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의 비밀...백제 패망이 부른 허상?

People / 황천우 작가 / 2013-08-21 14: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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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우의 역사에세이
▲ @Newsis
[일요주간=황천우 작가] 많은 사람들이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의 사비성 유적지를 방문하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의자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삼천궁녀가 투신했다는 부소산의 낙화암이다.

그러나 정작 낙화암에 올라서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린다. 3000여 명에 이른다는 궁녀들의 숫자도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투신했다는 장소로는 주변 여건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3000여 명의 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투신한다면 낙화암 높이를 훌쩍 뛰어 넘어 조그마한 산을 쌓고도 남을 정도다.

그렇다고 낙화암 바로 아래의 수심이 매우 깊거나 또한 물살이 거세지도 않으니 투신하자마자 물에 쓸려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가 정말 그곳에 투신했는지 반신반의하며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이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을 의심한다. 신라 중심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쓰면서 의자왕을 폄하하기 위해 고의로 그리 기록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그 어느 곳에도 삼천궁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왜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가 떠오르게 되고 또 그 삼천궁녀가 백제의 패망과 시기를 같이하여 백마강에 투신했다 믿는 걸까. 단순히 의자왕이 지나치게 여색을 밝혔기 때문일까. 한번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사기 기록을 살피면 보위에 앉을 당시 의자왕은 엄연한 군주였다. 백제란 국가를 통솔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황음에 빠져들고, 마치 놀이를 즐기듯 전쟁을 일삼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그의 아버지인 무왕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무왕의 경우도 보위에 오를 당시 군주로서 자신의 책무에 성을 다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자주 전쟁을 일으키며 국력을 탕진하고 여자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부전자전이란 사자성어가 생겨난 듯한데 의자왕의 경우 무왕보다 훨씬 더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이 때문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사자용어도 생겨난 듯하다.

여하튼 단지 상기의 사유로 삼천궁녀가 존재하게 된 걸까. 그를 살피기 위해 최초로 삼천궁녀가 등장하는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 성종 조에 공조참의를 지냈던 김흔이 부여를 방문하고 낙화암에서 지은 시 중 일부다.

낙화암에서(落花岩)

삼천궁녀들이 모래 먼지에 몸을 맡기니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三千歌舞委沙塵(삼천가무위사진)
紅殘玉碎隨水逝(홍잔옥쇄수수서)

아마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삼천가무에서 삼천궁녀가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저자 김흔 역시 역사에서 낙화암의 사연을 접했을 터고 주변 누군가로부터 과장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는 삼천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삼천(三千)이란 단어의 개념이다. 삼천은 숫자 3,000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불교에서는 삼천을 모든 만물을 통 털어 이르는 말로 즉 3천 명이 아닌 당시 백제에 존재했던 모든 궁녀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정말 백제가 패망했다고 해서 일개 궁녀들이 투신했을까 하는 대목이다. 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왕은 물론 고관대작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도 비록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지만 멀쩡하게 살아남았는데 왜 그녀들만 투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까. 그 사유를 다시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자.

우리 역사를 살피면 왜 그리도 열녀가 많은지 아연하게 생각들 하고는 한다. 특히 조선 시대에 발생했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는 열녀의 숫자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부분에는 커다란 함정이 숨어 있다. 물론 극히 일부 자결한 여인도 있지만 다수의 여인들은 난 중에 청나라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대부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연유로 죽거나 청나라에 끌려간 여인들을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호도하고 조정에 왜곡된 사실을 알려 열녀문을 받고는 했다.

하여 백제의 삼천궁녀를 색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 왕을 비롯하여 모두가 흥청망청한 가운데 그나마 백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즉 백제에도 애국자가 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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