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손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남효온이 대화를 이었다.
“그럼 불교와 유교는 결코 합치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겠소. 불교와 유교만을 놓고 본다면 둘은 별개지요.”
“스승님은 그 별개인 둘을 조화롭게 이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도교 같은.”
홍유손이 바로 치고 나갔다.
“바로 그 말이오. 불교나 유교가 현실의 통치이념과 결부되니 도교와 같은 무위자연사상이 생기는 거 아니겠소. 결국 티끌만한 사심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오.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불교와 현실적인 도리가 되어버린 유교의 속성에다 도교의 개념을 더하면 좀 더 평온한 세상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시습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 이들의 어느 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가. 결국은 우주만물의 존재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선하게 대하는 마음을 수양함으로써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유교, 불교, 도교의 조화와 화합을 통해 치우침이 없어야 사람이든 이 세상이든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네요.”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김일손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시습이 그런 김일손의 표정을 살피며 차를 음미했다.
“그럼 그 비결이 어디에 숨어 있겠는가?”
시습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물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질문에 김일손은 물론 남효온과 홍유손도 바짝 긴장했다.
그들의 마음과는 달리 시습은 태연하게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김일손이 시습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는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혹시 이 차와 관련 있는지요?”
시습이 대답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면밀히 바라보았다.
“혹여 다도(茶道)라고 들어본 적 있으신가?”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차가 바로 셋을 아우르는 도(道)일세.”
“도라고 하셨습니까?”
젊은 혈기의 김일손이 역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김 군은 어떤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가?”
김일손이 대답에 앞서 상황을 더듬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실 때면 이상하리만치 모든 격정과 분노가 사라지고 평상심이 회복됩니다. 때로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느낌도.”
“그러니 그게 뭔가?”
“차를 마심으로써 삼라만상을다스린다는 말씀이신지요.”
홍유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말했다.
“글쎄요. 다스린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표현이라 생각하오만. 그저 삼라만상과 함께 어우러지고 녹아들면서 하나가 된다고 보면 합당할 거요.”
“스승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말을 하는 김일손의 얼굴에 충만감이 가득 번졌다.
“역시 김 군이 예사 인물은 아니네. 다도를 득하고 말이야.”
“스승님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그런가?”
시습이 마치 김일손에게 반문이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그러니까, 오래전 일이네.”
오래전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경주에 터를 잡고 있을 때였지.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에서 준초라는 선승이 통역하는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와서 다도를 배워간 적이 있었네.”
“일본에서요! 그곳에는 차가 없습니까?”
“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까 말했던 바로 그 치우침 때문이었네. 귀족들 사이에만 형성된 차 문화가 매우 사치스러워 일상에 쫓기는 백성들은 감히 차에 대해 엄두도 못 내었지.”
“그래서 스승님께 배우러 왔군요. 백성도 차를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
“허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자랑이 되어버렸구먼. 그럼 다도는 여기서 그만 접고 이제 주도에 빠져봄이 어떻겠소.”
“기다리던 말씀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쪽에 물러나 있던 선행이 술과 안주를 챙겨 다가왔다. 김일손이 급히 일어나 상을 받았다.
“그런데 스님은 왜 따로 떨어져 있습니까? 함께 자리하지 않으시고요.”
“그런 소리 말게. 저놈이 그래도 귀는 열려 있어 들을 것은 다 듣고 있네.”
선행의 얼굴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문답을 하다
오랜만에 수락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자 막 정자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네가 어인 일이냐?”
잠시 매월정을 떠나 있던 선행이 언제 왔는지 시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의 근황이 궁금해서요. 그런데 어디 가실 참이십니까?”
“내 이 산을 샅샅이 훑어보고자 나서는 길이다.”
선행도 시습의 시선이 흐르는 수락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생각나십니까?”
“생각은 무슨.”“그러시면.”“이제는 훌훌 털어버려야 할 일이니라.”
선행이 털어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지 묵묵무언했다.
“왜, 너도 함께 가련?”“스님만 괜찮으시면요.”
시습이 선행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 앞장서지 않고 뭐하는 게야.”
시습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선행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스님.”“말해보아라.”“스님께서 왠지 이곳을 떠나실 듯해서요.”“어찌 그리 생각했느냐?”“방금 훌훌 털어버린다고 하셨잖아요.”
시습이 즉답은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묵묵히 걷기만 했다.
“제 말이 맞지요?”“이놈아,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느냐? 그저 서서히 정리할 때가 되어 그런다.”
“정리라니요?”고개 돌려 시습을 바라보는 선행의 동그란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인간은 마지막이 중요한 게야. 내 그런 차원에서 이곳에서 느낀 바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려는 게다.”
“그러면!”
“말을 했으면 끝을 맺어야지 그게 무슨 짓이냐.”
“어째 마지막이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게 어때서?”“마치 죽음을……”
“이놈아, 죽음도 삶의 한 방편임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냐?”
선행이 삶과 죽음을 곱씹으며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스승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시습이 말하라는 듯 바라보았다.
“스님은 분명 특별해보입니다요.”
선행이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말 그만 돌리고 요점을 이야기해라.”
“그렇게 유랑생활을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 같으면 벌써 무슨 변고를 당했어도 당했을 터인데, 스님의 경우는 오히려 그를 즐기시니 말입니다.”
시습이 선행의 옆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이번 유랑에 동행해서 노중에서 살아남는 비결을 엿보겠다는 말이렷다.”
선행이 답은 하지 않고 히죽이 웃어 보였다.
“선행아.”
“예, 스님.”
“인간이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으면 노중객사냐 아니냐?”
“그야 당연히 아니지요.”
“그런데. 이 산하가 나의 집이고 내가 이 자연과 하나 된다면 그는 어떻게 되느냐?”
선행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누차에 걸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니 자꾸 어리석은 이론이 나오고 또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끌려 다니니 고통 받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하오면.”
“일전에 이야기한 바 있듯이 만물의 본질이 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기를 다스리며 철저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그 변화에 순응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그게 가능한가요?”
시습이 안타깝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깨닫고 다스리기 위해 수행하는 게 아니겠느냐.”
선행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산으로 눈을 돌려 천천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치를 깨우치라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 선행이 옆으로 다가와 따르고 있었다. 얼굴이 한결 편해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선행이 느닷없이 시습을 쳐다보았다.
“스님!”
“왜 그러느냐.”
“인간에게 왜 고민과 번뇌가 일어나는지요?”
답을 하기에 앞서 시습이 멈춰서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곡물이 마른 곳에 좁은 평지가 있고 갖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선행아, 누가 번뇌를 고민을 만들었느냐?”
“애초부터 인간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온지요.”
“당연히 있었지.”
“그런데요?”
“번뇌가 번뇌인 것은 바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리 생각하기 때문인 게야. 번뇌란 것을 내게 가져와 보아라, 어디 한번 만져보자.”
“그렇다면 번뇌도 필요한지요?”
시습이 즉답을 피하고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을 보거라.”
시습이 가리키는 곳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너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아름다운 꽃이 보입니다.”
“단지 그뿐이냐?”
선행이 꽃과 시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해 했다.
“저 꽃이 한 달 후에도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있겠느냐?”
“그때는 지고 없……”
“바로 그런 이치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구나. 꽃의 만개하기 전 모습과 그 후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그려 보아라. 매양 이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지.”
“그럼 평온이 번뇌를 부른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구나. 인간사의 번뇌와 평온은 하나며 공존하니 별개로 간주하지 말라는 이야기니라.”
선행이 시습의 말을 되뇌며 점점 더 생각에 몰입하고 있었다.
“번뇌는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저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하니라.”

노원을 떠나며
“스님, 계십니까!”
막 하루를 마감하려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이 진사가 손에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이 시각에 어인 일이오?”“스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누가 떠난다는 말이오. 선행 이 녀석이…… 여하튼 들어오시오.”
“그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떠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 이겁니다.”
이 진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한잔하십시다.”말을 마친 이 진사가 보따리를 풀더니 시습 앞으로 슬쩍 밀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괜히 애꿎은 술 죽이려고 많이도 준비하셨소이다.”
시습의 말에 이 진사가 머쓱해하자 시습이 히죽이 웃어주었다.
“만족스럽소이까?”“우리가 언제 술을 안주로 마셨습니까, 마음으로 마셨지요.”
이 진사가 마음을 되뇌며 피식 웃고는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 작정입니까?”
“잠시 관동지방을 돌아보고 내 묻힐 곳을 찾아볼 작정이오.”“묻힐 곳이라니요!”
“앞으로 필요하지 않겠소. 여하튼 수락산은 내게 있는 모든 열정을 불태웠던 의미 있는 장소였소.”“사랑의 열정 말입니까?”
이 진사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시습이 급하게 잔을 비워냈다.
“너무 무안하게 만들지 마시오.”
“아무튼 참으로 대단하십니다.”“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어느 누구도 개의하지 않고 뜻에 따라 밀고나가는 그 추진력 말입니다. 사랑도 사상도 모두 말입니다.”
“허허, 그게 어찌 칭찬받을 일이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스님이 이 노원에서 어떤 열정으로 사셨는지, 특히 얼마나 사랑을 불태웠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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