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7)

People / 황천우 작가 / 2012-09-04 18: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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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이 땡중에게 무슨 복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 내 염치 불구하고 배에 오르리다.”

선전포고

시습이 날이 밝자마자 술병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러해 전에 거열형을 당한 의인들(사육신)의 수급을 노량원에 안치시켜주었는데 가을이 가기 전에 혼이라도 위로해줄 요량이었다. 수락산 초입을 벗어나자 넓은 들 여기저기 노란국화가 어지럽게 피어있었다. 간간이 겨울을 느끼게 하는 찬바람에 국화도 빛을 잃고 있었다. 상념에 사로잡혀 걷다보니 어느새 송계에 이르렀다.

소나무가 많아서 이름 붙여진 송계를 따라 걷다 잠시 물가에 멈추어 섰다. 손을 뻗으면 바닥에 닿을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물에 잠겨 있는 돌에 올라 천천히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한 바닥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잡힐 듯 닿을 듯하면서 이내 멀어지고 사라지는 허망한 꿈같았다.

일어나 술병의 뚜껑을 열고 마치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소리와 함께 목을 타고 들어간 술이 몸으로 퍼지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기가 솟는 듯했다. 술 마실 때의 이 느낌이 좋다고 생각하며 소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소나무에 앉아있던 백로 한마리가 나무 주변을 돌더니 잠시 후 물위로 내려앉았다. 사뿐사뿐 걷다가 긴 목을 물속으로 들이밀더니 삽시간에 물고기 한 마리를 물고는 목을 뺐다. 이어 힘차게 날갯짓을 하여 소나무 숲으로 다시 날아가 가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흐르는 맑은 물과 땅에 북 박힌 소나무, 그 사이를 유영하는 백로. 어느 하나도 매인바 없고 서로 구속하지도 않았다. 왜 사람은 저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물 흐르는 방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물 건너의 녹천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중랑포 옆에 있는 석교(현 월계동)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재촉하여 중랑포에 이르니 이른 시간인데도 오가는 사람들과 강을 건너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뱃사공을 보자 순간 갈등이 일어났다. 애초에는 동강(뚝섬)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려 했었다. 그러나 막상 배를 보니 내친김에 아예 배로 노량원까지 가는 방법도 괜찮겠다는 심사가 앞섰다.

노원의 하계(下契, 현 下溪洞)에서 석교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 뱃사공이 우물쭈물 망설이는 시습을 보고는 천천히 노를 저어 다가왔다.

“스님, 석교로 건너가시렵니까?”
“석교가 아니오.”“그럼 어디로 가시게요?”
“노량원엘 가려는데 가능하겠소?”
“예! 노량원까지요?”
“그렇소.”
“예서 노량원까지는 상당한 거리입니다요.”

뱃사공이 말을 하며 시습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시습이 뱃사공의 눈길을 따라가다 어색했는지 헛기침을 해댔다.

“안 되면 그만이지 무안하게 사람은 왜 그리 상세히 살피는 게요?”
“스님, 혹시 설잠 아니 김시습 스님 아니신지요?”
“나를 어찌 아는 게요?”

시습의 반문에 뱃사공이 배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스님에 대해서는 이미 노원과 석교 근방에 쫙 퍼져있습니다. 제가 모실 테니 어서 오르시지요.”
“그래, 뭐라고들 하던가요?”
“조선 최고의 천재이신 스님이 우리 고을에 터를 잡으셨다고 좋아들 하지요. 수락산이 보석을 품고 있어 더 아름답다고요. 우리 고을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요.”

시습이 뱃사공을 향해 공손히 합장했다.

“이 땡중이 과분한 말을 듣는구려. 내 큰 신세를 지게 되었소.”
“웬걸요. 이제 오가야 하는 사람들은 거반 건넜습죠. 오후 늦은 시간까지는 손님이 없으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리고……”“그리고 뭡니까?”
“스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요.”
“허허, 이 땡중에게 무슨 복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 내 염치 불구하고 배에 오르리다.”

시습이 배에 오르자마자 노를 잡은 뱃사공이 천천히 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대는 어데 사시오?”“하계 불암산 자락에 살고 있습지요.”

뱃사공이 공손히 답했다. 그의 밝은 얼굴 위로 순간 천 서방과 이 진사의 얼굴이 겹쳐졌다. 얼른 불암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만 합니까?”시습의 느닷없는 질문에 뱃사공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요즈음 생활이 어떠냐는 말이오. 뱃사공으로 사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 않을 터인데, 힘들지 않소?”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야 항상 똑같습죠. 아침저녁으로 뱃사공 일을 하고 낮에는 농사에 매달리며 죽어라 일합니다요. 그렇지 않으면 일곱 식구 입에 풀칠은 고사하고 멀건 죽도 먹기 힘들지요.”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하계의 너른 평야처럼 허허로웠다.

“땅이 참으로 비옥해 보이는구려.”
“땅이야 살기에는 그만이지요. 동교(동대문 밖)에서는 하계를 포함하여 노원만한 곳은 없습니다요. 단연 으뜸이지요.”
“나 역시 그런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다오. 그런데 이 좋은 땅에도 승냥이 떼가 설쳐대니, 그게 아쉽구려.”

승냥이라는 말에 뱃사공이 끙 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일전에 스님께서 상계의 이 진사를 혼내주셨다는 일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얼마나 가슴이 후련하던지.”

뱃사공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물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스님. 혹시 이놈이……”
“아니오. 그러한 일이 비단 이 진사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그러오. 이 사회 도처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니 어쩐단 말이오.”

시습의 말에 뱃사공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요.”

시습이 갑자기 술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뱃사공에게 내밀었다.

“힘들 터인데 한잔하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스님!”뱃사공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순간 중심을 잃은 배가 잠시 흔들렸다. 시습 역시 중심을 잃는 바람에 술병이 출렁했다.
“이거 보시오. 정성을 무시하니 이 아까운 술이 쏟아지지 않소.”

말을 마치자마자 반 강제로 술병을 넘기고는 대신 노를 잡았다.

“스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요.”
“얼른 목 좀 축이고 넘겨주시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느낌이 들자 노를 잡은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막혔던 가슴이 시원스레 터지는 듯했다. 능숙하게 노를 젓는 시습의 모습을 보며 뱃사공이 술 마시는 것도 잊고 쳐다보았다.

“마시라는 술은 안마시고 뭘 그리 보는 게요?”
“노 저으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요.”
“그리 보이오?”
“분명 노를 저어본 적이 있습죠?”

의아해하는 뱃사공에게 어서 마시라 눈짓하고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물론 뱃사공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상왕복위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했고 그 역모를 주도한 몇몇 의인들이 참수형을 당했다. 그들의 수급이 새남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시습은 날을 맞추어 새남터로 찾아들었다. 물론 수급을 훔쳐내기 위해서였다.

비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간신히 수급을 확인하고 미리 준비해간 광목으로 의인들의 머리통을 하나하나 싸서 가마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로 물이 반쯤 찬 배에 싣고 비바람에 출렁거리는 물살을 가르며 힘겹게 노를 저었었다. 여러 번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를 이겨 내고 마침내 노량원에 수급을 안치했다. 하늘과 땅만이 아는 그날의 일을 시습은 가슴에 깊이 묻었었다.

“노 젓는데 별다른 방도가 있겠소. 이렇게 물의 흐름에 맡기고 하나 되면 되는 게지요.”

시습의 말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뱃사공이 그제야 한 모금 마시고는 술병을 건넸다.

“이제 이놈에게 맡기시지요.”

뱃사공에게 노를 건네고 시습 역시 시원스레 목을 축였다.

“스님은.”“말해보시오.”
“술도……”

막상 말을 꺼내놓고는 뱃사공이 고개를 돌렸다.

“허허, 중은 사람이 아니랍디까.”
“그래도 다른 스님들은……”

뱃사공이 어려워하자 시습이 호쾌하게 웃어 젖혔다.

“나는 땡중이라 그런다오.”
“그게 아니라, 큰 스님이시지요.”
“그만 치켜세우시오. 아직도 많이 미력하다오.”

시습이 술병을 다시 건네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사양하지는 않았다. 시습이 빙그레 미소 짓더니 바랑을 풀어 입을 가실만한 음식을 건넸다.


“노량원에는 어인 일로 가시는지요?”
“만나 뵐 사람들이 있다오. 오래전에 헤어졌지요. 그간 살피지 않아 어떻게 지냈는지…… 터도 잡은 김에 뵈러가는 길이라오.”
“소중한 분이신가 봅니다.”
“이를 말이겠소.”

답을 하자마자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뱃사공에게 건넸다. 그렇게 몇 차례 술병이 오가고 너니 네니 하며 노를 젓는 사이 어느새 가을햇살 아래 은빛여울이 넘실대는 한강에 이르렀다.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널따란 한강을 보니 갑갑했던 마음 한 쪽마저 후련해졌다. 사방을 둘러보던 시습이 강 건너편으로 노 저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절묘하구나, 저런 장소에 정자라니!”

혼잣말을 하고는 술병을 기울이며 감상에 빠져있는 사이 점점 더 풍경이 선명해졌다.

“모습을 보니 어느 세도가의 정자 같은데.”

시습이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저 정자 말씀입니까?”
“그렇소. 혹여 누구의 정자인지 아시오?”
“그럼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상당군 대감의 정자입니다.”
“상당군이라면, 한명회 말이요?”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정자로 압구정이라 하지요.”
“압구정이라!”

압구정을 되뇌는 시습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하게 굳어졌다.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요?”“아, 그런 게 아니오. 좀 더 가까이 가봅시다.”

정자 가까이 이르자 아담하면서도 그야말로 명성에 걸맞게 화려했다. 정자를 유심히 살피며 다가가자 현판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시 한 수가 쓰여 있었다.

靑春扶社稷 (청춘부사직)
청춘에 사직을 붙잡았고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

“예서 잠시 기다려주겠소.”

배가 정박되자 한 마디 하고는 뱃사공이 대답도 하기 전에 서둘러 정자로 다가갔다. 잠시 현판에 적힌 시를 꼼꼼히 읽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시습이 붓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부(扶)자를 위(危)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바꾸었다.
고친 글을 다시 한 번 읽은 뒤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 배로 돌아왔다.

“스님, 무슨 글인데 고치셨습니까요?”

뱃사공이 궁금한지 조심스럽게 묻자 시습이 먼저 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차저차 두 글자를 고침으로써 ‘청춘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다.’로 뜻이 바뀌었노라 말해주었다.
뱃사공이 진지하게 듣고 나서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 나더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시오?”“천하의 세도가인 한……”

뱃사공이 끝까지 잇지 못하자 시습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세도가가 아니라 천하의 모사꾼일 뿐이오.”
“두렵지 않으십니까, 스님.”“뭐가 말이오?”
“후환 말입니다요.”
“그럴만한 위인도 되지 못하니 걱정 마시오. 자, 어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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