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이 낳은 조선의 여류시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이 떠난 지 올해로 403돌이다. 그의 정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못다 한 사랑의 해원(解寃)을 위해 촌은이 말년에 살다간 서울 도봉산 입구에 나란히 시비를 세워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매창은 부안 현리(縣吏) 이탕종(李湯種)의 서녀(庶女)로 매창의 모가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당대의 명사 허균(許均, 1569-1618) 같은 선비와 내로라한 시인묵객들이 그녀와 시 한 수를 나누고자 궁벽한 변산반도 부안현을 찾아 들었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라 계생(癸生), 계랑(桂嫏), 또는 향금(香今)이라 불렀다. 매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 때 백운사에서 시 짓기 대회가 열렸는데, 구경삼아 절에가 시를 지어 선비들을 놀라게 한 천부적인 시감각과 가무에 끼가 다분하였다. 매창은 조선의 3대 여류 시인(황진이, 허난설헌)의 하나로 그의 명성이 서울까지 알려지게 된다.
유희경은 서울 삼천동에서 출생한 천민 출신이었지만, 글재주가 뛰어나 같은 처지의 문장가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문장가들의 모임을 주도하였고, 남언경(南彦經)으로부터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특히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의 폭을 넓혔다.
허균의 글 ‘성수시화’에 유희경은 천례(賤隷)인데 인품이 청수하고 신중하여 주인을 충성으로 섬기고 시에 매우 능하여 사대부들이 그를 아끼는 이가 많았고 칭찬을 할 정도였다.
1591년 봄 유희경은 유람 차 부안고을 매창의 명성을 듣고 매창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매창은 유희경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잔에 넘실넘실 술을 가득 따르며 거문고를 탄다. 그 날 밤 두 사람은 시 한수를 주고받더니만 누가 먼저라기보다 서로가 첫눈에 반하여 술과 여흥에 취하여 원앙금침에 들어 매창의 머리를 올려준 48세의 노총각 촌은은 파계(破戒)를 하고 만다.
두 연인은 거문고와 국화주를 마등에 싣고 변산의 제1경인 직소폭포와 끝없는 칠산 바다와 달 밝은 밤 변산의 채석강을 거니는 두 남녀의 달콤한 밀월은 그리 길지 안했다.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무시한 조정은 1592년 임진왜란이 나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돌진, 선조왕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하니, 상민들이 도성에 불을 지르고 종의 문서를 불태우는 등 일대 대 변혁이 일어나 위급한 나라는, 누구라도 왜놈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우면 벼슬과 상급을 주겠노라 하니 이에 충성심이 강한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모우는 등 전공을 세워 종2품이란 높은 벼슬을 받아 면천(免賤)을 하게 된다.
매창은 낭군 유희경이 벼슬까지 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당장 만날 수가 없었다. 낙엽이 지는 달 밝은 밤이면 임 생각으로 뒤척이며 잠 못 이루다가, 유희경을 그리는 구구절절한 노래와 거문고로 달래며, 현재 한시 57수와 시조 한수가 전해지고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매창의 이화우>
랑가재랑주(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 한구석에 있어,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 오동나무 비 뿌릴 제 창자 끊기네.<유희경의 답시‘오동우(梧桐雨)>-
위의 두 시비가 나란히 도봉산 자락에 세워져 드디어 매창은 서울 촌은과 함께 한 것이다.
7년간의 전란이 끝나고 유희경은 당당한 양반가로 임서, 김상헌, 신흠, 이원익, 김수광 같은 당대의 유명인사와 시문을 나누며 가정도 꾸려 잘 지낸다는 소문이 들렸다. 매창은 그리움에 사무친 상사병을 시로 달래며 임이 찾아 주기만을 고대하였다.
촌은과 이별한지 16년만인 1607년 세상이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아 갈 무렵 당상관의 신분으로 국사로 인한 전라감영을 잠시 들렸는데, 매창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촌은과의 해후를 하게 된다.
그 때 유희경은 62세의 회갑을 넘긴 나이요, 매창은 34세의 한물간 퇴기로 노년을 맞아 못다 한 사랑을 짧은 10일간에 몽땅 쏟아 붓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에게는 마지막 나누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창은 38세로 어느 봄날 하얀 배꽃이 지듯 임을 향한 일편단심을 안은 채 쓸쓸하게도 한 많은 세상을 떠나니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란 시 한 수가 부안의 봉두뫼 매창공원에 허균이 지은 추도시비 앞에는 만추의 낙엽만이 딩굴고 있다.
* 매창의 시는 천년고찰 개암사에서 목판본이 유실 그 탁본 원본이 미 하버드대 엔칭박물관에 소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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