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16)

People / 황천우 작가 / 2012-11-19 2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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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수분을 빼내면 색소만 이파리에 남게 되오. 그 색소가 햇살을 받으면서 나무 특유의 색을 띠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단풍이라오. 그렇게 빈 몸으로 한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면 내뿜었던 수분을 다시 빨아올려 새로운 생명을 생산한다오. 다시 말해 나무들은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과 사를 넘나들지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는 아니구려.”

안 씨가 잠시 골똘하더니 이해되었다는 듯 천진스럽게 웃었다. 시습이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놀랍지 않소? 생명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수분을 시절에 맞게 이 대지와 공유하며 철저하게 공존 공생하는 나무들의 지혜가 말이오. 어찌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자신이 의탁하는 대지와 합일할 수 있는지도 말이오.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하며 생명을 이어 나무들은 수십 아니 수백 년을 살지요.”
안 씨가 이해된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군림하려고만 하지요. 마치 주인인양 함부로 파괴하고 훼손하면서요.”
“그렇소. 어리석은 중생들은 스스로 함정을 만들고 거기에 빠지지요. 진실을 추구한다면서 자기감정에 치우쳐 분석하고 판단하며 결국은 자기오류와 모순에 함몰되면서 말이오.”
“저 역시 그랬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부인은 그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나를 선택하지 않았소.”“말이 그렇게 되나요?”
“부인은 최고로 멋진 선택을 한 거요.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이지요.”
“조선 최고의 천재인 서방님을 알아보았으니 말이지요?”
시습이 멋쩍은지 딴청을 부렸다.
“서방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어떤 거 말이오.”“서방님이 어떻게 신동 아니 조선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게 되었는지요. 전에 수락산에 올라가면서 여쭈려다가……”
수락산에서의 일이 떠올랐는지 말끝을 흐렸다. 안 씨의 홍조 띤 얼굴을 보며 시습 역시 음흉스럽게 웃었다. 안 씨가 재차 듣고 싶다고 하자 시습이 헛기침을 해댔다.“쑥스럽소, 부인.”“쑥스럽기는요. 서방님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알고 싶어요.”
안 씨가 아이처럼 보채자 꼭 끌어안아주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시습이 다섯 살이던 해에 정승 허조가 집을 방문했다. 시습의 천재성에 관한 소문을 듣고 직접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시습을 만나 사실을 확인한 허조가 세종임금과 조정대신들 앞에서 듣고 본 바를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세종임금은 친히 그 사실을 확인하겠다며 어린 시습의 입궐을 명했다.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승정원으로 안내되었다. 승정원에 들자 지신사(정3품, 도승지)인 박이창과 몇몇 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시습이냐?”
“그러하옵니다. 소생이 시습이옵니다.”
박이창이 시습의 면모를 확인하고는 김일성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옵서 직접 보고자 하셨으나 주위의 만류가 있었습니다. 하여 내가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그를 전하께 아뢰기로 했으니 이해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여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의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니요?”“일종의 특혜시비라고나 할까요.”
“특혜시비요?”
“그렇습니다. 어린 시습에 대한 질시의 눈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니만큼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김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이창이 시습을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이름이 시습이라고 했느냐? 그러면 네 이름을 가지고 시작해보자꾸나.”
“제 이름으로요?”“그래. 네 이름자를 가지고 글을 한번 지어보겠느냐?”
시습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박이창을 바라보았다.

來時襁褓金時習 (내시강보김시습)
올 때 강보(포데기)에 싸여 있던 김시습입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고.”
연신 박이창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박이창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벽 중앙에는 강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가로운 산촌을 그린 한 폭의 산수화가 걸려있었다.
“시습아, 저 그림을 자세히 보거라.”
시습의 시선이 산수화로 집중되었다. 잠시 후 박이창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산수화를 보니 무엇이 생각나느냐?”
산수화를 보며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던 시습이 방긋거리며 박이창을 돌아보았다.

小亭舟宅何人在 (소정주택하인재)
작은 정자 같은 배 위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다시 한 번 박이창의 입이 떡 벌어지더니 한동안 다물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시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박이창이 문장을 지어 건넸다.

“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

초롱초롱한 눈을 굴리며 뜻을 헤아리더니 종알거렸다.

“어린 아이의 학식이 백학이 되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구나.”

극찬이었다. 어린 시습의 천재성과 총명함을 한편의 글에 담은 최상의 칭송이었다. 시습도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聖主之德黃龍飜碧海之中(성주지덕황룡번벽해지중)
성스러운 임금의 덕은 황룡이 되어 푸른 바다 한가운데서 번득이네.”

박이창의 벌어진 입에선 연신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또 어린 시습을 꼭 끌어안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한동안 시습과 김일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했다. 이윽고 시습을 지긋이 다시 한 번 쳐다본 박이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내가 본 바를 전하께 세세히 아뢰고 돌아오겠소.”
급하게 자리를 떠난 박이창이 한참 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의 뒤를 비단 꾸러미를 든 장정이 따라왔다. 박이창이 돌아오자마자 시습을 번쩍 들어 껴안았다가 내려주었다.
“시습아, 깊이 새겨들어라. 네 재주를 전하께서 지극히 아끼시니 너는 이제부터 면학에 더욱 힘써야 한다, 알았느냐?”
“지엄하신 말씀 각골난망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시습이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네가 오늘 특대응제인 줄.”
곁에서 시종일관 시습을 지켜보았던 관원이 말을 하다말고 박이창의 눈치를 보고는 얼른 말끝을 끊었다.
“허허, 전지가 간곡하신즉 엄히 함구하시오!”
박이창의 지엄한 한마디에 모두가 움찔거리며 침묵했다.
“그리고.”
박이창이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관원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말씀하시지요.”
아버지 김일성의 반응이었다.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내 직접 앞으로 부르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알 것을 저어하여 그만 두는 것이니, 제 아비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가르치되 재주와 학문을 감싸고 드러나지 않게 하라. 나이가 차고 배움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크게 쓰리라’는 분부를 주셨습니다. 아울러 여기 있는 비단을 하사하시었습니다.”
그 소리에 김일성이 대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시습도 얼른 아버지를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문제라는 소리에 김일성이 박이창을 보며 긴장했다.
“전하께서 이 비단을 시습이 혼자 힘으로 가져가게 하라는 분부를 주셨습니다.”
“혼자서요!”
장정이 힘들여 가져온 비단으로 어린 아이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순간 김일성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렇소. 다른 사람의 힘은 절대 빌리지 않게 하라 하셨소.”
김일성은 난감하여 한숨만 쉬는데 반해 어린 시습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방긋거리고만 있었다. 잠시 후 시습이 비단 앞에 털퍼덕 자리 잡고 앉더니 비단더미를 풀었다. 그리고는 비단 한필의 끝과 끝을 모두 잇기 시작했다. 모두 이어진 것을 확인한 시습이 비단의 한쪽 끝을 자신의 허리에 묶더니 벌떡 일어났다.
시습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시습이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허리에 묶은 비단을 확인한 후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이만 가시지요.”
박이창과 다른 관원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시습이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의기양양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비단이 시습의 뒤를 졸졸졸 연이어 따랐다.
“허허, 고 녀석. 겨우 나이 다섯인데 한 갑자가 무색하네 그려.”
이야기를 마치자 안 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시습을 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했다. 살짝 입을 맞추어주었다.
“괜히 민망하오.”“민망하긴요. 자랑스러운 당신의 역사인데요.”
“나의 역사라.”“예, 만세에 기억될 서방님의 역사요.”
시습이 역사를 되뇌며 부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하튼 서방님은 대지고 저는 나무에요.”“무슨 소리요, 부인이 대지고 내가 나무지요.”
“아닙니다.”
“어허, 내가 뿌리를 부인의 몸에 집어넣고……”
시습이 말을 하다 말고 겸연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안 씨의 얼굴이 빨개졌다. 순간 시습의 몸 가운데로 힘이 쏠리더니 걷기가 불편했다. 안 씨가 어기적거리는 시습의 모습을 슬쩍 보고는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겨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송계에 도착했다. 송계의 모래는 언제 보아도 맑고 깨끗했다. 시습이 두리번거리더니 곱디고운 모래가 평평하게 이어진 곳으로 안 씨를 이끌었다. 이어 자리를 잡고 가지고온 음식들을 펼쳐놓았다.
시습이 손수 술을 따라 단번에 비워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 씨가 안주를 들고 있다가 얼른 입에 넣어주었다.
“부인, 알고 있소?”
“무얼 말인가요?”“이곳 모래가 조선에서 가장 깨끗하다오.”
“그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 씨가 슬며시 일어나더니 주변을 살피고는 잠시 후 돌아왔다.
“모래가 참으로 고와요.”
살짝 상기된 얼굴로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이쪽저쪽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걸어 다녔다.
“부인, 이리 오시오.”
시습이 팔을 벌리고 안 씨를 부르자 잠시 사방을 살펴보고는 다가와 그대로 시습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시습이 안 씨를 안고 잔을 채웠다.
“부인, 참으로 좋소.”“저도요.”“남녀 간의 사랑이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소.”
“저 역시.”“앞으로는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려하오.”
“지금 여기서도요?”“당연하오.”
말을 마친 시습이 서둘러 잔을 비웠다.

기구한 운명

하루하루가 지난 시절과 달랐다. 중의 신분에서 벗어나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만 충실하고자 했다. 그 부분에서는 욕심도 부렸다. 나이 들어 만난만큼 지난 시간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아니 또 다른 의미에서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세상에서의 고독은 그전과는 달리 색다른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일종에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그 중심에 사랑하는 아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에는 육체노동을 즐기는 입장이면서도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더 이상 육체노동 아니 그 어떤 일도 힘들지 않았다. 모든 일에 사랑이 함께하니 그저 즐겁고 신이 날 뿐이었다.
밭일을 할 때도 아내가 수고하지 못하게 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아내의 손을 잡고 산책하다 시를 지어 사랑을 노래하기도 했다. 온 세상이 오직 사랑만으로 가득 들어찬 삶이었다.
그렇게 하나 되어 살면서도 문득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고는 했다. 때론 지금 이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꿈은 아닌지 무섭기도 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으면 어쩌나 하는 불쑥불쑥 솟구치는 생각이었다.

“서방님, 왜 그러세요?”
하루 일을 마치고 수락산으로 산책 나가는 길이었다.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습이 여느 날과는 달라보였는지 안 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것 참 묘하단 말이오.”“뭐가요?”“이상하게 행복에 젖어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오.”“이상한 생각이라니요?”
“행복이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라오.”
부인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왜 그러오.”“그야 당연하지요. 행복할수록 그 행복을 놓치지 않을까 염려하고 걱정하니 그런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요.”
“그러면 이 기우가 당연하다는 거요?”
“그럼요. 저도 가끔 이 순간이 꿈은 아닌가 하고 반문하고는 하거든요.”
시습이 허허롭게 웃었다.
“왜요?”
“사람 사는 이치가 참으로 묘하구려.”
“무슨 말씀이세요?”
“힘들고 외로울 때는 이런 생활을 꿈꾸면서 막상 그리던 생활을 하게 되면 또 걱정을 하게 되니 말이오.”
안 씨가 말을 잇지 않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오, 부인.”
“우리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거잖아요.”
“그야 당연한 일이요.”
시습이 안 씨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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