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혁명을 위해..."‘슬로우’는 봄꽃처럼…'퀵'을 힐링하자!"

People / 정성수 시인 / 2014-05-13 17: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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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주간=정성수 시인] 오월이다. 희망과 축복을 자찬(自讚)하기에 충분한 계절이다. 오월은 눈부신 계절이다. 봄의 끝자락을 수놓는 봄꽃과 새들의 노래가 절로 기쁨을 샘솟게 한다. 오월을 계절의 여왕, 청춘의 계절, 생명의 달이라 부른다. 그런가하면 오월을 통째로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로 지칭한다. 오월에 걸맞은 적확(的確)한 표현들은 오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희망과 축복을 자찬(自讚)하기에 충분한 계절

오월은 새로운 의욕이 샘솟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닌 달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월에는 기념일이 참으로 많다.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은 어린이 날, 6일은 석가탄신일, 8일을 어버이날. 10일 유권자의 날이자 바다식목일, 11일은 입양의 날. 14일은 로즈데이((Rose Day), 15일은 스승의 날이자 가정의 날, 18일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19일 성년이 날이자 발명의 날, 20일 세계인의 날, 21일 부부의 날, 25일 방제의 날, 31일 바다의 날 등이 있어 각종 행사와 나들이 기회가 많다.

기념일마다 기념식과 행사가 있고 그 외에도 음악회, 전시회, 체육대회 등이 개최 된다. 그야말로 오월은 눈 코 뜰세 없이 바쁘게 지날 갈 것이 자명하다. 산과 들에는 층층나무를 비롯해서 소담스런 수국, 크로버라고 부르는 토끼풀, 지칭개라 부르는 엉겅퀴, 피기 전 모양이 붓 같다는 붓꽃,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 장미가 피기 시작하지만 자연과 꽃을 즐길 틈도 없이 오월은 간다. ‘아, 세월은 잘 간다. 아이 아이∼’ 노랫가락 한 대목처럼 쏜살같이 간다는 말이 딱인 달이 오월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을 스피드 시대고 한다. 고속이라는 말을 제켜두고 광속이라고 한다. 똑딱하는 1초 사이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속도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디지털 시대라고 한다. 아날로그는 구닥다리여서 명함조차 내밀 수 없다. 광속과 디지털이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늘의 사회 일면일 뿐 결코 총체적으로 정확히 짚어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퀵’(quick)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퀵 서비스'다.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에 물품을 전달해 주는 것이 '퀵 서비스'다. 불렀다 하면 총알같이 와서 번개같이 배달해 준다. 어려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말 "빨리 일어나라! 빨리 씻어라! 빨리 먹어라! 빨리 가라! 빨리 해라! 빨리 와라!"가 오늘날 '퀵 서비스' 탄생의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런가 하면 반어인 ‘슬로우’(slow)는 느린, 천천히, 침체를 말한다. 요즘 ‘슬로우’란 주제나 말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다. 삶에서 ‘슬로우’를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방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슬로우’란 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어서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슬로우’에는 또 다른 형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도 한다. ‘슬로우’는 단순히 목가적 차원의 의미를 벗어나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진 사회 변혁의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슬로우’는 현대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퀵’ 문화를 뒤엎을 수 있는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

작금의 우리 시대는 경쟁력과 효과를 강조하는 시대다. 여기서 주도적 이데올로기는 ‘퀵’이다. 이 강력한 이데올로기 ‘퀵’에 대해에 효율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슬로우’야말로 가장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논리인 것이다.

‘슬로우’ 즉 느림을 생존전략으로 내세우는 동물이 있다.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 대표적으로 느린 포유동물 나무늘보다. 시속 0.9km로 움직이는 나무늘보의 느린 동작은 포식자들의 눈에 잘 포착되지 않아 생명을 부지한다고 한다. ‘슬로우’의 덕을 톡톡히 누리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북극해에 서식하는 그린란드 상어도 이 세상의 물고기 중 가장 느린 물고기다. 시속 1km의 이동거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 꼬리지느러미의 좌우 왕복 시간이 7초라고 하니 얼마나 느린 속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무늘보나 그린란드 상어의 생존전략의 ‘슬로우’는 ‘스피드’를 갈망하고 신망하는 인간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프로야구 투수 중에서도 아주 느리게 공을 던지는 선수가 있다. 그 투수의 속구는 채 135km도 안 된다고 한다. 프로야구 통념상 “시속 140km 이하로 공을 던지는 투수는 살아남기 힘 든다.”는 야구 판에서 그가 던지는 슬로우커브는 75km에 이를 만큼 느리다. 이렇게 느린공으로 지난해 10승 고지를 탈환했다니 놀랄만하지 않은가? 이런 사례를 보면서 ‘슬로우’가 결코 “비효율적이거나 버려야 할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혼자서 조용히 느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뼛속 깊이 자리 잡아가는 ‘퀵’을 치유해야 할 때가 왔다. 요즘 각종 매체에서 ‘힐링’이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다. 말하자면 ‘힐링’이 대세다. 이처럼 ‘퀵을 힐링하자!’를 외쳐대는 것은 지금이야 말로 '슬로우'가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은 병이 들고 거기에 사는 우리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는 방증이다. 치유를 해야 하는 이면에는 어둡고 습한 이 시대의 고통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퀵’ 을 ‘힐링’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법을 바꿔야 한다.

그것은 혼자서 조용히 느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비슷한 생각을 갖은 사람들과 ‘슬로우’ 중요성에 대해 교류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느린 삶을 영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고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의 ‘퀵’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주위와 교류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한두 사람만이 아닌 사회 전체가 ‘힐링’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독려해야 한다.

몇 사람이 모여서 세상의 ‘퀵’을 비웃으며 살아 갈수는 있다. 그러나 세상을 장악하는 ‘퀵’을 결코 이길 수는 없다. ‘퀵’을 이기기 위해서는 ‘퀵’에 뒤지지 않는 속도의 대응이 필요하다.

‘간디’가 물레질을 하거나 바닷물을 손으로 말려 소금을 만드는 방법으로 영국을 이긴 것과 같이 ‘마틴 루터 킹’이 비폭력을 호소하며 미국 흑인들의 인권을 신장시킨 것과 같이 ‘퀵’을 이기기 위해서는 미련할 만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슬로우’가 퀵’ 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때가 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은 투쟁의 대상과 직접 싸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여론을 환기함으로써 대상에게 압박을 가한 것일 뿐이다. ‘슬로우’의 승리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인 ‘퀵’은 이미 세계를 점령하고 온 세상에 퍼져 있다.

‘ㄱ’자 할머니의 보따리를 들어주는 따스함!

‘힐링’이 필요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자연을 거부한 인간 행위를 자연은 받아주지 않는다. 거짓이라는 의미의 ‘위(僞)’는 ‘인人+위爲’로 이루어졌다. 거짓 속에 살아가는 존재는 결국 병들기 마련이다. 아픈 사람은 본능적으로 ‘참(眞)’을 찾아 자신의 병을 ‘힐링’하고자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은 참이자 치유의 본향이다. 자연의 순리를 잘 보여 주는 사물로 ‘물’을 꼽는다. 물은 명징하게 증명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으면 돌아간다. 물은 다투지 않으며 파인 곳을 만나면 채우고 마침내 바다를 이룬다. 바다는 넓은 품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키워낸다.

자연에 역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날마다 다투면서 서로를 이기려고만 한다. 고층빌딩과 고급주택에 눈이 간다. 고소득과 고이윤을 염려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기를 쓰고 아부와 아첨을 밥 먹듯이 한다. 마음은 피폐해지고 몸은 병들었다. 무엇하나 진정으로 적셔주는 물이 되지 못하고 작은 삶 하나 키워내질 못한다.

앞만 보고 뛰면서 바빠 죽겠다고 불만만 늘어놓는다. 분주하게 살면서 조바심을 내지만 작은 마음 그릇 하나 채우지 못하고 산다. 천천히 걸으며 발아래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꽃과 이름 모를 풀과 처음 보는 곤충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된다. 가슴에 성찰의 씨앗하나 품지 못하고 날마다 하늘 보기 부끄러운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성에 가쳐 유폐된 섬처럼 살아간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랬다. ‘힐링’이 필요함에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자연을 보고 살면서도 자연을 닮지 못했다. 산에 오르면서도 더 좋은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땀을 흘렸다. 자연은 병들거나 말거나 아랑곳 하지 않았다.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슬로우’를 사랑한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게 허락한 순간들을 감사한다. 나의 ‘슬로우’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퀵’과 한판 승부를 걸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고요한 한가로움’과 ‘빈둥거림’을 구분하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빈둥거림’을 위해 대부분의 ‘고요한 한가로움’을 ‘퀵’과 맞바꾸는 어리석음을 자행한다.

속전속결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고요한 한가로움’에 피해 의식만을 갖는다. 삶은 따분하며 불완전하고 그 삶에 낙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빨리빨리!’ 라고 하는 삶이 현대인의 불안 심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루함과 따분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슬로우 슬로우!’를 생활화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지표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길가에 핀 한 송이 민들레를 들여다보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ㄱ’자 할머니의 보따리를 들어주는 작은 따스함이 ‘슬로우’다. 이처럼 ‘슬로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지면서 승자와 폐자가 공존한다. 세상에는 강자의 수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있다, 살아가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삶이야말로 세상에서도 빠른 ‘퀵’ 중 하나다. 어쩌면 ‘퀵’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것이 삶이 아닌가 한다. 나는 ‘슬로우’가 지향하는 사회를 꿈꾼다. 그것은 나의 염원이며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슬로우’는 단순한 삶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혁명이다. 우리들은 천천히 사는 법을 익혀야 하고, 심심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심심해야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사색하는 법을 알아서 마음을 기름지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던 ‘퀵’ 지향적인 삶이 결코 최선책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는 날 ‘슬로우’는 봄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퀵퀵!’ 보다는 ‘슬로우 슬로우!’ 가 삶의 여유와 생각의 간극을 넓혀준다. 오월에는 좀 천천히 가자. 천천히 가면 그 동안 못 본 것들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 정성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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