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56] 스침에 대하여

문화 / 이은화 작가 / 2025-10-27 12: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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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침에 대하여

송수권


직선으로 가는 삶은 박치기지만
곡선으로 가는 삶은 스침이다​
스침은 인연, 인연은 곡선에서 온다
그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다
스침은 느리게 오거나 더디게 오는 것
나비 한 마리 방금 꽃 한 송이를 스쳐가듯
오늘 나는 누구를 스쳐가는가
저 빌딩의 회전문을 들고나는 것
그것을 어찌 스침이라 할 수 있으랴
스침은 인연, 인연은 곡선에서 온다
그 곡선 속에 희망이 있고 추억이 있고
온전한 삶이 있다
그러니 스쳐라 아주 가볍게
천천히​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오늘 당신은 누구의 손과 옷깃을 스쳤나요. 횡단보도에서 편의점에서 카페에서 스친 낯선 눈빛들, 그리고 닿을 듯 닿지 않은 손등과 마음. 어쩌면 우리는 매일 수십 번의 인연을 스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알아채지 못할 뿐. 스침은 서두르지 않는 속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필요하지요. 나비가 꽃잎을 스치듯 말이에요.

곡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느린 길 위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만나지요. 부드러운 곡선 안에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으니까요. 서두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 이 우연 속에서 바람이 뺨을 스치듯, 아주 짧지만 부드러운 접촉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이것을 인연이라고 부르지요. 인연은 곡선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스침이라고요. 이 스침은 서로의 시간을 살짝 겹치는 일, 그 순간 잠시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 어쩌면 스침은 인연의 시작이고 이별의 예고이며 서로가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짧은 인사가 아닐까요. 그 안에는 어떤 약속도 없지만 약속보다 오래 남는 감촉이 남을 수 있지요. 스치듯이요.

시인이 권하는 삶의 방식은 부딪치지 말고 스치라고. 움켜쥐지 말고 스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들은 세게 붙잡으면 부서지는 것들이 있지요. 가볍게 스쳐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요. 어쩌면 인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니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가세요.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상처가 아니라 여운이 남도록. 우리가 스친 사람들이 멍들지 않고 웃을 수 있도록.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스침입니다. 스침이란 서로의 곡선이 살짝 겹치는 것. 그리고 그 짧은 겹침 속에 평생 기억될 무언가를 남기는 것일 테니까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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