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색이 짙어지는 가을이 참 무섭습니다”

People / 육인숙 작가 / 2013-10-21 09: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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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의 풍경소리(11)
@Newsis
[일요주간=육인숙 작가] 비가 지난 후 가을빛이 한결 깊어졌습니다. 도숙어비(稻熟魚肥) 천고마비(天高馬肥) 유행(遊行)의 호시절이라 하여 곳곳이 분분하지만, 사실 자연으로서는 매우 고단한 시간이지요. 마치 죽음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다 내어놓고 떨구어 비워야 하니 말입니다. 이렇듯 연명하기 위해서는 때때마다 치러야 하는 고단함을 능히 감수해야 한다고 자연은 일러줍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던 걸음 잠시 멈추고 그간의 삶 갈무리하여 도래할 엄동설한을 예비하라는 뜻의 가을이거늘 그저 행사니 축제니 하며 분주하게 날뛰는 것을 보면 괜스레 미안해집니다.

나는 가을이 참 무섭습니다. 가을빛이 깊어질수록 회한의 촉수가 민감해집니다. 지난 많은 일들에 대해 물어오는데 딱히 대답할 말도 없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왔다 싶은데도 돌아보면 늘 제자리입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다른 나를 꿈꾸려 하면 그럴 때마다 헛헛한 나이가 먼저 단속하며 나섭니다. 삶에 게을렀고 자신을 기만했던 순간이 줄줄이 몰려와 아우성하는 날이면 제대로 산 것인지 생각은 있는 건지 싶어 먹먹해집니다.

어느 날 문득 윤기 잃은 푸석푸석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일 때 중년의 사람들에게는 연민이 솟구칩니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일도 많은데 어느새 코앞의 생은 황혼. 몸 바쳐 마음 바쳐 생을 걸었던 아이들은 손 떠난 지 이미 오래고, 남은 것이라곤 허허로운 시간뿐입니다. 잡은 것 이룬 것도 없는데 날이 갈수록 몸은 쇠약해지고 정신은 몽롱해집니다. 이러다 모진 내 목숨 짐 되면 어쩌나 하는 섣부른 생각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막바지를 향한 고개 앞에 이르면 누구나 갖는 추일서정(秋日抒情)일 것입니다.

자연에 춘하추동이 있어 싹트고 자라고 맺고 갈무리되듯이 생애에도 네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윌리엄 새들러 교수는 그의 저서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에 그 네 단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퍼스트 에이지(First Age)는 배움의 단계(Learning), 두 번째 단계인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는 정착의 단계(Doing), 세 번째 단계인 서드 에이지(Third Age)는 자아실현의 단계(Becoming), 마지막 단계인 포스 에이지(Fourth Age)는 삶을 마감하는 단계(Integration)라고 말입니다.

특히 새들러 교수는 40세 이후 30년을 가리키는 서드 에이지(Third Age)를 ‘인생의 제2차 성장기’라고 명명했습니다. 1차 성장기가 생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 시기라면 2차 성장기는 그를 기반으로 인생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이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때에 맞춰 씨 뿌리고 시기적절하게 수고를 보태야 풍요로운 결실과 함께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듯이, 이 네 단계의 생의 과정을 충실하고 건실하게 보내야 사람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무사가답(無辭可答)하며 웃을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7080세대는 또렷이 기억할 것입니다. 어릴 때 본 50대는 완전 상 어른이었고 60이 넘은 어른 앞에서는 감히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음을 말입니다. 심지어 60이 넘어 죽으면 호상(好喪)이라 하여 자손의 효성을 치하하며 애도하는 초상집이기보다 외려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TV나 영화 속의 배우들도 이십대 후반이면 밀려 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십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했고 십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어찌나 빠르게 변하는지 실로 하루 같은 한 세대의 조변석개(朝變夕改)입니다. 눈 감았다 뜨면 길이 생기고 집이 생기고 세상이 개벽을 합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이미 공공연합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족히 삼십년은 매달려야 하는데 그 여부도 불투명합니다. 나이에 0.7을 곱한 것이 진짜 나이라던 어떤 이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긍정적인 계산법도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추색이 짙어지는 나의 가을이 몹시 두렵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는 나무처럼 초연하지도 못하고, 생각이 굼떠선지 세상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만 봐도 간지러웠다 따가웠다 마음을 종잡을 수 없고, 시계(視界)는 왜 그리도 투명한지 맘속 일이 자꾸 미끄러져 괜스레 공염불만 늘어놓습니다. 아직도 미궁과도 같은 현실에 부딪히면 쩔쩔매다 실타래마저 놓치곤 합니다. 이렇게 나만의 질서에도 휘청거리면서 어떻게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다를 발견하고 꿈을 꿀 수 있을지 난감합니다.

해서 요사이 부단히 들고 다니는 화두가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여, 소박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라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들어 무슨 뜻이냐며 스승에게 묻자,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답한 데서 나온 말인 ‘회사후소(繪事後素)’입니다. 지금까지 화려한 사진이 인쇄된 잡지만을 찢어다 꿈을 꾸고 인생을 그렸구나 싶어서입니다. 이 나이에 회사후소, 하얀 바탕, 처음부터 운운하다가 온통 흰색을 칠해버릴망정 붓을 들어야지 어떤 그림이든 완성하지 싶어서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윤기를 잃어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저들 안으로 선명해지는 나이테(年輪)를 상상하곤 합니다. 누가 불안정한 대기에도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까 싶어 자꾸 하늘에 눈이 박히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가을은 결실의 계절보다 웅심(雄心)의 계절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보태집니다.

육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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