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pick]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역사 “민족분단의 비극”

People / 김도영 편집위원 / 2019-03-25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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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영 논설위원
[일요주간 = 김도영 편집위원]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출범하였다. 3.1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에 많은 애국지사들을 결집하는데 구심점이 되어 임시정부 수립을 이루었으나,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된 정부가 출범한 데서 예견되었던 대로 활동 노선을 두고 갈등을 겪으면서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고, 6.25전쟁으로 이어져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리는 비극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픔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게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의 기쁨을 실감하기도 전에 미군과 소련군의 무력에 의해서 38선이 그려지고 과거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구심력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미·소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선택을 한국 정치세계에 요구하게 된 것이다.

미·소간의 냉전이 고조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남한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북한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선택하여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남한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으로 북한이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각 단독 정부를 선포하였으나, 남과 북에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갈등은 더욱 격화되어 크고 작은 무력분쟁으로 이어지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은 소련. 중공군과 남한을 기습 침략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가 미국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여 탈환에 성공하고,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1953년 7월 27일 남북 정전협정을 체결하는데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최후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무장 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목적으로 휴전에 합의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단이 고착되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1994년 제네바 핵합의 등을 무시하고 핵무기 개발로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패권 경쟁국들에게 각축장이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들은 남북의 통일보다는 분단 상황을 더 선호하는 흐름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을 적극 저지에 나선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비핵화에 관하여 1차 싱가포르. 2차 베트남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것은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노력을 기울여 개발한 ‘만능의 보검’이라는 핵과 핵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체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비핵화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밝히지 않은 채 핵무기를 생산, 시험, 확산, 사용하지 않겠다는 핵보유국으로서 의무를 준수할 것을 강조한 것을 보더라도 완전한 핵 폐기를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어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오로지 북미 정상회담의 비핵화에 관한 낙관적 희망만으로, 또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우리의 안보를 담보하는 것은 자주국방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따라서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내용의 이행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간다.


70년 전 북한의 기습 남침을 상기하면서, 우리 정부는 외교 안보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시급한 대비책 마련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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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 편집위원

김도영 편집위원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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