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최대 부족인 줄루족 빈민가 출신
총선에 압승 민주화 이후 네 번째 대통령
카리스마 넘쳐 빈곤층 노조 폭넓은 지지
[일요주간= 소정현 기자] 2010년 6월 11일부터 7월 12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역에서 개최되는 세계인 대축제 월드컵! 월드컵 경기를 치를 남아공의 9개 도시(10개 구장)들은 축제준비로 동분서주하면서 그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 | ||
▲ 남아프리카공화국 신임 대통령 ‘제이콥 주마’ |
▼ 민주화 이후 네 번째 대통령에
2009년 5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새 대통령에 ‘제이콥 주마(Jacob Zuma)’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총재가 공식 선출됐다. 이날 남아공 의회 간선 투표에서 주마 대통령은 277표를 얻어 47표에 그친 ‘음부메 단달라’ 국민회의(COPE) 후보를 상대로 낙승을 거뒀다. 남아공의회는 전체 400석의 의석 가운데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264석을 점하고 있으며, 민주동맹(DA, Democratic Alliance)과 국민회의(COPE)의석은 각각 67석, 30석에 불과하다.
드디어 2009년 5월 9일 주마 대통령은 수도 프리토리아의 대통령 집무 청사인 유니언빌딩 앞 광장에서 취임식을 갖고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철폐 이후 네 번째 흑인 대통령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12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주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 국가를 재건한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뜻을 굳건하게 이어받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앞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2009년 4월 22일 실시된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전체 의석 400석 중 264석을 확보하며 주마의 대통령 당선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주마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한 2009년 총선은 흑인정권 출범 이후 사실상 일당 체재를 사수하여 온 ANC가 내분으로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세력 판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 매우 주목을 끌었었다.
무기 스캔들에 연루된 당시 ANC 주마 총재에 대한 검찰기소를 둘러싼 갈등 끝에 2008년 9월 음베키 대통령이 축출되자, ANC의 비민주성을 비난하며 집단탈당을 결행한 ‘음베키’ 지지 세력이 국민회의(COPE)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2009 총선에 임한 만큼 ANC 지지표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 | ||
▲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반갑게 조우하고 있는 주마 대통령 |
반면, 백인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DA는 2009 총선에서 약진의 성적표를 일구어냈다. DA는 2004년 총선에서 12.34%의 지지율에서 이번에는 16.66%를 득표하며 세를 더욱 확장했다. 특히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웨스턴 케이프주(州)에서 51.46%를 득표하여 집권당인 ANC(31.55%)를 상대로 이례적 대승을 거두면서 지방선거 사상 초유로 ANC에 쓴잔을 안겼다.
▼ 오뚝이 같은 불사조의 정치인
주마 대통령은 한마디로 잡초와도 같은, 마치 오뚝이와도 같은 삶을 살아온 끈기와 집념으로 똘똘 뭉친 불사조의 정치인이다. 무려 50여년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서 생사를 넘나들면서 온갖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최정상에 선 주마!
주마 대통령은 남아공 최대 부족인 ‘줄루족’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1942년 4월 12일 ‘콰줄루-나탈 주(州) 인칸들라’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주마는 부친을 일찍 여의는 바람에 하녀로 생계를 꾸려온 모친을 도와 일찍부터 염소와 소 떼를 모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그러니 주마는 이력서 학력 란에 ‘무학'으로 기재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 운동가로 활동하던 가족의 영향을 받은 주마는 일찍이 정치에 눈을 떴다. 17세이던 주마가 1959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집권층인 백인들의 인종차별(아파라트헤이트)에 맞서 무장 항쟁 운동에서 늘 선봉에 서면서 장기간 투옥 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다.
1963년에는 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던 로벤섬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다. 1973년에 출소하자마자 주마는 콰줄루-나탈주에서 ANC 재건 임무를 수행한다. 1975년부터는 잠비아, 스와질란드, 모잠비크 등지에서 조직 구축과 정보활동을 이끌었다.
1990년,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합법화 되면서 귀국하여 1995년 ANC 사무차장과 1997년 ANC 부총재, 1999년 타보 음베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부통령에 지명되면서 음베키 대통령의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2005년, 무기거래 스캔들로 음베키 당시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직에서 해임된 그는 같은 해 민주화 투쟁에서 동고동락 했던 동지의 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2006년 무죄판결을 받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주마는 이렇듯 끈질긴 생존력으로 2007년 12월, 아프리카 민족회의 총재경선에서 음베키 대통령과의 대접전 끝에 총재로 당선되었다. ANC는 당시 전당대회에서 주마 부총재를 임기 5년의 총재로 선출했다. ANC는 그동안 당내 원로와 중진들의 사전 협의에 의해 총재를 선출하는 전통을 고수하여 왔으나 ‘주마-음베키’의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50여년 만에 비밀투표를 통해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대진통을 겪었다. 그 후 2008년 9월, 음베키 대통령은 사임하였다. 참조로 차기 총재는 2012년 12월 선출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주마의 부패 혐의다. 주마는 2005년 6월의 프랑스 군수업체와 관련된 부패 스캔들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뇌물수수, 돈세탁, 공갈 등 무려 16가지 혐의로 피소됐다. 2007년 12월 ANC 총재 경선에서 음베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직후 그 실상이 불거지면서 주마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마를 둘러싼 검찰 고위인사 간 통화 내용이 공개돼 '기획수사' 논란이 일자 2009년 4월 6일 기소가 전격 철회되면서 대위기에서 벗어났다. 2009년 4월 22일 총선을 목전에 두고 검찰 수뇌부의 전화도청 테이프를 확보해 검찰의 항복을 이끌어냄으로써 대권가도의 최대의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극적 성공했다.
드디어 2009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주마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압승을 거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다수당의 대표를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기에 주마는 2009년 5월 6일, 국회에서 상대 후보를 큰 차이로 제치고 대통령 당선을 최종 확정하었으며, 5월 9일,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이후 네 번째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주마 총재를 직접 만나보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같지 않게 논리적이고 상당한 달변"이라는 것이 주변의 한결같은 후한 평가이다.
▼ ‘일부다처제’ 망신살 아랑곳없어
![]() | ||
▲ 다섯 번째 부인 ‘토베카 마디바’와 결혼축제에 흥이 난 주마 대통령 |
2006년 민주화 동지의 딸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던 주마 대통령이 과연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에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멈추질 않고 있다. 주마 대통령은 총 5번 결혼했으며, 현재 20명의 아이가 있다. 주마에게 20번째 아이(딸)는 ‘소노노 호자’와 혼외정사의 산물이다. 소노노 호자(39)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혼녀로, 남아공 프로축구 올랜도 파이어리츠 구단주이자 월드컵조직위원회 회장인 어빈 코자(62)의 딸이다.
주마 대통령은 2010년 1월 4일, 생애 5번째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주마 대통령은 현재 68세이고 새 부인은 37세로 무려 31세의 차이가 난다. 다섯 번째 부인인 ‘토베카 마디바!’ 이미 주마와 두 자녀를 둔 토베카 마디바는 남아공 동부 항구도시 더반 태생으로 줄루랜드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더드 뱅크 등 여러 기업체에서 근무한 커리어 우먼이다.
주마 대통령의 첫 부인 ‘시자켈레 쿠말로(69세)’와는 1973년 결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웅코사자나 들라미니’이며, 세 번째 부인은 ‘케이트 만초’이다. 두 번째 부인 웅코사자나 들라미니는 1998년 주마와 이혼하였으며, 현재는 내무장관이다. 세 번째 부인 케이트 만초는 2000년에 자살하였다. 5번 째 결혼식을 마친 주마 대통령은 놀랍게도 2011년에는 여섯 번 째 결혼식이 기정사실화 된다. 주마 대통령의 뉴파트너는 ‘응게마’란 여성으로 요하네스버그에서 IBM에 근무하는 재원으로 알려진다.
첫째 부인, 시자켈레 쿠말로 주마의 여사의 인간적 면모가 현지 일간지를 통해 자세히 소개돼 세인의 이목을 끈다. 주마 대통령보다 한 살 위인 쿠말로 여사는 16세 때인 1957년 주마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63년 주마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무장조직에서 활동하다 로벤섬 감옥에 투옥되면서 무려 10년을 기다린 끝에 출소 2년 뒤인 1975년 소 11마리를 몸값으로 받고 결혼했다. 쿠말로의 시련은 여기에서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다. 주마가 결혼 직후 망명 생활을 하는 바람에 14년을 생과부로 살아야 했으며, 이 때문인지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남편이 나라의 남아공의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쿠말로는 줄루족의 터전인 콰줄루 나탈주(州)의 시골 마을 은칸들라에서 생활의 터전을 떠나질 않고 있다. 대통령 관저 ‘마흘람바 은들로푸'(코끼리가 사는 곳이라는 뜻)에서 극진하게 예우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쿠말로는 갈대로 지붕을 인 전통가옥이 딸린 자신의 농장에서 평범한 생활에 만족한듯하다. 자신의 농장에서 쿠말로는 직접 채소 등 농작물을 길러 시장에 내다 팔고, 닭과 염소 등 가축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있다. 마을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양계 사업을 추진하는데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국내외 현안’ 어떻게 헤쳐 나갈까?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대의 경제대국이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깊은 상흔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양극화가 심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실업률이 무려 21%에 달하고 하루 2달러 미만 극빈 생활자가 전 국민의 34%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주마의 입지를 좁힐 것이 분명하다.
주마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정치적 동맹체인 남아공노총(COSATU)과 남아공공산당(SACP) 등 좌파 세력으로부터 빈곤층 위주의 정책을 조기 시행하라는 거대한 압력에 직면해 있다. 주마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일자리 창출, 지역개발, 빈곤 해소, 공공 서비스, 교육과 보건의료 개혁 및 향상을 중점 내세웠다. 주마로서는 자신을 예수에 비유해 가며 몰표를 던져준 흑인 빈곤층의 열망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인 까닭이다. "나는 교육을 사랑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남아공을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킬 것"
주마가 국제사회에서 反인권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상당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주마가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점을 예의주시했다. 무가베가 2008년 불법선거 논란 끝에 재집권했을 때 주마는 부정적 입장에서 무가베 편으로 선회했다. ANC가 총선 공약을 통해 "고강도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백인들의 불안한 모습이 역력하다. 합법적으로 부유층 토지를 몰수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시민과 공감하는 언론 일요주간에 제보하시면 뉴스가 됩니다'
▷ [전화] 02–862-1888
▷ [메일] ilyoweekly@daum.net
[ⓒ 일요주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