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㉕] 시작 노트

문화 / 이은화 작가 / 2025-05-01 09: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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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한용국


시를 한 편 쓰고 이것은 시일까 생각한다.
살다가 이게 사는 걸까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를 생각하면 귓바퀴가 점점 둥글어지고
미래를 생각하면 손톱 발톱이 쑥쑥 자라난다.
집에 있는데 집이 내게서 달아나고
아내 곁에 있는데 아내가 내게서 달아난다.
부모는 어느새 먼 곳에서 두려워 떨고 있다.
친구들은 친구일 때만 친구였을 뿐이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학자인데 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사람인 것은 맞다 사람이라서
나를 생각하면 또 나에게서 쫓겨나고 만다.
이런 마음일 때, 갑자기 시를 쓰게 되지만
시를 쓰고 나서 그것은 죽음이었을까 생각한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화자는 부모와 아내, 친구가 있고 시인이자 학자이다. 모든 구성원이 곁에 있지만 누구도 곁에 없는, 이 시 안에는 손수건만 한 햇살 한 장 찾을 수 없다. 무엇이 화자를 이토록 불안으로 밀어 넣었을까. ‘나는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이것은 해서 뭘 하나? 저것은 무슨 소용?’ 보들레르가 서른여섯에 쓴 편지 구절처럼. 염세적 나열만이 화자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시. 이렇듯 불안의 의미가 고조되는 동안 화자는 자기 부정에 이르고 마침내 ‘시를 쓰고 나서 그것은 죽음이었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시를 쓴 행위마저도 죽음으로 인식하는 화자, 불안이 투명한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잘 읽히는 시이다.

정체성마저 뒤흔드는 화자의 끝없는 부정은 불안한 사회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침 눈을 뜨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의식주 앞에서 고민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이런 난제들은 현대인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막막함과 맞닿아 있다. 이때 한 번쯤 자신의 불안 요소와 행복 요소를 메모해 보면 어떨까. 그동안 일인칭으로 살았던 삶을 여러 시점으로 재구성해 보는 것, 이렇게 관계적 공간을 넓히다 보면 자신에게 멀어졌던 감사함이 주변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니체는 ‘행복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행복은 긍정과 감사로부터 시작되는 것. 불안의 요소를 긍정적으로 바꿔 간다면 우리가 강하게 희구하는 자신만의 안정감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모든 것들이 나와 멀어져 있다는 불안과 마주할 때가 있다. 누구나 품고 있는 이 감정을 ‘나도 이런 걱정을 한 적이 있지.’ 또는 ‘나와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군.’이라며 서로 공감하게 되는 시.


이렇듯 시인의 「시작 노트」는 한 개인의 정서를 떠나 우리 모두의 정서를 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적 불안을 노출함으로써, 우리에게 이것은 현대인의 삶에 밀착된 감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나친 걱정은 멈춰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는 시. 불안을 응시한 시인의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이 책에는 어떤 감정들이 웅크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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