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사람들(18) - 거리의 법칙

People / 이호준 / 2012-06-26 17: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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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주간/연재소설] 3. 빌어먹을 부산역

다음날 진봉이 확인한 통장에는 30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이젠 벌려놓은 사업들을 정리하고, 서울로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사업이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근근이 이어온 장사, 그마저도 운영하고 있는 동생들에게 줘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상식에게 가면 최소한 영업부장 정도는 따 놓은 당상[堂上], 40이 다 된 나이지만 정 상식 밑에서 그 정도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까. 털어봐야 몇 백이 전부인 통장이나 챙기고, (설마 상식이 행님이 저 애물단지를 불렸을까?)하는 선후배들의 의심 섞인 배웅을 받으면 된다.

오후 4시48분, 부산역.

“서울, 가장 빠른 거, 아니, 6시쯤 출발하는 걸로 한 장 주소.”

이것으로 어쩌면 자신이 나고 자란 부산과는 마지막일지 모른단 생각에 6시 차표를 끊은 진봉, 마른오징어에 소주를 사들고 부산역광장가로수벤치를 차고앉는다. 파노라마[panorama]처럼 떠오르는 지난 일들, 특히 상식과의 만남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그런 진봉 앞에 한 사내가 손을 내밀며 머리를 조아린다.
“담배 한 대만 주이소.”
추레한 차림이 딱 봐도 노숙부랑인이다. 진봉이 성공하기 전엔 돌아오지 않으리란 굳은 다짐인 양 담배 한 개비를 귀에 걸며 갑 채 건넨다.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서는 사내, 진봉은 보는 둥 마는 둥 소주잔을 비운다.
“하이구 신사분요. 감사, 감사합니데이.”
“........................”

그렇게 끊어졌던 상식과의 추억을 더듬으며 마른 오징어를 찢어 ‘질겅질겅’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소주병을 드는데, 난데없이 끼어드는 불퉁한 목소리다.

“내는 삼천원만 주소.”

진봉의 코앞에 한손을 들이민 채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짝 다리를 하고 서 있는 중키의 사내, 소주잔을 채우다 말고 새우 눈을 치켜뜬 진봉의 어이없단 반문에 막무가내기 대거리를 한다. 이에 자리를 차고 일어난 진봉이 소주병을 들지 않은 손을 앞으로나란히 하듯 뻗어 밀쳐버린다.

“뭐..라꼬? 삼~천원.”
“누군 입이고 내는 주댕이가? 한잔하구로......”
“이 쥐 씨알만한 새끼가, 확~ 저리안가나.”

과장스럽게 두어 걸음 밀려나는 중키의 사내, 추레한 차림의 사내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여든다. 중키의 사내가 진봉에게 다가갈 때부터 노골적인 눈빛을 희번덕대던 사내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어 걸음 밀린 중키의 사내가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고, 가슴을 들이밀며 볼멘 악다구니를 친다.

“싫음 그만이지 사람을 와 치는데? 니 깡패가.”

“돈 좀 있는가베?”
“야! 야! 긴말 할 필요 없다. 누 경찰 부르고 119불러라. 병원 가 진단서 끊자.”
“뭐 갱찰, 진단서, 이 자슥들이,”

가재는 게 편이라고 모여든 사내들의 으름장에 좌우를 휘둘려보며 호통을 친 진봉, 들고 있던 소주병을 하늘 향해 “벌컥벌컥....크윽~” 벤치모서리에 내리치며 한발 나선다. “파아~ㄱ”하는 파열음과 함께 뾰족하게 양쪽 날을 세우며 사방으로 튀는 액체, 우악스러운 위기감을 조성하기엔 충분하다.

“내 대신동 강진봉이다. 댐비바라. 언놈이 먼저 댐빌 끼고?”

한 마리 맹수로 돌변한 진봉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패거리들, 말굽 형태로 둘러싼다. 우왕좌왕 겁먹은 것 같지만, 진을 치는 것이다. 말굽(U)의 터진 쪽으로 유도해 주춤거리든가, 도망치려하면 가로막고 다른 쪽을 터주는 실랑이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고전적인 진법이다. 피할 수 있으면 일단피하고 보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스스로 포기하게하려는 것인데, 진봉 또한 싸움이라면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몸이다. 양날이 뾰족이 선 소주병을 눈높이로 휘두르며 사방을 휘둘러보는 악다구니를 친다.

“누구든 덤비라. 확 쑤셔벌끼다.”

하는 짓이 몇 푼 뜯어내려는 빤한 수작, 밀고 당기며 버티다 느슨해진다 싶으면 그때 원하는 몇 푼 건네주면 된다. 그깟 몇 푼 그냥 줘버릴 수도 있지만, 언제 어느 자리든 건달하면 가오빨, 삥 뜯겠다는 소문이 난다면 그것으로 건달인생은 끝장나는 것이다. 때문에 불리해질 것 같다 싶으면 정면을 향해 날선 소주병을 망설임 없이 휘둘러 공간을 확보하며 몇 푼 던져 줄 기회를 엿봐야한다. 행여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굽의 터진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간 십중팔구 몰이 당하다는 짐승 꼴이 될 것이고, 그러다 일이 커지면 유혈이 낭자할 것은 안 봐도 빤한 사실, 119에 경찰서에.....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조금 있으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서울행 열차를 타야하는 진봉에겐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영화 속 느와르 장면이 벌어질 것 같은 긴박함에 숨쉬기조차 불편한 상황, 노숙부랑인들을 헤치며 한 사내가 나선다.

“비키 바라.”

벙거지를 비딱하게 쓴 동근이다. 잘 차려입은 한명이 굽실대는 의지를 다져보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진봉에게서 눈을 때질 않는다.

“행님, 지들이 알아서 하겠십더.”
“대신동이라꼬?”
“당신이 두목이가?”

그런 동근을 향해 날선 소주병을 오케스트라[orchestra]지휘자처럼 휘두른 진봉,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덩치가 눈앞을 훑는 소주병에 놀란 동공을 키우며 진봉을 향해 몸을 날리려하자, 쭉 편 팔로 이를 제지한 동근이 재차 묻는다.

“저 새끼가, 우리 행님한테, 죽을라꼬.”
“그라믄(그럼) 니 상택이 식구가?”
“좆까지 말고, 댐빌라믄 빨리 댐비라. 내 서울 가야한다.”
“알았으니까. 니 상택이 식구가?”

재차 날선 소주병을 휘젓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물어대는 사내의 여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진봉이 소주병 흔드는 지휘를 멈추며 누그러트린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 눈데? 우리 큰 행님 함자를 씨부리쌓노.”
“니 상택이 동생이란 말이제!”

확인된 사실에 동근이 옛 생각이라도 난 것인지 한숨 섞인 명령을 하며 뒤돌아선다.

“네 친구 동생이란다. 그냥 보내주라.”

그런 동근의 뒤를 좌우로 서있던 덩치 몇 명이 보디가드처럼 따르자 나머진 삼삼오오 흩어지는 것으로 말굽 진을 푼다.

“짜슥 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기백은 좋네! 짜슥, 서울 잘 가라.”
“기분도 그란데 통닭에 소주한잔 하려가자.”
“그래! 그래! 통닭에 소주 한잔, 동근행님 어떠십꺼?”

갑작스레 돌변한 상황에 진봉은 복잡해진 마음을 가누질 못하고 지켜보더니 ‘휘적휘적’ 걸어가는 사내들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를 친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예?”

때론 목숨을 담보해야하는 온갖 술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뒷골목 조직세계,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건달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준 보답을 해야 한다. 그것은 명령에 죽고 사는 조직건달이라 해도 목숨같이 지켜야하는 불문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와~? 알고 싶나?”:
“..................”
“자슥, 그라믄 맨 입으로는 안되제.”
“지가 한잔 사겠심더.”

뒤 돌아선 동근과 덩치들 보란 듯 서울행기차표를 구겨 던져버린 진봉, 배달시킨 탕수육에 자장면, 짬뽕 몇 그릇이 부산역광장바닥에 펼쳐지자 20명 정도가 모인 화해를 위한 술판이 벌어졌다. 그렇게 술판이 무르익자 담배다, 뭐다해서 진봉이 지갑 꺼내는 횟수가 많아지는 만큼 몇몇 노숙부랑인들 눈빛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눈을 떠보니까.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진 기라? 한 300만원 있었는데, 구두 한 짝도 온데간데없고, 와~ 미치겠데! 술에 수면제를 탄기제.”

다음날 해가 중천[中天]에 뜨고 나서야 진봉은 화장실 옆 화단구석에서 눈을 떴다. 구두 한 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구멍 난 엄지발가락엔 뭐가 묻었는지 울긋불긋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갑이 없어진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 그래서 기억속의 희미한 인물들을 찾아 부산역을 뱅글뱅글...........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던 것들이 한 4시쯤 되니까. 송사리 새끼들 마냥 한쪽구석에 모여 있는기라. 그래 가서 내 지갑 내놓으라고 했제. 근데 갑자기 이쪽저쪽에서 발길질에 주먹이 날라 오는데, 와~! 한 대로 못 때리고 뒤지게 맞았다 아니가.”

부질없는 옛 생각에 진봉이 헛웃음을 웃는다. 경찰관들은 다구리(집단폭행)에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쓰러져있던 진봉을 병원응급실로 옮기는 것 외엔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술 먹고 잃어버린 것 아니요. 누가 가져 간지도 모르고, 증인도 없는데 우예 찾겠는교? 그냥 잊어버리고 서울이나 올라가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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