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인들과 친해지면서 음식값이 싸고 맛있는 푸시지역에도 가게 되었는데 푸동 지역과 달리 음식값이 무척 쌌다. 그들의 얘기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대부분 싼 푸시지역에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그때 난 세상에 양극화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가가 비싼 지역만 존재한다면 서민들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편의점에서 천 원짜리 햄버거로 점심을 대신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명품을 사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있는 반면 끼니를 떼우는 것이 큰 고민인 이들도 있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는 공정한 사회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은 이와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 상위 1%가 전체 소득 중 약 4분의 1을 벌어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득을 포함한 자산 규모로 본다면 상위 1%가 40%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데 미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다.
미국이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는지 경제학자들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상위 1%가 이런 불평등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의 상원의원 및 하원 의원 대부분은 선출되는 순간 상위 1%가 지출한 돈으로 그 위치를 유지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들은 현직에 있을 때 상위 1%를 위해 일하면 공직을 떠날 때는 상위 1%에 의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란 책을 통해 기술의 진보가 실업자를 양산하다고 말했다. 실업자 수가 10억에 달하는 지금 그의 예측을 한번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첨단기술과 정보화 사회, 경영 혁신과 같은 기치가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도 대부분 임금이 낮은 임시직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의 말은 지금 현실이 되고 있다. 기계와 시스템이 인간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양극화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는 디스토피아(결함 사회)로 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그의 진단은 결코 허언이 아닐 듯 하다. 노동의 위기라는 전 지구적 현상은 인간의 역할을 재고하게 만든다. 인간은 결국 편리를 위해 스스로의 직업을 없애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거나 시스템을 소유한 이들의 부는 늘어가지만 경쟁에 밀려 낮은 임금에 만족해야 하는 이들의 부는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사실상 부자 감세가 포함되지 않은 어떤 세제법안도 의회를 통과할 수 없다. 상위 1%를 제외한 사람들은 갈수록 소득보다 지출이 느는 삶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불평등 상황이 심화되고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최근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의 저항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어떤 이는 사회를 한번 갈아엎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볼 멘 소리를 한다. 부유한 사람들만 권익을 보호받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사회임에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 양극화가 심화되고 접점이 없는 생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확대시키기 위해 싸우다 보니 전체가 손해를 보는 모순에 빠진다.
많은 자본주의 사회가 똑 같은 모순을 경험했지만 결국 공존을 위한 최적화 모델을 찾은 집단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 최적화 모델이란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이성으로 돌아가 공존을 위해 함께 노력할 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체제의 붕괴를 야기시키는 도화선이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만 한다.
영화 25시에 보면 연합군의 적으로 오인되어 함께 수용소에 수감된 두 사람이 나온다. 바로 그들은 트라이안 코루가와 요한 모리츠이다. 소설가였던 트라이안은 모리츠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공포도, 슬픔도, 끝이 있고 한계가 있다네.”
이 내용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인용되고 있는 대목이다. 극한 아픔이 있지만 그것에도 임계치가 있기 마련이고 극한 두려움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공포나 슬픔도 임계치를 넘지 못한다는 말인데 이를 현재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불평등에 대한 분노에도 임계치가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분노의 임계치는 다른 결말을 낳는다.
대중의 분노가 임계치에서 꺾이게 되면 절망을 낳고 임계치에서 폭발하면 무질서를 낳기 때문이다. 둘 다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개입하여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잘 했기 때문에 문제가 확산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정부마저 공익을 우선시하지 않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대열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했던 과거 정부들의 노력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가 사라질까봐 끝까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이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공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인생의 무게와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동경하고 항상 밝은 것을 찾아 나선다. 우리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밝은 마음을 소유할 필요가 있다.
1976년 3월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깔려 있는 것을 본 작은 소년이 3,400 파운드나 되는 자동차 한 쪽을 들어올려 밑에 깔려 신음하는 아버지를 구해냈다. 아마도 아버지가 당한 일을 본 이 소년이 잠재된 어떤 힘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했던 것 같다.
우리 사회도 소년들의 힘으로 구출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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