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 생각하시오, 이 진사?”“어찌 나를 쥐로……”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이 진사가 아무런 표정 없이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습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시습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개똥만도 못한 놈아. 너 같은 놈들에게는 그런 표현도 과분하다. 쥐새끼는 제 몸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놈아. 거머리 같은 네놈이 한 일이라곤 열심히 움직여도 배고픈 가엾은 백성에게 들러붙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피 빨아 처먹은 것밖에 더 있느냐.”
“뭐라!”
외마디 소리를 지른 이 진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앉으시오.”
“내가 왜 이런 모욕을 참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당장 한양으로 들어가서 형조에 소를 제기하겠소.”
“과연 쥐새끼만도 못한 놈이로고.”
윤호의 제지에도 이 진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를 뜨려하자 시습이 낮지만 분명하게 말하였다.
“뭐라, 이 땡중이.”“왜 쥐새끼 굴로 숨으려고?”
“쥐새끼 굴이라니!”
“너같이 알량한 놈을 비호해주는 데가 쥐새끼 굴밖에 더 있겠느냐.”
이 진사의 연줄과 집안 모두를 싸잡아 쥐새끼라 표현하자 이 진사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너 같은 놈에게는 쥐도 과분한 거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놈아!”
시습이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하자 윤호가 얼른 소매를 잡고 헛기침을 했다.
“이 진사는 잘 들으시오.”
이 진사가 한숨을 내쉬고는 못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비록 이 진사 가문에서 조상 대대로 관리했다고는 하나 그 땅은 엄연히 나라의 소유요. 그런 연유로 관아에서도 설잠 스님에게 사용허가를 내주었소. 그러므로 설잠 스님께서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인 만큼 스님의 말대로 논의 자체가 불가하오. 이 진사는 다시는 스님이 수확한 농작물에 대해 이권을 주장해서는 아니 될 일이오. 알아들었소?”
“불복하면 어쩌시겠소?”
믿는 구석이 있는지 이 진사가 거만을 떨었다. 순간 시습이 혀를 차자 이 진사가 헛기침을 해댔다. 바로 그때 윤호가 매서운 눈으로 이 진사를 노려보았다.
“이보시오, 이 진사. 당신 뭔가 크게 오해하는 거 아니오?”
“무슨 말이오, 그게?”
“당신 같은 사람이 설잠 스님, 아니 조선천지가 한 목소리로 인정하는 김시습 선생과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시오? 조정의 내로라하는 고관들은 물론 심지어 임금들까지도 인정했던 분이신데 말이오. 아니 그리고 이런 일로 조정을 들먹이다니요. 조정이 무슨 당신 마누라 품이라도 되는 줄 아시오?”
윤호의 말에 이 진사가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이 진사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시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뭐요. 그래도 당신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요?”
기어이 윤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지금까지 관례가……”
“여러 소리 마시오.”
이 진사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린 윤호가 아전에게 붓과 종이를 준비하여 이 진사 앞에 내려 놓으라 지시했다.
“이게 무엇이오?”
“이 자리에서 설잠 스님께 각서를 써드리시오. 스님이 이 논에서 수확한 농작물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윤호의 낮으면서도 완고한 말투에 이 진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붓을 들었다. 잠시 후 지금까지 보였던 자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쓴 문건을 시습에게 건넸다.
“내 결례한 것 같소.”
시습이 이 진사가 건넨 문건을 읽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아! 이 종이쪼가리가 무슨 소용이냐. 이후로는 힘없는 백성의 피와 땀을 갈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네 마음에도 깊이 새겨두어라.”
시습이 이 진사가 건넨 문서를 갈가리 찢어 그의 얼굴에 던졌다. 이어 윤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걸어 나갔다.
모순
“스님, 안에 계십니까?”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에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시오?”
“소인 천 서방입니다요.”
천 서방은 시습의 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논을 도지로 일구는 사람이었다. 맘씨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으나 왕래는 별로 없었다.
“어인 일이오?”
시습이 책을 덮고 방문을 열자 천 서방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들고 서 있었다.
“가을걷이 한 쌀로 떡을 만들었는데 맛 좀 보시라고 가져왔습지요.”
“허허, 괜한 일을 하셨구려.”시습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당으로 내려가 천 서방으로부터 떡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도록 권유했다.
“아닙니다, 스님. 이만 가봐야지요.”“사람 정리가 그런 게 아니지요. 누추하지만 잠시 들어가시지요.”
우물거리는 천 서방을 방으로 인도한 시습이 상위에 책들을 정리하여 떡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내 집을 찾아주신 손님인데 그냥 보낼 수 없지요. 조촐하지만 성의려니 하고 마다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시습이 술병을 들자 천 서방이 손사래를 치다가 마지못해 자세를 바로하고 잔을 받았다.
“먹을 쌀도 부족할 터인데 떡을 해서 돌리다니요.”
시습이 말을 하고 저 역시 잔을 채웠다.
“쌀이나 떡이나 뱃속에 들어가면 매한가지 아닙니까요.”“그런가요?”
“그럼 다른가요?”
시습의 말에 천 서방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밥이나 떡이나 다를 건 없지요. 하지만 추수한 첫 곡식인데, 떡보다는 밥이 더 의미 있을 듯해 그런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선 한잔 드십시다.”
시습이 천 서방의 잔에 가볍게 부딪고는 단숨에 비워냈다. 그러자 천 서방 역시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워냈다.
“이 술은 무엇으로 만든 게요?”“그야, 쌀.”
천 서방이 말을 하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이들이 하도 떡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랬군요. 금년 농사는 잘되었소?”
“그럭저럭 열심히 지어 수확은 지난해보다 나았습죠. 하지만 잘되면 뭐 합니까. 그다지 달라지는 게 없는뎁쇼. 오히려 지난해보다 더 못합니다요.”“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지로 농사를 지으니 잘되건 못되건 간에 정해진 양의 곡식만 바치면 되지요. 그런데 올봄 춘궁기에 빌린 곡식까지 갚고 나니 전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고리의 이자를 바쳤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만.”“어린것들이 배고프다고 난리니 어쩌겠습니까. 고리라도 빌리지 않을 재간이 있어야지요. 그런 연유로 수확이 늘어도 나아지는 거 없이 결과는 늘 마찬가지지요.”
천 서방이 말을 마치고 숨을 내쉬다 꺽꺽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깔딱깔딱 넘어가다 다시 소생한 명줄 소리 같았다. 시습이 천 서방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잔을 채워주었다.
“도지로 빌린 논이 이 진사라는 작자의 논이지요?”“맞습니다.”순간 시습의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스님도 이 진사와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사건이라 할 것까지는 없지요. 그 작자가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내가 지은 곡식을 자기 소유라 우겨서 생긴 우스운 일이었지요.”시습의 말에 천 서방이 잠시 미소를 보이더니 잔을 비워냈다.

“스님 말씀만 들어도 속이 다 후련합니다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그러게 말입니다요. 저희 같이 힘없는 백성은 그저 죽으나 사나…… 배고플 때는 차라리 소나 말이 부러울 때가 있습지요.”
시습이 천서방의 말에 마음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다.
“스님은 참 이상한 분이십니다요.”“그건 또 무슨 말이오?”
“스님임에도 직접 농사짓는 일도 그렇지만 술이나 고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드시니 말입니다요.”
“중이라고 별다를 게 있답니까. 다 같은 사람인데요.”“그래도 중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지 않나요?”
“근실하게 살면 된다, 그저 이런 마음으로 열심히 제 한 몸 움직이며 살면 되는 게지요. 남에게 해 입히지 않고 남 아프게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럼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도 그렇게 살면 극락에 갈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극락이란 게 원래는 마음에 있는 건데.”
시습이 말끝을 흐리자 천 서방의 얼굴에 금방 근심이 어렸다.
“심려하지 마시오. 열심히 살다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게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스님.”
날이 저물 무렵 술병을 들고 집을 나온 시습이 이 진사의 집으로 걸음을 놓아갔다. 해거름 아래 아스라한 텅 빈 논을 바라보니 갑자기 허허로움이 밀려왔다. 잠시 울적한 마음으로 타박타박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도리가 팽팽해짐을 느꼈다. 천 서방과 마신 술 탓인지 자주 신호가 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얼른 논 한 쪽에 쌓여있는 나지막한 짚더미 옆으로 다가가 괴춤을 풀었다. 낫에 잘린 벼 밑동이 금방이라도 다시 자랄 듯이 아직도 생기 있어 보였다. 시원스레 볼일을 보고는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놓아갔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작금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교탄압이라는 조정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알량한 권세를 내세워 나라의 근간인 백성을 골병들게 하는 사회 분위기를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존재하고, 인간이 없는 하늘과 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백성도 없고 인간도 없는 붕괴된 삶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서로에게 희망적일 수 없다. 나라가 살려면 백성을 앞세워야 하고 사람으로서 살려면 서로 나누며 어우러져야 한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백성을 수탈하고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근본 도리마저 무시하는 자들을 향해 솟구치는 노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앞이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리 오너라!”
시습의 고함에 이내 인기척이 들리더니 대문이 슬며시 열렸다. 삐죽이 내미는 장정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스님이 이 시간에 어인 일이오?”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하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어섰다. 시습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하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쩔쩔매자 다른 하인 몇몇이 몰려왔다.
“이놈들아! 내 큰 쥐 잡으러 왔으니 어서 안내해라.”
“큰 쥐라니!”“이 집에 큰 쥐가 살고 있는 걸 내 이미 알고 왔다. 지체하지 말고 안내하라는데 왜 이리 꾸물대느냐.”
시습이 주위를 둘러싼 장정들에게 술병을 휘두르자 술이 튀었다. 하인들이 다가서려다 술이 튀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나왔는지 이 진사가 다가오다 시습과 눈이 마주쳤다.
“중놈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시습이 동작을 멈추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 진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똥개도 제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 이 쥐새끼가 딱 그 짝일세. 이놈아, 쥐새끼 같은 네 인생이 하도 가여워서 한잔하려고 이렇게 술까지 들고 찾아왔는데 반기지는 못할망정 푸대접하기냐?”
시습이 다시 병을 휘두르자 술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본 이 진사가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어서 이 중놈을 내치지 못할까!”
순간 주위에 둘러서 있던 하인들이 시습에게 달려들려 했다.
“술 한잔하자는데 기어코 물리치겠다! 게다가 쥐새끼가 좋아하는 곡식 낱알까지 주려고 직접 찾아왔는데 말이다.”
말을 마친 시습이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이 진사 앞으로 내팽개쳤다. 하인 하나가 얼른 종이를 주워 이 진사에게 건넸다. 종이를 살펴본 이 진사가 잠시 후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시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오?”“뜻은 무슨 뜻! 부처께서 네놈이 가여워 자비를 베푸는 게지.”
“그러면 수확한 곡식 모두를 내게 넘기겠다는 말이오?”“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릴 줄이나 알지,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내 지은 곡식 모두 네놈에게 주겠다. 단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가는 힘없는 백성은 그만 탐학하라고 주는 거다, 알겠느냐?”
이 진사가 다시 문서를 상세히 읽고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하인들이 물러서자 이 진사가 시습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역시 쥐새끼에게는 낱알이 최고인거야, 최고.”
시습이 걸음을 옮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진사가 시습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더니 물러나던 하인에게 주안상을 차려오라 지시했다.
“이 문서는 내 받을 수 없소.”
방에 자리 잡자마자 이 진사가 대뜸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한 말투였다.
“무슨 소리인가? 기껏 주겠다는데 안 받겠다니.”
시습의 말에 이 진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쥐새끼가 웬 한숨인가?”
시습이 빈정대자 이 진사가 시습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빼앗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자꾸 날보고 쥐새끼라 하는데 그 쥐새끼가 나뿐만이 아니다, 이 말이오.”“그게 무슨 말인가?”
“이야기하자면 사연이 길다오. 여하튼 관아에서도 스님의 수확물은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소. 해서 상납할 품목에도 빠졌으니 굳이 받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오.”
시습이 멍하니 이 진사를 바라보았다. 이 진사의 난처한 표정과 충격을 받은 듯한 시습의 표정은 주안상이 들어올 때가지 이어졌다.
“그러니 나만 나무라지 마시오.”이 진사가 잔을 채우자마자 연거푸 잔을 비운 시습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이 진사에게 건넸다.
“먹이사슬인 게요, 먹이사슬.”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보시오.”
“낸들 하루살이도 버거운 농부들에게 그 모진 짓을 하고 싶겠소. 날이면 날마다 마주치는 얼굴인데 말이오.”“그 말인즉슨?”
“우리 사회를 보시오. 이 나라에 백성이 있기나 하오? 막말로 백성이 인간이오? 그저 양반들의 수탈대상 아니면 화풀이 도구지요. 그런 연유로 먹이사슬의 하단부에 있는 우리 같은 부류는 백성의 피라도 쥐어짜야 한양 양반들의 곳간을 채울 수 있고 그나마 알량하게 살 수 있다, 이 말이오.”
말을 마친 이 진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바로 그 순간 시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는 게요, 스님.”
“이 진사도 쥐는 쥐지만 작은 쥐에 불과하구려. 그러니 내 큰 쥐를 잡아야겠소. 더 큰 쥐 말이오.”
말을 마친 시습이 방을 나서자 이 진사의 한숨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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