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풀이
“안녕하세요. 형님.”
“아니! 쭌이 니가 왠일이고? 서울 안 갔나?”
“참! 형님도, 인사 없이 가는 법 있답니까?”
“일루와 앉자라. 커피 한잔 할래?”
“아니 커피는 됐구요. 저~ 형님.”
“와? 내한테 할 말 있는가베?”
“뭐 좀...........”
“와? 말해봐라.”
“다름이 아니라 악기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와?”
“공연을 좀, 형님도 아시다시피 내가 부산에 온게 ‘수재민돕기공연’때문이잖아요.”
“근데?”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더라도 일단 공연은 하고 갈려구요.”
“그래! 그럼! 공연은 어디서 할낀데?”
“밀리오레 앞에서 목, 금, 토, 세시부터 여섯시까지 한 달 동안 하기로 하고, 모금한 돈은 전포복지관에 기부하기로 했거든요.”
“한 달이라....... 그럼! 우선 저기, 저것 갖다 써라. 공연하는 덴 큰 지장 없을끼다.”
악기점 안을 휘둘려보던 사장, 턱짓으로 가르친 쪽엔 보호철망이 녹슨 스피커에 노래방초창기에나 썼을 법한 장비들이 모여 있다. 준은 그렇게 후원받은 장비로 목, 금, 토요일은 정해진 공연을, 나머지 요일에는 노가다용역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기부한 모금액은 복지관에서 독거노인들 반찬 마련하는데 쓰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준의 생활에도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부전동악기상가를 가기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이! 머리 긴 총각.”
길 건너 오토바이수리 점, 얼핏 봐도 직원이라기 보단 사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을 훌쩍 넘은 사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면식[一面識]이 없는 얼굴인 것 같아 가던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중년의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 준을 향해 손을 까불린다.
“내 어제 친구들이랑, 소주 한잔하러가다 아제 노래 한참 들었는데, 모금한 돈 진짜로 기부하는교?”
“노가다 벌이가 없을 땐 방값으로 십오만원 정도 빼고 요 위에 있는 복지관에 기부합니다.”
“그래예! 어제 모금함에 돈을 집어넣는데 그게 궁금하더라고, 근데 노가다 벌이가 뭔교?”
“밥벌이로 노가다를 뛰거든요.”
“아니 젊은 사람이 먼저 먹고 살아야지 그래가 되겠는교.”
“저도 한 달만 하고 관둘겁니다.”
“젊은 친구가 좋은 일 하는데 다른 건 그렇고, 내 안 쓰는 발전기가 있으니까 필요 하면 말 하소.”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고 이번엔 준이 공연장소인 서면 밀리오레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나쳤던 택시가 후진으로 다가와 준 앞에 멈춰 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자 다짜고짜 손을 내미는 운전사, 기타튜닝머신이다.
“자! 받으이소. 내도 대학 다닐 때 그룹 했는데, 부럽심더.”
손님을 태우고 오가며 준의 공연을 목격한 택시운전사, 뭐 도움 될게 없을까하다 집안을 굴러다니는 ‘기타튜닝머신’을 들고 온 것이다.
이런 우연을 가장한 변화 속에 공연계약이 임박한 마지막 주 금요일은 금방이었다. 공연을 마친 준이 장비정리로 바쁘다. 곧바로 있을 밀리오레자체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공연 끝난나?”
“어! 형. 여긴 어떻게?”
태민이다. 부산역 인근에서 제법 큰 식당과 술집을 운영하는 태민은 사기 친 돈을 들고 사라진 성호의 오랜 친구로 혈혈단신[孑孑單身] 부산으로 내려온 준에게 잠자리를 비롯해 생활의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게 보증을 서줬던 사람이다. 좋은 일 하겠다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던 것이다. 성호가 그런 자신의 뒤통수를 쳤을 땐 원망하기보단 “이게 다 친구 잘못 둔 내 탓 아니가. 누굴 탓하겠노.”하며 준의 손에 차비를 쥐어줬고, 막노동판을 전전할 땐 심심찮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잔을 나누며 피곤함을 달래줬었다. 채무관계 또한 대신 책임지는 것으로 청산[淸算]해줬었다.
“니 소문이 부산역까지 났다 아니가. 끝나고 소주 한잔 어떻노?”
“뭐, 고 갈비라면 한잔 생각해 볼 수도 있죠!”
“자슥하고는! 그래 하자.”
6. 부산역으로
“한 달 다 돼간다 아니가. 이젠 어떻할끼고?”
“뭐 할 것 없으면 다시 노가다라도 뛰 야죠.”
“서울 안 올라갈 끼가?”
“서울! 서울이라........ 갑자기 까마득하네요.”
마시려던 술잔을 내려놓은 준, 표정이 어둡다. 태민은 위로라도 하려는 듯 나지막이 늘어놓던 목소리를 감탄사와 함께 제 높이를 찾더니 끝머리쯤에는 격양[激揚]된 시비조다.
“니도 이젠 정착해야 되지 않겠나? 아~! 니 그러지 말고 공연 역에서 해라! 원래 부산역에서 공연 할라 했다 아니가.”
“참 ! 형님도, 하고 싶어도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니 공연하는 거 보니까. 우리 단란주점에 있는 노래방기계하고 똑같데! 행수 몰래 앰프랑, 스피커랑, 챙기면 되지 않겠나. 문젠 전기데.”
“전기는 후원받은 발전기가 있으니까 걱정 할 건 없는데...........”
“그~래! 그라믄 생각할게 뭐 있노. 부산역으로 가야제.”
저녁이면 겨울을 실감나게 하는 늦가을, 준은 술기운 풀풀한 태민의 설득 반 호기심 반에 떠밀려 부산역으로 갔다.
어느 누구통할 사람 없고 방법이 없으면 무대포가 최고인 법, 준은 불안한 마음으로 공연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사내, 우려했던 대로 대화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주먹을 휘둘렸다. 그러나 스트레이트펀치 흉내를 낸 준의 엉성한 목침 한방에 싱겁게 나가떨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패거리들이 경찰관을 부르거나, 다구리(집단폭행)보단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눈빛을 던지며 부축해 데려 갈 뿐이었다.
그 궁금증은 다음날 더 쌔 보이는 사내가 덤벼대는 것으로 풀렸는데, 이런 상황의 중심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준을 제외한 부산역식구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로 그가 바로 부산지역노숙부랑인들의 두목 성동근이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주먹질을 4번 정도 더하고 나서야 그가 나섰다. 반복되었던 꺼림칙한 일들이 거짓말처럼 정리되었고, 부산역 어느 누구도 공연하는 장소에 허튼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날씨를 실감하며 3시간을 공연한 첫날모금액이 32,760원, 처음부터 주먹다짐을 하며 심하게 부대낀 탓인지 매일 매일이 특별할 것 없이 부산역 환경에 적응해 갈 즘이었다.
공연을 마친 준이 추워져가는 날씨를 걱정하며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테인리스휴지통을 뒤지던 누더기차림의 노인, 꺼낸 신문지에 묻어있는 오물을 밥풀인양 떼어 먹는다. 이를 목격한 준이 말린다고 뛰어간 것이 실랑이가 되자 신문지는 힘없이 찢어져버렸다.
퀭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두려움을 조절해보려는 노인의 억지미소, 준은 찾아보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찾아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동안 저금해놓았던 모금액을 털어들고 부산역을 찾았다.
날씨가 추워진 탓에 썰렁한 부산역광장, 아무리 찾아봐도 밤새 눈앞을 어른거리던 노인은 보이지 않고, 광장분수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러싼 스텐리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여 앉은 김 서방만이 비둘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다. 노숙을 한 탓에 으슬으슬해진 몸을 햇볕에 말리며 심심 파적삼아 비둘기먹이를 주는 것인데, 새우깡을 던져 줄때마다 오밀조밀 모여드는 비둘기 떼들의 날개 짓이 전부 다 내 놓으라는 듯 폭력적이다.
50대 초반인 김 서방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니 뭐니 하는 한문서적들을 격조[格調]있게 읊어대는 학식의소유자로 술만 먹으면 주체할 수 없는 도벽 때문에 노숙자가 된 사람이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기보단 모든 일들을 운명으로 받아드렸다. 누명을 쓴 채 교도소에 갈 때도 그랬다. 준이 부산역에 와 공연보다도 싸움하는 날이 많을 당시엔 구걸한 우동 한 그릇을 “추운데 한 그릇 하소.”하며 코앞에 권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시커먼 땟국이 눌어붙은 엄지손가락을 담근 우동, 그 후론 외롭고 힘들 때면 젓가락질 한 번에 입맛만 버리는 호사스런 중독이 되었다.
“몸 말리고 있습니까?”
“어서 오이소! 가수선생 아닌교.”
거수경례하듯 햇볕을 가리며 올려다보는 김 서방, 준이 옆 경계석에 주저앉는다.
“근데, 사람들이 없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다 대합실에 올라가 있다 아니요.”
“예~!”
“근데 무슨 일로 그라는교?”
“다름이 아니라 내가 공연해 모아 놓은 돈이 좀 있는데, 모두 모여 식사나 같이할까 해서요.”
“가수님도 참! 좋은 노래 들려 준 것만도 어덴데, 우리가 아무리 굴러먹어도 염치가있지!”
“그게 아니라 모금한 돈을 복지관에 기부해 왔는데 독거노인들 반찬 만들어 준다고 말만하지 무슨 반찬을 해주는지 말 한마디 없고 모자란다고만 하니, 차라리 부산역식구들 모여 밥이라도 한 끼 배불리 먹었으면 해서요. 나도 이젠 부산역을 떠나야 할 것 같고!”
준의 말하는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 서방, 비스듬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머니를 뒤져 찾은 담배꽁초를 추려 입에 문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는 동시에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후~ 이런 날엔 수재비가 딱~ 좋은데!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고 추위에 배가 출출해지면, 옹기종기모여 듬성듬성 대충 띄워 넣고 끓여먹던 수제비.”
길게 토해내는 희뿌연 고뇌, 일어서려던 준이 다시 주저앉으며 김 서방과 비슷한 목소리 톤으로 장단을 맞춘다.
“그럼! 수제비 먹으러갑시다.”
“근데 이 근처에는 수제비 파는 데가 없심더. 있다 해도 받아주겠는교? 우리가 아무리 빌어먹는 거렁뱅이라도 눈치가 있지. 끓여먹으면 모를까.”
“그럼! 뭐! 끓여 먹읍시다.”
준은 그길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한 몇몇의 노숙부랑인들과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수제비 끓이는데 필요하다 싶은 도구들과 음식재료들을 샀다.
7. 실직 노숙인 조합.
준에게 허기 채울 식재료 살 자금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노숙인들 사정[事情]에 깊이 관여하면서 집에 간다면 차비를 줘야 했고, 아프다면 병원을 데려가야 했다. 일 나간다고 하면 작업화 등을 해결해 줘야했고,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경찰서며, 법원이며, 변호사를 쫓아다녀야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모금공연을 계속해야 했다. 지금이야 거리공연라면 이런 저런 민원까지 해결해가며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일주일이면 1~2번씩 단속관련조례를 들이대며 범죄행위라 말하는 공무원들에게 “법대로 해라”를 외치는 식이었다.
준이 부산에 오게 된 것이 “수재민돕기공연”을 하기 위해서라면 자본우선주의 재벌국가에 난민(難民)인 노숙부랑인들은 머물러야 될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활동들이 이런저런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수억 원을 기부 받았다는 등의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에 시달리기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투쟁’이라는 흰색 글귀가 선명한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른 사람들이 완연한 봄날햇살을 받으며 부산역 한 쪽에 천막을 친다. 3미터높이장대에‘부산양산해고복직투쟁위원회’란 깃발이“푸드득, 펄럭, 펄럭,”심상치 않은 절규를 토하며 몸을 흔든다.
그리고 해고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확성기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절규의 난장[亂場]이며 부산역광장을 선동하는 촛불 밝힌 노동가요열창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아직은 차가움이 더한 봄비다. 제법 굶어지는 빗줄기에 노래를 멈춘 준이 서둘러 공연 장비를 정리한다. 그러나 여전히 확성기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열변을 토하는 사내, 170Cm도 안돼 보이는 키에 모자 깊숙이 파묻힌 까무잡잡한 얼굴, 덥수룩한 수염과 이글거리는 눈빛, 우중충한 비옷차림이 비를 피해 이리저리 뛰는 어수선한 환경과 교묘하게 어울려 공포영화속배우 같다.
장비정리를 끝낸 준이 모금함을 들고 가 빨강플라스틱의자 위에 놓여있는 모금함에 털어 붓는다. 비를 맞아 비닐테이프로 덧붙인 흰 도화지가 떨어져 ‘너덜너덜’ 바커스박스라는 것이 탄로 난 모금함이다.
“와 이라는교?”
“비도 오는데! 짬뽕이나 한 그릇하고 하십쇼.”
다음날, 멸치육수물이 구수하게 끓고 있는 둥근 들통을 노숙부랑인들과 둘려 싸고 서있는 준, 수제비를 떠 넣느라 바쁘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을 끓여야했던 거리노숙부랑인들을 위한 무료배식이다.
“도와줄 것 없는교?”
준이 뒤돌아보자 어제 비를 맞으며 열변을 토했던 사내다. 도와줄 일 없다는데도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서있다, 긴 줄에 끼어 수제비 한 그릇을 받아먹는다. 그리고 두 명의 노숙부랑인이 여자화장실을 ‘들락날락’ 눈치껏 퍼다 나른 수돗물에 설거질 돕겠다며 달라붙는다.
그렇게 설거지가 끝나자 빨갛게 체온저하를 호소하는 손을 비벼대며 입김을 불어넣는 사내, 준이 모락모락 커피 향 피어오르는 종이 잔을 건넨다.
“춥죠! 됐다는데, 하여간 고생 했습니다.”
300원짜리 자판기커피 잔을 받아든 사내, 짧고 두툼한 손을 내민다.
“아~! 춥네예. 참! 내는 부양해복투(부산, 양산 해고복직투쟁위원회)위원장 양춘복입니다.”
“예. 저는 이준입니다.”
“근데 매일 이례 합니까.”
“뭐 그렇죠.”
“누구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죽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방해나 안하면 다행이지.”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는교? 사람들도 참, 돈도 꽤 들겠는데예?”
“공연해 모금한 돈으로 되는대로 먹는 거죠.”
“와! 그럼 어제는 어떻게 했는교? 우리 모금함에 다 털어 부었다 아니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선생님도 길 위에서 일과를 보내시는데 그 정도야 대접받아야죠. 그리고 어젠 모금도 안됐는데요. 뭘,”
“그래도 이건 미안해서,”
“...............................”
“근데 이준이 본명인교?”
“예”
“와! 로맨스소설 주인공 이름 같네.”
가벼운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마친 두 사람, 자질구레한 너스레에 “후루룩, 후루룩,” 온 몸이 녹아들어간다.
양춘복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로 부산지하철해고노동자였다. 가난한 농부의 3남1녀 중 막내로 한참 예민할 청소년기에 아버지의 죽음, 솜 공장을 다니시다 기계에 팔이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하신 어머니, 그래도 굽실굽실 자식들 공부시켜야한다며 악착같이 시장 통을 누빈 대한민국 천민들의 어머니, 대물림되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가족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고교[광성공고]시절 전기면허를 취득하고,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빠른 취직을 위해서였는데, 그런 노력과 계획덕분이었는지 재대하자마자 부산지하철에 전기노동자로 입사[1987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살인적인 노동환경은 노동자들을 시위현장으로 내 몰았었고, 그 대열에 양춘복도 있었다.
“내는 노동운동이고 뭐고 잘 몰랐다. 삼시 세끼 때거리 해결하기도 바쁜 양산 촌무지랭이 자식이 뭘 알았겠노. 하지만 우리 일이라는 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아니가. 그럼 노동자와 시민들에 안전과 직결되는 것이 뭐가 있겠노? 인력충원 아니가. 근데 인력충원은 고사하고 말도 안 되는 돈타령만 해 댄다 아니가! 내 바라는 것은 아닌데~,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바라 악 소리 한번 못해보고 모두 저승행인기라.”
결국 1994년 전지협파업으로 구속과 해고, 1997년 복직, 그리고 또다시 반복된 구속과 해고란 우여곡절[迂餘曲折] 속에서 돈 없고 빽 없는 대한민국 노동자가 받아야 할 대가[對價]는 뻔했다. 수시로 느껴야하는 자살충동과 주체할 수 없는 폭력, 정신병원격리치료 행이었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안한 부인과 자식을 위해, 차이고 깨지면서도 투쟁을 외치는 동지들을 위해, 암담한 대한민국노동자들의 미래를 위해...........
그 후로는 꼭 노동판 일이 아닐지라도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동참했고, 그런 서러운 경험에서 우러난 이타적인 예민함이 두 사람을 일맥상통[一脈相通]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거리를 무대삼아 등을 비벼야하는 현실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준은 그렇게 서로에 푸념을 주고받는 술친구로 때로는 함께 행동하는 동지였던 양춘복을 포함한 몇몇 노동운동가들과 ‘실직노숙인협동조합’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숙부랑인들 스스로 대처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인권이니, 권익이니 하는 구호보다는 떼인 월급, 강간, 폭행 등과 같은 일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아야 40~50명이던 부산역노숙부랑인들이 300~400명까지 늘어났고, 대부분이 ‘실직노숙인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몇 명의 노숙자들이 민주노총간부들하고 만든 조직이라는 소문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래서 ‘철도노동조합부산지방본부’에서 지원해준 건물1층 패쇄 된 화장실을 개조한 2평이 안 되는 ‘실직노숙인협동조합’ 사무실에는 억울하고 절통한 수많은 사연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장애인, 알콜중독자, 범죄자, 동네양아치, 정신병자, 등이 직장에서 실직하고 가정문제로 가출한 이들과 뒤죽박죽 섞여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결을 위한 노력보단 모두들 똘똘 말아 알콜중독자나 정신병자 같은 낙오자나 강간, 절도범죄자로 몰고 가는 복음청결주의가 주도한 사회적 확산, 도덕적 낙인, 정치적 방관이었다.
그런 자본우선주의에 무사안일(無事安逸)과 승승장구(乘勝長驅)를 위해 길거리로 내쫓긴 사람들, 못 먹어 죽고, 추워서 죽고, 병들어죽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명복을 빌어주는 종교나 정치, 예술은 없었다. 노숙인들 조차 늘 일어나는 일, 언젠간 닥칠 일로 치부하고 당장 자신의 불행이 아님을 안도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 술잔 주고받기 바쁠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경계선상에 서서 입 다문 벙어리, 눈뜬장님이 되어 지켜봐야 하는 것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준은 “뭔가를 해야겠다.” 고민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거리에서 객사한 노숙부랑인들을 위한 ‘거리합동위령제’였다.
서울 대학로에서 노숙하다 객사한 선배가수 송영민의 죽음 앞에 어쩔 수없는 일로 치부하는 선후배들에게 화가 났고, 부산역노숙인들의 죽음 앞에 막연한 죄의식에 휩싸여 고민만을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철도노동조합부산지방본부’ 1층 창고에 70~80명의 실직노숙인협동조합원들을 모아 놓고 길고 긴 호소했다. 그리고 그 단합된 결과에 지역예술가들과 ‘부산지하철노동조합’에서 공연에 필요한 것들을 후원을 해줬다. 죽은 자를 위로함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화합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 모두들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2002년11월을 시작으로 매년10월이면 어김없이 위령제를 지냈던 것이 언론들에 관심을 받자, 이치에 밝은 청결주의자들의 지원금을 빼먹고 후원금을 받아내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끝 날줄 모르는 하얀 피들의 축제가 된 것이다.
어떤 미사어구로 꾸민다고 해도 누군가가 말하는 거리엔 문화란 어울림의 보편성보단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에 길들여져 억울하고 절통한 매너리즘[mannerism]만이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노숙부랑인들의 문제에 있어 수수방관[袖手傍觀]으로 외면할 때 나선 준의 행동은 입에 입을 거치면서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종교인이나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정치인, 기업가, 교육자 같은 기득권자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은 정치, 경제, 종교적 합리주의가 만들어 낸 난민으로 길거리를 표류하는 노숙부랑인들의 대부란 닉네임[nickname]으로 각종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이젠 무일푼으로 그에게 남은 것은 죽어서도 벗어날 수없는 족쇄 같은 명성과 평생 병원문턱을 베고 살아야하는 골병든 몸뚱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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