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61] 삼선 슬리퍼 한 쌍

문화 / 이은화 작가 / 2025-12-01 11: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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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 슬리퍼 한 쌍

이영혜



한 방향으로 나란한
삼선 슬리퍼 두 켤레
죽음 한 켤레 삶 한 켤레가
엄마 집 현관을 지키고 있다

이제 그만 치우라고 잔소리해도
집안엔 남정네가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변명인지 고집인지 그리움인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기억의 미련인지
십 년 넘게 한자리에 붙박여 있다

절뚝이던 다리로 15층에서 마당까지
쓰레기 들고 내려오던 저 슬리퍼
더 이상 늙지도 낡지도 않는
아빠의 자취다

엄마는 자꾸만 커다란 저 슬리퍼를 끌고
쓰레기 버리러 나가신다

아빠의 커다란 눈동자 같고 함박웃음 같은
보름달빛 백발 위에 얹고서
발 시린 줄도 모른 채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상 중 내내 옆집 아저씨의 죽음을 보듯 담담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의 하관 앞에서 황소울음을 우셨다. 서러운 통곡이 계속되고 가족들은 어머니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두 분이었지만 함께 살아온 정이 이렇게 큰 것이구나, 싶었다. 어머니에게 “엄마, 아버지 많이 사랑했나 봐” 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어머니 답은 의외였다. “그동안 같이 산 세월이 겁나 아까워서 울었다.”라며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머니는 이후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음식 앞에서 즐겨보던 송해 씨의 노래자랑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에서 수시로 아버지를 소환했다. “집안엔 남정네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이유와 떠난 이를 놓지 못하는 시인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이다. “발 시린 줄도 모른 채” 삼선 슬리퍼를 신고 분리수거를 하는 시인의 어머니, 그 차가운 발과 아버지의 따뜻한 기억 사이의 온도차가 바로 그리움의 깊이가 아닐까. 어쩌면 “삼선 슬리퍼”는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 주는 유의미한 상징일 것이다.

아버지를 들먹이는 어머니께 가신 지 30년이 넘은 아버지가 이제는 잊힐 만하지 않느냐고 가끔 묻는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 안에 현존하는 아버지의 기억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삼선 슬리퍼를 버리지 못하는 시인의 어머니처럼, 이는 “더 이상 늙지도 낡지도 않는” 아버지들의 기억이 시인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 곁을 지키기 때문이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습관처럼 말이다. 떠난 이의 사소한 물건 하나가 어떻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남아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누구든 한 번쯤 집 어딘가에 말없이 머무는 ‘누군가의 부재’를 떠올리게 된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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