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놈아, 명색이 중생을 위하는 스님이라면 중생을 위해 술도 대신 마셔줄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니라.”
시습의 말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뭐하나, 따르지 않고.”
선행이 어색한 자세로 술을 따랐다. 시습이 선행에게도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너는 마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고. 우리는 오랜만에 한잔합시다.”
시습의 제안에 남효온이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워냈다.
“조정에서는 스승님을 어떻게 한다던가요?”
“아직 거기까지는. 사간들과 대신들이 공론화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이야기입니까?”
시습의 언사가 다소 도발적이었다. 물론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도발임을 남효온은 잘 알고 있었다.
“도첩을 빼앗고 환속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 모양입니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한마디 내뱉고는 스스로 술을 따랐다.
“그런데 선배님.”
“말씀하세요?”“설준 스님보다 선배님이 더 위태해 보입니다.”
“그래요?”
“상심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시습이 대답 대신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던가요?”
“단지 그뿐만 아니라오.”
“그뿐만 아니라니요?”
“나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니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더라, 이 말입니다.”“하오면.”
“지난 모든 일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거지요.”
남효온이 시습의 말을 헤아려보았으나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혼자 주접떨었다고나 할까요. 또한 거기에 더하여 팔자에도 없는 사랑타령 했으니 보기 좋게 당한 게지요.”
“그럼.”
“이제 남은 삶은 다르게 살아볼 참입니다.”
“다르게라니요?”
“귀신처럼 사는 게지요.”
“귀신이라니요?”
“지금도 귀신과 마찬.”
선행이 엉겁결에 말했다가 아차 싶었는지 급히 말꼬리를 감추었다.
“이놈아, 귀신처럼 살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귀신처럼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말을 마친 시습이 잔을 비워냈다.
“선배님, 귀신이란 무엇입니까?”
“귀신이라. 서두가 기니 일단 술이나 한잔 들고 이야기합시다.”
남효온이 시습의 빈 잔을 채웠다.
“예전에 한 선승이 밤중에 변소에 가려고 마당으로 내려서다가 그만 생물을 밟았는지 찍 하는 소리가 났다오. 선승이 한낮에 섬돌 아래 엎드려 있던 두꺼비를 떠올리고는 밟혀 죽은 것이 필시 그 두꺼비일 거라 생각했소. 이제 지옥에 떨어져 반드시 두꺼비를 죽인 보복을 받게 되겠구나 싶어 벌벌 떨다가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선잠이 들었다오.
그런데 꿈에 두꺼비가 저승 법관에게 소송장을 올렸소. 우두아방(牛頭阿旁, 소 같은 머리와 말 같은 얼굴) 사자가 와서 선승을 잡아 시왕(十王, 사후세계에서 인간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 앞에 매어 놓고, 장차 불에 달구어 지지는 형벌을 가하고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였소.
순간 선승이 꿈에서 깨어나 확신하며 그대로 앉아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소. 날이 밝자 선승은 얼른 나가 섬돌 아래를 살펴보았지요. 그랬더니 두꺼비는 없고 섬돌 밑에는 뭉개진 참외만 있었다오.”
시습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남효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이 대목에서 목을 축여야 할 듯해서 그러오.”
시습의 말에 남효온이 빙긋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또 어떤 유생이 어두운 밤에 산속을 지나는데 곡하는 소리가 들렸소.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니 곡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소. 마침내 한 지점에 당도하여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니 시내와 바위 사이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지요. 이상히 여겨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꿀밤나뭇잎들이 시내를 막아 소리가 났던 것이었소.
잎을 치우면 그 소리가 끊어지고, 잎을 놓아두면 다시 그 소리가 났다오. 또 전신과 기운을 고요하게 하여 들어보면 물소리만 있고 곡하는 소리는 없었지요. 처음 곡하는 소리가 들리던 곳에 이르러 다시 들으니 처음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오.”
시습의 말에 푹 빠져 듣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진지했다.
“이 두 이야기의 요지는 지옥이나 곡소리는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심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가득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이겁니다. 대저 마음의 실상이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달아나니, 달아나면 사념이 생기고 사념이 생기면 외물에 끌려가게 된다오.
그런데 이 외물에 끌려가며 보존할 바를 알지 못하면 정신이 소모되어 피곤해지고, 온갖 맥이 흐려져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오. 때문에 형체가 없어도 형체가 있는 듯 눈을 가리고, 소리가 없어도 소리가 있는 듯 귀를 가리다가, 점점 구원할 수 없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면 심신도 따라서 없어져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와 기운도 따라서 흩어지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세상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 기의 순환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이 귀신이기 때문에 선배님은 초심으로 그 자연의 순리를 따르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렇지요. 만물의 본질은 기, 즉 기운이지요.”
남효온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님의 이론은 이(理)를 강조하는 주자학과 배치되는군요.”
“물론 그렇지요. 주리론이란 사대부들이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흔히 내세우는 거 아니겠소.”
남효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생과 사란 무엇입니까?”
“기를 만물의 본질로 보면 아주 간단하지요.”
남효온이 얼른 잔을 비우고는 귀를 기울였다.
“천지 사이에 나고 또 나서 다함이 없는 것은 도(道)요, 모였다 흩어졌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理)의 기(氣)라고 한다면, 모이는 것이 있으므로 흩어진다는 이름이 있게 되고, 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간다는 이름이 있게 되지요. 또 생(生)이 있기 때문에 사(死)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니, 이름이란 기의 실사(實事) 아니겠소. 기가 모여 사람이 태어나면 그를 생이라 하고, 기가 흩어져 사라지면 귀(鬼)가 되니 그를 사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과 사는 결국 하나라는 말씀이십니다.”
“바로 그 말이오.”
“감축 드립니다, 선배님.”
말을 마친 남효온이 공손하게 잔을 시습에게 건넸다.
“그건 무슨 소립니까?”
“선배님께서 귀신, 아니 신선이 되신 듯합니다.”

후학들과
시습이 다시 머리를 깎았다. 거처도 전에 살았던 계곡 입구로 다시 옮겼다. 그러자 남효온이 홍유손을 비롯하여 평상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일손을 대동하고 수시로 수락산을 방문했다. 시습은 그동안 자신이 겪은 많은 경험과 그를 통해 발견하고 정립한 이론들을 나눌 수 있어 그들의 방문을 반겼다.
그들은 늘 술을 가지고 찾아왔으나 대화의 시작은 항상 차로 열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면 네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날도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추강! 근자에 들어 혈색이 좋지 않아요. 무슨 일 있소?”
시습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남효온을 걱정하며 화두를 건강으로 잡았다.
“선배님 말씀대로 저도 조만간 사(死)로 돌아가 귀신이 되려는가 봅니다.”
남효온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말을 받자 시습이 조용히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다.
“물론 자연이 하는 일을 거역할 수도 탓할 수도 없지요. 허나 너무 이른 것도 자연에 역행하는 일이지요.”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시습이 진지한 표정으로 남효온을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스님.”
“특히 추강 같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수해야 하지 않겠소.”
“저의 역할이라 하심은.”
“이 시대의 물줄기를 바로 잡는 일, 말입니다.”
“시대의 물줄기요?”
김일손이 끼어들었다.
“그래. 그 부분에서는 김 군도 한몫해야지.”
“시대가 어떻다는 말씀이신지요?”
“이 조선의 일만을 놓고 생각해보세. 조선이 창업된 이후에 이런저런 평지풍파를 겪었네. 이제 서서히 안정을 찾고 반석에 오르게 되면 새로운 변화, 아니 애초에 추구했던 의도를 완성하려 할 것이네.”
“그러면 정상이 아니온지요.”
“물론 정상이네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무슨 의미인지요?”
“나는 정상이라기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하네만.”
“하오면.”
시습이 말을 잇기 전에 홍유손을 바라보았다.
“이보시오, 광진자. 기가 한 곳으로 쏠리면 어떻게 되오?”
홍유손 역시 대답하기 전에 남효온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김일손의 시선도 추강에게로 쏠렸다.
“왜 다들 저를 보십니까?”
“지금 추강의 상태가 그리 보인다오.”“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기가 온몸에 골고루 퍼져있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으니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거요.”“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수긍하는 추강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국가의 일도 바로 그러하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요?”
김일손이 집요하게 의문을 제기하자 대화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시습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저들끼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가령 이런 경우네. 여기 계신 스승님의 스승님이신 설준 스님 그리고 많은 불자들이 박해 당하고 있지 않은가?”“그 문제가 무슨……”
“그 시작이 어딘가?”
“그야 고려……”
김일손이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에 골똘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한쪽으로 지나치면 득보다는 실이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홍유손이 시습을 바라보았다. 결론을 내려달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답을 하기에 앞서 광진자께 바라겠소. 거 스승이라는 칭호 좀 쓰지 않을 수 없습니까. 어째 어색합니다.”“허허,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스승님께서도 추강을 그리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습이 자신보다 연상인 홍유손의 진정을 헤아리며 남효온을 힐끔 쳐다보았다. 히죽이 웃는 모습을 보며 김일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 군!”
“네, 스승님.”
“정치가 무엇인가?”
“조정의 대신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서 임금과 더불어 국가를 잘 다스리는 일이 아닌지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러나 그 본질을 먼저 생각해보게.”
“본질이라 하심은.”“임금과 대신들이 어떻게 왜 존재하느냐의 문제 말일세.”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
“임금이나 대신들은 누구 때문에 존재하는가. 바로 백성들이 있기에 존재하네.”“그러하옵니다.”“그러면 임금과 백성간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그 본질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시습이 대답 대신 미소 짓자 곁에 있던 남효온과 홍유손도 한창 피가 끓는 김일손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임금이 가장 존중해야 하는 것은 바로 백성이라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 즉 민심과 함께해야 함이 본질이다, 이 말이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요?”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나. 민심과 함께하면 만세토록 성군이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저녁도 가기 전에 필부가 되고 말지.”
“곧 백성과 임금은 한 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물론 이 자연도 마찬가지고요.”
홍유손이 끼어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와 같다고 보아야지요.”“하오면 어떻게 정치해야 하는지요?”
시습이 남효온과 홍유손의 얼굴에 정점을 찍 듯 바라보았다. 답례하듯 두 사람의 표정 또한 매우 진지했다. 다시 김일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사람으로서의 행동에 관한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그리고 백성은 백성으로서 말입니다.”
“맞네. 그럼 지금 이 나라가 그 지침대로 가고 있다고 보는가?”
김일손이 머뭇거렸다.
“유교는 그저 이론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신지요.”
남효온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지요. 자기성찰 즉 깨달음 없는 이론이 영속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이행될 수 있겠소?”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오면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김일손의 질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라도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저 사상누각일 뿐이네. 아무 쓸모도 없는 겉치레, 즉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일세.”
“그러니까 불교와 유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뿐만이 아닐세.”
“하오면.”
“현재 상황을 잘 살펴보세. 불교는 고려의 국교가 아니었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채택하였지.”
“맞습니다.”
“그 상관관계를 잘 생각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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