 협박 할 줄 모르는 몫이다.
아직 때를 못 만난 몫이다.
목 놓아 절규해 본다.
그래도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을 아낌없이 살았으니까.
정신이 명료해진다.
아! 풀어야 할 숙제
활성화되는 만신창이가 된 육신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 연로하신부모님, 이혼한 마누라, 돈, 명예, 탐욕......
새벽5시, 까칠한 낯빛의 준,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친 탓이다. 찜질방을 나와 경태가 술기운을 뱉으며 가르쳐준 골목골목을 여유 있게 헤집는다. 상중과 헤어진 후 다녀간 덕분으로 자주 다닌듯한 느낌이다.
꼭대기에 행진인력이란 획이 거친 빨강페인트글씨가 인상적인 아이보리색3층 건물, 텅~텅~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짓누르며 올라간 3층 벽에는 행진인력이란 빨간 글씨에 흰 아크릴판 화살표가 붙어 있다. 따라 들어간 복도 끝 황갈색 문, 준이 행진인력이란 먼지 먹은 명패를 노려보며 머뭇댄다.
문 넘어 부딪쳐야 될 생소한 환경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밤새 고민해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손잡이를 돌려 찰깍거림을 확인하며 밀고 들어간다.
50대로 보이는 두 사내가 검게 선탠 한 창문을 배경으로 놓여있는 긴 책상에 앉아 있다. 한사람은 신문을 보고, 한사람은 두 대의 전화를 돌려받으며 필기하는 사무가 바쁘다. 문 옆벽 쪽으로 쪼르륵 붙어있는 색깔이 제멋대로인 3개의 3인용소파와 여러 개의 1인용의자엔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행여 방해나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신문 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커피포트가 성급하게 김을 내뿜는 싱크대 앞엔 몇 명이 종이컵을 든 채 서성이고 있다. 개운치 않은 아침을 일회용봉지커피한잔으로 깨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왁자지껄한 활기보단 숨소리조차 내쉬기 불편한 침묵이다. 다만 나지막이 주고받는 목소리와 신문 넘기는 소리,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사이로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간절한 눈빛을 번들거려볼 뿐이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呼名]돼야 입에 풀칠할 돈이라도 만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왔는교!”
사무실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경태, 고개를 까닥이는 준의인사를 반기며 일어나 검게 선탠 한 창문 앞 책상을 향해 걸어간다.
“소장님. 아까 말한 친굽니다.”
“주민등록증 가져왔는교?”
“예. 여기!”
“하~아! 일하겠단 사람들은 많은데, 일거리는 없고 이거 죽겠네.”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중년의 사내, 보던 신문을 접으며 자신의 처지를 ‘투덜투덜’ 준에게 건네받은 주민등록증을 훑어본다. 그리고 옆에 앉자 울어대는 두 대의 전화를 받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사내에게 건넨다.
“이거, 경태씨랑 같이 보네소.”
준은 그날부터 가을까지 노가다 판을 누볐다. 아침은 오전 참으로, 저녁은 상중을 찾아가 1500원짜리 비빔밥으로, 잠은 찜질방이나 전포동과 부전동 일대에서 노숙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가자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액수가 적은 채무관계부터 해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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